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걷고 기도하고] 청주교구 멍에목성지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1851년 10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깊은 산속에 자리한 교우촌을 찾아다니는 사목 여정을 이렇게 소개한다. ‘충북의 알프스’라고도 불리는 충북 보은군 구병산 자락.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건물을 만났다. 최양업 신부는 같은 편지에서 이곳을 이렇게 전했다. “…멍에목이라는 한 산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나그네’들의 거처 청주교구 멍에목성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성당이었다. 정팔각형의 벽면 위에 팔각뿔 형태로 지붕이 올라간 성당의 모습은 언뜻 유목민들의 천막처럼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신앙 하나만을 보고 나그네살이를 자처했던 멍에목 교우촌의 신자들을 닮았다. 이 깊은 산골 멍에목에 정확히 언제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교회사 기록에 멍에목이 등장하는 것은 1827년 정해박해 때부터다. 당시 상주 포교는 멍에목에 살던 복자 박경화(바오로)·박사의(안드레아) 부자를 체포했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두 복자는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증언하다 순교했다.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깊은 산속 멍에목까지 숨어 들어왔지만 이곳마저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멍에목 교우촌의 신자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종륜(루카) 복자가 이곳에서 생활하다 울산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하느님의 종 전 야고보가 체포됐고, 또 다음 해에는 하느님의 종 최용운(암브로시오)과 여 요한과 최조이 부부, 안 루카, 여규신, 최운흥 등이 붙잡혀 순교했다. 그렇게 멍에목에 박해자들이 들이닥치면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다시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깊은 산골짜기에 모여들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숨어들었고, 같은 이유로 흩어졌고, 또다시 같은 이유로 모여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루카 9,58)고 하신 예수님을 따라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나그네 살이 하던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 살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다 “과연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편지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멍에목 신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멍에목 신자들의 신앙은 비신자들까지도 감복시켰다.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가득한 이 목소리에 지체 높은 양반 조 씨는 큰 기쁨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버리고 세례를 받았다. 조 씨가 멍에목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화재로 모든 것이 타 버린 마을의 이야기를 들은 조 씨는 그곳 사람들을 만나 위로하려 했다. 그런데 마을의 누구 하나 근심하거나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던 조 씨는 마을 사람들을 붙들고 그 이유를 물었지만, 도무지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집요한 물음 끝에 마침내 이 대답을 들은 조 씨는 비로소 만족하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했다. 먼저 온 집안 식구들을 온갖 구실로 여러 곳에 분산시키고 우연한 화재처럼 꾸며 집과 위패를 불태웠다. 그리고 실성한 것처럼 위장한 뒤 멍에목을 찾았고, 이곳에서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바오로’가 됐다.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의 영성을 담아 최양업 신부가 집전한 세례성사는 수없이 많겠지만, 세례를 준 장소와 그 사연, 세례받은 이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멍에목이 유일하다. 이런 세례의 영성을 담은 곳이 성지의 ‘세례성당’이다. 정팔각형 형태의 성당은 건축 자체로 세례의 영성을 표현하고 있다. 교회 전통에서 ‘8’은 ‘여덟째 날’,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와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그리고 팔각뿔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천장을 바라보면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한 성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 바로 아래에 세례대가 자리하고 있다.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또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백성을 향해 내리는 모습이 성당의 형상과 성미술의 조화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세례성당’ 바로 지하에는 ‘세례동굴’도 조성돼 있다. 이곳에서는 산자락에서 사시사철 흐르는 자연수로 세례갱신식을 할 수 있어, 세례의 의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또한 성지는 인근 펜션을 매입해 조성한 순례자의 집에서 순례자들이 세속을 떠나 하느님 안에서 깊이 머물던 신앙 선조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성지 담당 권상우(베드로)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양들만 바라보고 사목하신 것처럼, 멍에목성지도 화려하고 커다란 구조물이 아닌 소박한 건물로 조성돼 있다”면서 “신앙의 고민이 있거나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고 싶은 분들이 조용히 와서 오래, 깊이 머물다 가는 성지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 순례 길잡이 - 주소: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18 - 미사: 매주 화~주일 오전 11시 - 순례 문의: 043-543-0690

