인생을 살다 보면, 아버지로서 설 자리가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2012년 파업이 그랬습니다. 회사의 매각 결정으로 수백 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졌고, 고용 안정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은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몇 달째 월급이 끊긴 시간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버지라면 마땅히 가족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고 여겨 왔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파업의 현실은 저를 그런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대책도 확신도 없는 상태로, 마치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파격적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래도록 ‘겸손하라’는 권고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140여 일에 걸친 파업의 시간을 지나며, 이 말씀은 제게 조금 다른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인간 아버지가 가족 안에서 중심의 자리를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초대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기보다, 가족들과 함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모든 답을 알고 결정하는 존재라기보다, 함께 묻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말입니다.
파업의 시간은 제게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중심의 자리를 내려놓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더 이상 가족들 앞에서 모든 답을 가진 사람처럼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가족 곁에 함께 머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심에 있지 않아도, 가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족 각자의 자리가 또렷해졌습니다.
제가 새롭게 배운 아버지의 자리는, 가족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된 자리에 가까웠습니다.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여지, 모른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여백, 필요하다면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담담함 말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그때, 제자 요한 역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심의 자리에 서려 하지 않았고, 십자가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 또한 해결책이 아니라 관계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은 새로운 권위가 아니라, 서로를 맡기고 돌보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렇게 다시 배웁니다. 저 역시 ‘아버지’라는 책임을 맡아 가족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끎이 중심 차지가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합니다. 모든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함께 질문을 품고 함께 결정해 가는 사람으로 살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중심에 서서 완전한 척하는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도망치지 않는 아버지로 살고자 합니다. 권위가 아니라 관계 안에 머무는 아버지로 살아갈 용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