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이 말이 정말 그런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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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2026-06-24 09:04:34 수정일 2026-06-24 09:04:34 발행일 2026-06-28 제 349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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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오해의 근원은 언어다. 언어는 외적 사태, 내적 감정을 지시하기는 해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한다. 언어에는 개념과 경계가 있고, 그 경계 안에서만 의미가 일부 전달된다. 게다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떠올리는 언어의 끝, 즉 경계가 서로 다르다.

저마다 자신이 경험한 만큼, 자신의 상황, 관심, 의도에 따라 말하고 그만큼만 듣는다. 그래서 언어가 담는 내용은 더 제한되고, 말하는 입과 듣는 귀가 서로 어긋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발언에 대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이해와 반응이 다르지 않던가.

언어는 어떤 내용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지시하는 내용의 ‘밖’은 가린다. 가령 밤하늘의 보름달에 집중하면 주변의 별은 희미해진다. 어떤 이는 보름달을 보며 문학 언어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천문학적 상상을 하며, 어떤 이는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이렇게 언어는 저마다의 관심에 따르면서 한쪽을 가리는 식으로 작동한다.

큰 세계에 대한 상상은 작은 세계를 괄호 속에 넣는다. 가령 “예수님은 구원자”라는 말은 신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섭리를 연상시키지만, 그 연상은 종종 예수의 소소한 일상을 가린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을 걷고, 빵을 얻어먹다시피 하고, 때로는 혼자 뒷일을 보던 일상의 예수는 영원한 구원이라는 큰 개념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일상을 배제한 구원이란 모순이다. 주변이 어두워야 보름달이 더 빛나게 마련 아닌가. 어둠 없는 밝음, 죽음 없는 부활은 없다. 가려진 세계를 같이 보아야 구원의 실상도 보인다.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언어가 무슨 뜻인지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가령 ‘신이 없다’는 무신론자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신이 있다’고 대응한다. 그런데 ‘신이 있다’고 말할 때, 희미하게 물러나는 배경이 있으니, 신이 있는 ‘장소’다. 신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이 있는 그 ‘장소’를 물을 때, 신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상상이 신을 얼마나 왜소하게 만드는지 드러난다. 어딘가에 있는 신, 그 신은 그 ‘어딘가’보다 훨씬 작은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은 그리스도인도 흔히 경험한다.

가령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구절을 읽으며, 신이 하늘 어딘가에서 빛과 동물과 인간을 제작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그 하늘이 신보다 더 큰, 신보다 더 앞선 존재가 되고 만다. 신을 거대한 공간 어딘가에 머무는 작은 존재처럼 만들어버린다. 신이 하늘에 있다는 생각은 하늘을 신보다 더 위대하게 만들고, 신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는 말은 인간의 몸에는 신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신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어딘가의 ‘밖’은 신이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신이 천지의 창조자라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과 어긋나는 상상에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늘 되물어야 한다.

‘신이 있다’는 말이 ‘신보다 더 큰 공간’, ‘신보다 앞선 시간’을 전제하는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공간과 시간에서 신을 보아야 한다. 존재하는 공간이 신이고, 변화하는 시간이 신이어야 한다. 행여 이런 인식이 위험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신’ 개념의 심층을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는 증거다.

물론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서 먼지보다 작은 지구의, 모래보다 작은 인간에게 전파 같은 계시를 보내는, 그런 신도 신이다. 신이되, 인간이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자기식대로 상상하는 신이다. 신을 자기중심적으로 사물화시키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가 쓰는 언어의 개념, 배경, 맥락을 묻고 또 물으며, 개념의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존의 자기 인식에 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만물의 심층에서 만물의 모습으로 계시는 신을 만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라고 하지 않던가. 언어의 방주 안에 갇히지 말고, 방주의 창 ‘밖’을 보며 그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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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