발행일 2026-10-11 제3510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양근성지

물을 머금은 땅에서도 강인하게 뿌리내리는 버드나무. 남한강변에 줄지어 선 버드나무는 거센 바람에 가지가 흔들려도 뿌리만큼은 좀처럼 뽑히지 않는다. ‘버드나무 뿌리’를 뜻하는 양근(楊根)에 자리한 수원교구 양근성지에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낸 신앙 선조들의 얼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신앙과 함께한 삶과 죽음이 겹쳐 있는 양근 성지는 천진암 강학을 주도한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가 태어난 곳이자 복자 조숙(베드로)·권천례(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초기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만큼 양근 일대에는 순교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순교자들은 양근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오밋다리 옆 백사장에서 치명했다고 한다. 현재 오밋다리는 사라졌고, 성지에서 1.7㎞가량 떨어진 양근대교 인근을 순교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2014년 시복된 조숙과 권천례 동정부부를 비롯해 윤유오(야고보), 윤점혜(아가타),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 여러 신앙 선조가 순교했다.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성지는 양근대교 옆 양강섬에 순교 상징 조형물 ‘영원으로 가는 사다리’를 세웠다. 9월 말 성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완공되면 다시 양강섬을 오가며 기도할 수 있다. 성지에서 8㎞가량 떨어진 도곡리 능말에서도 순교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능말은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조동섬(유스티노)과 그의 아들 하느님의 종 조상덕(토마스), 복자 조용삼(베드로)과 조숙,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중구(타대오)와 조인달 등 신앙 선조들의 고향이다. 한양 조씨 한흥군 후손들이 400여 년간 집성촌을 이루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곳이기도 하다. 성지는 이곳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2021년 5월 29일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순례의 발걸음을 양평역으로 옮기면 또 다른 순교의 흔적과 마주한다. 양평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옛 양근 관아에서 순교한 신앙 선조들을 기리는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조상덕, 장사광(베드로), 손 막달레나 등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옥중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표석을 뒤로하고 양평 읍내를 걷는다. 건널목을 건너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양평읍사무소 쪽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신앙 선조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읍사무소 건너편에는 한국교회 창립의 주역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고향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름난 학자였던 권철신의 문하에는 여러 젊은 학자가 모여들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이승훈(베드로)·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비롯해 복자 홍낙민(루카)·윤유일(바오로) 등이 양근에서 권철신과 교류하며 천주교 신앙을 접했다. 관아와 순교 터에서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의 마지막을 만나고,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고향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믿음을 받아들였는지를 마주한다. 양근의 순례길에는 이처럼 신앙 선조들의 삶과 죽음이 한 길 위에 겹쳐 있다.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양근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신앙 선조들의 흔적은 성지에 이르러 하나의 역사로 이어진다. 순교 터와 관아가 신앙 선조들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곳이라면, 성지는 그들이 살아낸 신앙과 그 신앙이 한국교회 안에 뿌리내린 과정을 되새기는 자리다. 양근은 한국교회 초기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중요한 터전이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이곳에서 권철신과 이존창, 유항검(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은 아침·저녁기도를 바치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후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신앙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퍼져 나갔다. 