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즉각 응답하는 사목으로 생명문화 수호 역할 다해야”
환자가 신체·정신·사회적 고통을 제거할 목적으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는 ‘의사조력자살’(이하 조력자살)을 둘러싼 사회 여론이 허용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해외 조력자살 단체와 연결된 한국 거주자 사례도 확인되는 가운데, 조력자살은 더 이상 법과 윤리 논쟁에 머물 수 없게 됐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선택지로 떠올리는 이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동반할 것인지가 한국교회 앞의 사목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조력자살로 기울고 있는 한국 사회
국내 여론은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다. 한국리서치가 2025년 5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른바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79%로 나타났다. 2022년 조사에서도 82%가 찬성했고, 2024년 조사에서도 제도 도입 필요성에 84%가 공감하는 등 관련 여론은 꾸준히 높은 수준을 보였다.
스위스 조력자살 단체에도 한국 거주자 회원이 꾸준히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스위스 조력자살 단체 중 하나인 디그니타스의 한국 거주 회원은 2020년 72명에서 2025년 말 144명으로 늘었다. 회원들은 디그니타스를 통해 조력자살에 관한 상담이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98년부터 2025년까지 디그니타스를 통해 조력자살한 한국 거주자는 11명에 달한다. 디그니타스가 제공한 통계에서 국적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회 안에서도 조력자살을 현실의 선택지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음을 드러낸다.
입법 논의도 이미 시작됐다. 22대 국회에서는 2024년 7월 안규백 의원 등 11인이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말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대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는 의사조력자살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밝혀 왔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죽음을 생각하는 신자나 가족이 본당을 찾아왔을 때, 교회가 어떻게 듣고 누구에게 연결할 것인지도 준비돼 있어야 한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만으로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붙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리건주 보건당국의 「의사조력자살 허용법(Death with Dignity Act) 2025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조력자살을 선택한 이들이 밝힌 이유는 통증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 반복적으로 많이 제시된 이유는 자율성 상실(89.0%), 삶을 즐겁게 하는 활동에 참여할 능력 저하(89.0%), 존엄성 상실(65.0%) 등이었다. 조력자살 문제는 돌봄과 관계, 의존, 존엄성에 대한 인식과 깊이 연결돼 있다.
실제 국내 사목 현장에서도 이러한 질문은 이미 제기되고 있다. 조력자살을 결심한 신자를 동반했던 한 본당신부는 “옳고 그름은 분명히 알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뚜렷하게 알기 어려웠다”며 “결국 사제 개인으로서는 만나고, 기도하고, 설득하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며 무력감을 느꼈던 경험을 전했다.
그는 “실제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은 상상하기 어렵고 헤아릴 수 없다”며 “그분이 겪는 고통과 가족들이 지쳐 있는 상황을 보면서, 조력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이 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교회 차원의 동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조력자살 예방 위해 나선 해외교회들
해외교회는 이미 이러한 사목적 대응을 구체화하고 있다.
호주 주교회의는 모든 주에서 ‘자발적 조력사망’이 합법화된 뒤, 이를 고려하는 신자를 동반하는 사제·원목자·사목자를 위한 지침 「그리스도인의 희망으로 증언하고 동반하기(To Witness and to Accompany with Christian Hope)」를 마련했다.
이 문서는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이 교회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를 고민하는 환자를 교회가 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환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통증은 조절되고 있는지, 가족에게 짐이 된다고 느끼는지, 완화의료의 가능성을 충분히 들었는지 살피도록 안내한다. 성사와 장례 등에 있어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다룬다.
캐나다 주교회의는 본당용 완화의료 교육 자료 「희망의 지평(Horizons of Hope)」을 마련해 생애 말기 돌봄을 본당 공동체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완화의료, 죽음, 고통, 사별, 영적 동반을 신자들이 함께 배우고 나누도록 해 병자와 가족이 본당 안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다. 토론토대교구도 완화의료 안내 자료를 본당에 배포하고, 완화의료와 호스피스 정보를 찾는 이들을 지역 자원으로 연결하는 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주교회의도 병자와 임종자를 위한 교육 자료와 본당 지도자용 자료를 제공하며, 생애 말기 돌봄을 생명문화 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미국교회 내에서는 「조력자살에 관한 20가지 질문(20 Answers: End of Life Issues)」 같은 문답식 교육 자료 활용해 안락사와 조력자살, 연명의료 중단, 완화의료, 환자 권리 문제를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목적 대응이 필요할까
해외교회 사례는 한국교회가 앞으로 준비해 갈 사목적 응답의 참고가 된다. 조력자살을 고민하는 이가 본당을 찾아왔을 때, 본당 사목자가 참고할 초기 대응 지침, 성사와 장례에 관한 사목 기준, 생애 말기 돌봄 교육, 교구 차원의 상담·연결 창구 등의 마련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환자와 가족이 고통을 말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한 과제다.
조력자살에 관한 정보 제공과 생명과 돌봄의 문화 형성도 중요하다. ‘존엄’이라는 말이 생명을 끊는 선택을 미화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알리고, 신자들이 생애 말기의 생명과 돌봄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꾸준히 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는 「조력자살에 관한 20가지 질문」 번역을 마치고, 하반기 중 출판을 계획하고 있다.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소장 박은호(그레고리오) 신부는 “조력자살은 통증의 문제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불안,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 돌봄의 사각지대가 함께 놓여 있다”며 “교회는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찾아내고, 본당과 가톨릭 의료기관의 자원을 연결해 의료적으로나 영적으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고통받는 사람이 ‘나는 짐이 아니다’, ‘교회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