학문으로 시작한 진리에 대한 탐구가 신앙이 되고, 그 신앙이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국으로 뻗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양근은 단지 여러 순교자를 배출한 땅이라는 의미를 넘어 ‘한국교회의 요람’으로 불린다. 한국교회 초기의 탄생과 성장, 복음 전파와 순교의 역사가 모두 이곳에 포개져 있다. 성지는 이 기억을 오늘의 순례자에게 이어주고 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순교자기념성당과 십자가의 길, 조숙·권천례 동정부부상과 여러 순교 조형물이 들어섰다. 2011년에는 새 성당과 시설이 축복됐다. 성지 곳곳에 세워진 권일신상과 윤점혜상, 권철신·권일신 형제상은 이름으로만 남은 역사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성당 옆에 자리한 정자 ‘감호정’도 양근의 신앙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성지에서 남한강을 따라 1㎞가량 떨어진 곳에는 감호암(鑑湖岩)이 있다. 과거 이 바위 위에는 감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거나 서학에 관해 논했다고 전해진다. 학문을 좋아했던 권일신은 이곳을 자주 찾기 위해 양근리 갈산에서 감호정 인근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감호암은 현재 성지의 수상 성지순례 코스를 따라 모터보트를 타고 찾아볼 수 있지만 옛 감호정은 남아 있지 않다. 성지는 그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성지 내에 같은 이름의 정자를 세웠다. 감호정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순례길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진다. 학자들은 이곳에서 진리를 물었고, 그 질문은 서학서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앙으로 이어졌다. 신앙은 공동체를 만들고 이웃에게 전해졌으며, 박해가 닥치자 그 믿음은 목숨까지 내놓는 증거가 됐다. 순교자를 가두었던 관아에서 시작해 순교 터를 지나고, 신앙을 공부하고 받아들인 이들의 고향을 거쳐 성지에 닿는다. 죽음의 흔적을 따라 걸어온 길의 끝에서 순례자는 다시 신앙 선조들의 삶을 마주한다. 성지는 그렇게 흩어져 있던 삶과 죽음의 기억을 한데 모아, 오늘의 신앙으로 이어주는 자리다.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전주교구 여산순교성지

전북 익산시 여산면은 인구 30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곳곳에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신자들이 겪은 박해와 순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인근 지역 곳곳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신자들은 여산으로 끌려와 가혹한 형벌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순교자만 김명언(안드레아), 김흥칠(마티아), 오윤집(타대오) 등 23명, 무명 순교자도 적지 않다. 이들의 순교터를 따라 조성된 전주교구 여산순교성지 ‘진복팔단길’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늘나라의 참행복을 소망한 순교자들의 영성을 묵상하는 길이다. 여산성당에서 출발해 감옥터와 백지사터, 숲정이성지 등 일곱 순교터를 잇는 길에서 순교자들이 고통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참행복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참행복’ 증언한 형장 ‘숲정이’ 여산성당에서 북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여산천 변에 자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 ‘여산숲정이성지’에 닿는다. 성지 입구 중앙에는 피에타상이 세워져 있고, 제대 뒤편 돌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제대 왼쪽에는 십자 순교 기념비, 오른쪽에는 예수성심상이 자리한다. ‘숲정이’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이곳은 신자들을 처형하던 형장이었다. 당시 여산은 도호부 관아와 군영이 자리한 행정·군사 중심지로, 고산과 금산, 진산, 용담 등 인근 지역에서 붙잡힌 신자들이 모두 이곳으로 끌려왔다. 숲정이에서는 참수형이 집행되거나, 다른 곳에서 처형된 신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기도 했다. 고산 넓은 바위골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김성첨(토마스)을 비롯한 신자 17명도 무진박해 때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성첨의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모두 6명이 순교했다. 김성첨은 감옥에서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천당진복을 누리려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을 참아 받지 못하겠습니까? 감심(感心)으로 참아 받읍시다”라고 말하며 용기를 북돋웠다고 전해진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지킨 이들의 모습은 숲정이가 단순한 처형터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참행복을 함께 증언한 자리였음을 보여 준다. 참혹했던 순교의 자리…백지사터와 옛 관아 성당 바로 옆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면 ‘백지사터’에 닿는다. 백지사(白紙死)는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형벌로, ‘도모지사(塗貌紙死)’라고도 불렸다. 이곳에는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14처, 당시 신자가 백지사로 순교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이 자리하고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순교자들의 고통이 무겁게 다가온다. 인근에는 조선시대 여산도호부사가 업무를 보던 여산동헌이 있다. 동헌 마당에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세워진 척화비가 남아 있어 당시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백지사터 아래는 도호부사가 풍류를 즐기고 병사들이 활쏘기를 연습했다는 ‘기금터’다. 남자 신자들에게 활을 쏘고, 여자 신자들은 연못에 밀어 넣어 죽였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평범한 마을 길을 따라 순교터를 하나씩 마주하다 보면 여산의 박해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마을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임을 실감하게 된다. 여산 장터와 배다리, 뒷말에도 순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장터에서는 참수한 신자의 머리를 나무에 매달았고, 배다리에서는 신자들의 손발을 묶고 물에 빠트려 수장시켰다. 여산천 건너편 군인아파트 일대는 뒷말 순교터로 알려져 있다. 박해 당시 이곳까지 장터가 이어져 있었으며, 나뭇가지에 신자들의 목을 걸어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순교터 굽어보는 ‘하늘의 문 성당’ 여산성당은 여산면 일대 일곱 순교터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한다. 순교자들이 하늘나라로 향한 길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하늘의 문 성당’이라고 불린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옆 잔디밭에는 정미연(아기 예수의 데레사) 작가가 청동으로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돼 있다. 여산 순교자들이 겪은 갖가지 형벌과 순교의 고통을 표현한 작품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본당 주보인 ‘순교자의 모후’ 성모상이 순례자를 맞는다. 두 손이 묶인 듯한 모습은 고통받는 순교자들과 함께하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한다. 순교자들의 길에 끝까지 동행하며 위로를 건네는 성모님의 사랑을 떠올려 본다. 순교로 증언한 믿음 ‘성소의 못자리’로 이어져 여산 순교자들은 옥중에서도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모진 고문과 굶주림을 견뎠다. 김성첨의 권면에 힘을 얻은 신자들은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소리 높여 바쳤고, 그 기도 소리가 감옥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들이 순교로 증언한 믿음은 박해가 끝난 뒤에도 이 일대 신앙공동체의 삶 속에 뿌리내렸다. 성지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성치골 교우촌과 공소는 박해가 한창이던 19세기 중반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며 신앙을 지켜 온 마을이다. 전주교구 제3대 교구장 고(故) 김현배(바르톨로메오) 주교와 제7대 교구장 이병호(빈첸시오) 주교, 제8대 교구장 김선태(요한 사도) 주교를 비롯해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해 ‘성소의 못자리’로 불린다. 여산본당 주임 이정현(루카) 신부는 “많은 순례자가 여산을 찾아 순교자들의 신앙을 되새기길 바란다”며 “순교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할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순교자들이 서로를 붙들며 지켜 낸 믿음은 성치골 교우촌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산의 순교터를 걷는 길은 그 믿음이 남긴 흔적과 열매를 되새기는 순례다. ◆ 순례 길잡이(여산성당) - 주소: 전북 익산시 여산면 영전길 14 - 미사: 주일 오전 10시30분 월·수~토 오전 11시 화 오후 7시30분 - 문의: 063-838-8761 성당 사무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구대교구 진목정성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전까지, 조선교회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신자들은 첩첩산중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교우촌을 세우고, 추위와 굶주림과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믿음을 지켜갔다. 그들은 성사 생활에 철저하려 노력했고, 이웃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믿음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경북 경주 단석산 중턱 해발 350m에 조성된 대구대교구 진목정 성지는 무진박해(1868년) 때 순교한 복자 이양등(베드로)·김종륜(루카)·허인백(야고보)이 살던 ‘범굴(바위굴)’과 순교 후 유해를 모셨던 ‘순교자 묘소(현재 가묘(假墓))’가 있던 곳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 자녀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세 복자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 조성된 순교 사적지다. 당당하게 죽음으로 신앙 증거하다 1911년경 대구대목구 신자 김봉삼(가밀로)이 복자 허인백의 딸 허 골룸바로부터 전해 듣고 작성한 친필 자술서에 따르면, 복자 이양등·김종륜·허인백과 가족은 병인박해(1866년) 이후 울산 죽영산 교우촌에서 만난 뒤 좀 더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당시 경주군 산내면 소태동 단석골 범굴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했다. 1868년 무진년 어느 날, 세 복자는 경주 포졸들에게 발각돼 끌려갔다. 이때 허인백은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가면 영원 이별이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한 뒤 “너희는 성교를 믿고 후세에 천국에서 만나자”며 남은 가족에게 신앙을 최우선으로 삼으라는 유훈을 남긴다. 복자들은 두 달여간 경주 진영에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배교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형벌에 으스러진 만신창이 몸으로 울산 병영까지 80리 길을 끌려가면서도, 자신들이 내딛는 걸음들을 천국으로 향하는 꽃길처럼 여기며 순교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해 음력 7월 28일경, 순교의 칼을 받기 직전에도 복자들은 망나니에게 “나중에 부활할 육신이기에 머리를 날쌔게 베고 또 머리를 분별해 달라”고 하면서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순교했다. 세 복자의 뒷바라지를 위해 경주 진영과 울산 병영까지 따라가 복자들의 순교 순간을 지켜봤던 허인백의 부인 박조이는 복자들의 머리를 거두어 울산 병영 앞 강변에 숨겨놓았다. 박해가 끝난 뒤 박조이는 지금의 진목정 성지 일대에 형성됐던 참나무뎡이(眞木亭·‘참나무가 많은 골짜기’를 의미) 교우촌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유해를 참나무뎡이 위 단석산 중턱에 합장해 모셨다. 이곳이 현재 진목정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앞에 있는 순교자 묘소다. 세 복자의 유해는 1932년 대구 감천리 교회 묘지로 이장했다가 1973년 대구대교구 복자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신앙 돌아보고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 진목정 성지를 순례하기에 앞서 ‘허륜이 기념정원’(경북 경주시 산내면 소태길 22-58)에 먼저 들렀다. 이곳은 복자들이 살았던 범굴 입구에 조성된 기념 장소로,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범굴을 대신해 만들어졌다. 범굴의 모습은 성지 내 순례자의 집 1층에 조성된 모형으로 알 수 있다. 허륜이 기념정원에서 소태길을 지나 ‘진목공소’를 향해 2.6km를 걸어 올라갔다. 참나무뎡이 교우촌의 공소였던 진목공소는 경신박해(1860년) 이후 성 다블뤼(안토니오) 주교가 이곳 교우촌을 사목 방문한 뒤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블뤼 주교 이전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사목 방문했던 기록이 있다. 진목공소에서 800m 남짓 더 올라가면 진목정 성지를 대표하는 순교자 묘소와 ‘순교자 기념성당’, ‘순례자의 집’을 만날 수 있다. 순교자 기념성당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삶을 봉헌한 신자들은 마침내 천국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앞면을 성당, 뒷면을 하늘원(봉안당)으로 지었다. 성당은 신앙인의 죽음을 되새기면서, 이곳에 봉안된 모든 영혼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건축됐다. 특히 하늘원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될 정도로 깨끗하고 아늑한 환경 속에 안치 공간과 휴게공간이 공존한다. 성당 외부는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여덟 가지 행복(진복팔단, 眞福八端)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팔각형으로 디자인했다. 순례자의 집은 피정과 순례, 여행 등을 위해 준비된 숙박 시설이지만, 무엇보다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조성됐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숙소 ‘알베르게(Albergue)’를 연상시키는 다인실부터 1인실과 가족실 등이 있으며, 캠핑을 위한 카라반 시설도 갖추고 있다. 순교자 기념성당과 가까이 위치해, 미사를 드린 뒤 혼자만의 묵상과 순례를 하기에 적합하다. 순례자의 집 1층의 범굴 모형 기도소는 진목정 성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세 복자들이 가족들과 피신해서 머물렀던 범굴을 본떠 만든 이곳은 좁은 입구로 들어가 암흑 속에서 침묵 가운데 묵상과 기도를 하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성지 주임 이종건(시메온) 신부는 “진목정 성지는 세 분 복자의 순교 정신을 기리고, 우리도 그분들처럼 살아보고자 다짐하는 장소”라며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자 묵상하고 자연 속에서 쉴 수 있는 천혜의 장소”라고 말했다. “쉬러 오셔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이 신부는 “울산 병영 순교 성지나 죽림굴 등 인근의 다른 성지를 방문할 때도 세속적인 숙소보다는 마음을 정리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지 순례 때 진목공소 뒤편으로 연결된 성경식물원 ‘바이블가든’도 꼭 찾아야 한다. 한국과 재배 환경이 달라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성경 속 다양한 식물들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대구가톨릭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를 지낸 안계복(베르나르도) 씨와 「성경의 식물 명칭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영숙(클라라) 씨 부부가 조성한 식물원이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직접 들여와 기른 올리브나무를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순례자들이 꼭 들러볼 만한 장소다. ◆ 순례 길잡이 - 주소: 경북 경주시 산내면 수의길 192(순교자 기념성당) - 미사: 주일, 목(3~11월)·금·토 오전 11시 -문의: 054-751-6488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마산교구 명례성지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단. 굽이굽이 낙동강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진 지역이다. 푸른 강물을 보려 고개를 돌리면 넓은 강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계절 따라 온갖 꽃들이 피고 지는 곳. 옛 지명은 멱례 혹은 미례였고, ‘돌무더기 나루터’라는 뜻의 ‘뇌진(磊津)’으로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편 김해로 건너가 창원, 마산까지 다녀오곤 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며 나루터는 사라졌지만,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명례마을은 여전히 남아있고, 언덕마루에 있는 ‘성모승천성당’(전 명례성당) 역시 굳건한 모습으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푸르름이 넘치는 5월, 명례성지(담당 박진우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찾았다. 복자 신석복과 강성삼 신부 ‘명례(明禮)’는 한국교회사에서 익숙한 지명이다. 1784년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신앙 공동체’라 불리는 모임이 열렸다. 김범우의 집은 한성(서울)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다. ‘방(坊)’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명례(明禮)’는 ‘예절을 밝힌다’는 의미로, 유교적 가치를 담아 마을에 붙인 이름이었다. 밀양의 명례는 옛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소리와 뜻을 고려해 이름 지은 것이라 알려져 있다. 한성과 밀양, 두 지역의 ‘명례’는 시대의 예법을 따르라는 이름을 붙여 관리할 만큼 중심지였다. 하지만 지명이 무색하게도, 그 예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꾸준히 나왔고 조선은 그들을 박해했다.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복자 신석복(마르코)이 태어났다. 박해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이 명례에 닿았고, 양반가 자제인 신석복에게 신앙을 전한 것이라 추측된다. 신석복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교했고, 이후 장사를 시작했다. 미사 참여, 전교, 타 지역 교우들과의 만남 등 강을 건널 일이 많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으려 행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석복은 붙잡혔다. 짐 보따리에서 누룩, 소금과 함께 기도서와 성물이 나오면서 그는 대구로 압송됐고, 배교를 권하는 이들에게 “풀어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라며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39세 나이에 순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흐른 1887년, 마침내 명례에 공소가 생긴다. 공소는 1896년 명례본당으로 승격됐는데, 이는 마산교구 관할인 경남 지역 첫 본당이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인물도 한국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었다.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 강 신부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서품받은 한국인이었고, ‘한국 땅’에서 품을 받은 첫 사제이기도 했다. 서품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강 신부는 첫 사목지 명례본당을 마지막으로, 1903년 38세에 선종했다. 하나의 성지가 품은 두 성당 순례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라우렌시오의 집’이다. 너무 빨리 떠나버린 초대 주임 강성삼 신부를 기리는 흰색 단층 건물은 사무실과 성물방, 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확 트인 통창으로 고즈넉한 ‘강변 뷰’를 즐길 수 있다. 이 건물을 지나면 오르막길이 나온다. 야트막한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성모동산이 펼쳐진다. 초록 잔디밭에 성모상과 함께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돼 있는데, 하나씩 각 처를 밟아가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저 멀리 강으로 향한다. 강물이 각 처의 배경처럼 반짝이는 곳. 인근에서 가장 높은 언덕마루에 올랐기에, 시야를 가리는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것도 성지의 큰 장점이다.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기도인지 묵상인지 모를 망중한을 즐긴다. 성모동산 맞은 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성모승천성당’이 보인다. 현재의 성당은 세 번째로 지어 올린 건물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성전 모두 태풍으로 완파됐다. 두 번째 태풍 피해를 입었을 때 파손된 성당 잔해 속에서 목각의 ‘승천성모상’이 손상 없는 상태로 발견됐고, 이를 본 당시 회장 김유인 씨는 사재를 털어 1938년 기존 성당을 축소 복원한 후 성전 제대 가장 위쪽에 승천성모상을 모셨다. 이후 지금까지 성전은 온전히 유지됐고, 남녀석이 구분돼 있는 옛 형태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한옥성당 옆으로 이어지는 너른 마당. 이곳에서부터 성지는 새로운 느낌으로 순례객을 이끈다. 고전미와 자연풍광을 즐기던 곳에서 현대 건축물을 통한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마산교구 이제민(에드워드) 신부가 수소문 끝에 신석복의 생가터를 찾은 건 2006년. 생가터는 교구 첫 본당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신석복이 포함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던 시기. 그럼에도 순교자 삶의 터전은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다. 이 신부는 교구에 모든 내용을 전했고, 이 무렵부터 성지 개발을 위한 발걸음들이 시작됐다. 2009년부터 10년간 성지 담당 사제로 헌신한 이 신부는, 모든 재정비를 진두지휘하며 성지 조성을 위해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며 모금을 진행했다. 성지 계발이 한창이던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신석복은 복자로 선포됐고,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이 2018년 완공되면서 성지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너른 마당 커다란 제대가 놓인 자리가 바로 신석복 복자의 생가터다. 제대 맞은편으로는 계단 모양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야외 미사 봉헌 때에 신자들이 앉기도 하는 이 공간이 기념성당의 지붕을 겸한다. 경관을 방해하지 않고 언덕과 능선을 해치지 않으려 지면 아래에 성당을 둔 것이다. 눈에 띄는 건 불규칙적으로 놓여있는 12개의 사각형 구조물들. 이는 녹아 없어지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소금 영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각각의 사각형에 창이 있어 지상에 닿은 빛이 지하 성전까지 이어진다. 소금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밝히고 있는 성전에 들어섰다. 잿빛의 공간은 절제‧침묵 등의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공간에 압도된 듯 숙연해진 마음으로 제대 쪽으로 나아가면 제대 왼편에서 ‘부활경당’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신석복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세월은 150여 년. 대구에서 순교한 복자의 유해를 아들이 찾아왔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이 반대해 명례에 들이지 못했고, 교우들이 머물던 장방리 노루목에 모셨다가 1975년 진영천주교공원묘지로 옮긴 후 2018년 이곳으로 다시 이장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복자의 삶과 죽음을 기억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성지 담당 박진우 신부는 “미사도 봉헌되지 않던 한옥 성당이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있는 건 주변 신자들이 꾸준히 돌봤기 때문”이라며 “그런 정성들이 모여 긴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고, 그 시간들 끝에 순교자의 유해를 품고 성모님께 안긴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녹여내 세상을 돕는다는 ‘소금 영성’. 그 영성이 성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낡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곳 명례성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굳건히 위용을 갖춰가고 있었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간과 정성을 녹여낸 것일까. 성지를 나서는 길. ‘명례성지 기도문’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문을 열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녹아 사라지는 소금이 되겠습니다’하고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 순례 길잡이 주소: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1 미사: 오전 11시(화·수·목·금요일), 토 오후 4시, 일 오전 11시 후원 계좌: 농협 351-1067-2746-63 (재)마산교구천주교유지재단 문의: 055-391-1205 명례성지 사무실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안동교구 우곡성지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창립(1784년)되기도 전, 조선의 한 명문가 선비가 보장된 미래와 명예를 뒤로 하고 홀로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름 없는 산중에 은거하며 천주교 신앙을 고요함 속에 실천했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로 불리는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선생이다. 선생과 그 후손들의 안식처인 안동교구 우곡성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에게 신앙의 맑은 샘물을 건네주는 영적 요람으로 빛나고 있다. 자발적으로 수용한 신앙을 실천한 신앙 선조의 고결함과 피와 땀이 깃들인 우곡성지를 찾았다. 칠극, 삶으로 몸소 증거한 신앙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愚谷里),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중턱까지 걸어가니 해발 1206m에 달하는 문수산 자락에 안긴 우곡성지 입구가 보인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봄의 햇살과 푸른 하늘 아래, 저 멀리 십자가와 홍유한 선생의 동상이 순례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말끔하게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을 한 선생의 동상을 자세히 보니 책 한 권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있다. 바로 그의 평생 지침서였던 「칠극(七克)」이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 예수회 회원 판토하 신부가 쓴 교리서다. 교만, 인색, 음욕, 탐욕, 질투, 분노, 나태 등 ‘칠죄종’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에 닿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홍유한 선생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인 풍산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 나이에 당시 실학의 거성이었던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서학(西學)을 접하고 인간 영혼의 구원을 밝히는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했다. 1750년경부터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에게는 세례를 줄 신부도, 신앙을 함께할 신자 공동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속의 일을 끊고 오직 기도에 전념했고, 육욕을 멀리하며 금식과 절제를 생활화했다.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규율한 그의 수덕생활은 충남 예산, 경북 영주를 거쳐 마지막 은거지인 우곡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겸손과 절제, 소박한 신앙의 향기 곳곳에 우곡성지 순례 여정의 시작은 ‘칠극의 길’이다. 안동교구는 1993년 홍유한 선생의 묘를 발견해 순차적으로 성지를 개발했고, 2015년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리기 위해 칠극의 길을 조성했다. 잔잔히 흐르는 맑은 계곡물을 따라 고즈넉하게 마련된 길 위에는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이기는 덕목들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다. 제1극 ‘복오(伏傲, 교만을 억누르다)’에서부터 제7극 ‘책태(策怠, 게으름을 채찍질하다)’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닦았을 겸손과 절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곡성지 담당 윤성규(바오로) 신부는 “홍유한 선생은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분”이라며 “당시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대부였지만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고 철저하게 복음적인 삶을 사셨다”고 설명했다. 칠극을 묵상하며 주모경과 영광송을 바치고 걷다 보면 길의 끝자락에 ‘칠극성당’이 보인다. 화려한 장식은 없어도, 주변 자연 경관과 잘 조화된 소박한 외관은 홍유한 선생의 곧고 굳은 신앙심과 평소의 성품을 그대로 닮았다. 1995년 세워진 성당 내부는 비둘기가 날갯짓하는 모양을 묘사한 파란 스테인드글라스가 부드럽게 빛을 내며 신앙 공동체를 감싸고 있다. 성당 옆에는 한복 차림을 한 흰색 성모상이 주변의 봄꽃과 수풀 사이에서 아름답고 빛나는 자태로 순례객에 인사를 건네고 있다. 한국교회는 유교적인 문화와 가톨릭 신앙이 조화를 이루며 탄생한 역사가 있다. 선비의 절제와, 하느님의 자애로움이 만난 영성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신앙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후손들이 빚은 신앙의 열매 영원히 홍유한 선생의 고귀한 신앙은 후대에 이어졌다. 그의 뜻을 이어 신앙을 증거하다 13명의 후손이 순교한 것이다. 순교한 후손 중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지난 1984년 한국을 사목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 됐다. 홍낙민 루카 등 5명은 2014년 한국을 사목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은 삶의 끝까지 선생의 신앙을 따랐으며 하느님 곁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칠극성당에서 다시 입구 방향으로 이동해 산기슭 쪽으로 가면 홍유한 선생 후손 순교자 13위의 가묘와 현양비가 보인다. 시복 시성된 후손들이지만, 그 유해를 찾지 못해 각 순교 터의 흙을 담아 묘를 조성했다. 비어 있는 묘이지만, 그 어떤 무덤보다도 소중하고 묵직한 신앙의 무게가 느껴진다. 가묘를 지나 홍유한 선생의 묘소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속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 15처가 조성돼 있다. 신앙 선조들이 예수님 수난을 묵상하고 험한 산길을 오르며 바쳤을 기도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기면 중턱에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묘소는 소박한 모습이다. 작은 봉분에 간결한 비석은 평생 숨은 구도자로 살아간 생애를 보여주는 듯하다. 높은 산 능선을 따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처럼, 그 누구보다도 맑은 신앙으로 예수님을 닮으려 했던 선생의 마음이 바로 이곳에 오롯이 머물고 있다. 우곡성지를 둘러 보는 순례길은 1~2시간 남짓 소요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순례자들은 수백 년 전 선조들이 평생에 걸쳐 지켜왔을 깊은 신앙과, 때로는 인간적으로 고민했을 삶의 본질을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윤 신부는 “순례나 피정을 위해 성지를 찾는 분들은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홍유한 선생의 삶에 감동하며 자신의 삶도 돌아보는 기회를 얻는다”고 말했다. 우곡성지 순교자 현양비에는 “우곡의 골짜기는 이곳을 찾는 신앙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신앙의 골짜기, 거룩한 땅, 성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신앙은 단순히 ‘관성적인 믿음’이 아닌 ‘끝없이 성찰하고 실천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준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우곡성지는 고요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숲길에서 진정한 평화와 신앙의 가치를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선물하고 있다. ◆ 순례 길잡이 주소: 경북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우곡리 151-2) 미사: 오전 11시(화요일~주일) 후원 계좌: 우체국 702266-01-001352 재단법인 천주교안동교구 문의: 054-673-4152 우곡성지 사무실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원주교구 용소막성당

원주교구 용소막성당은 두 가지로 유명하다. 고풍스러운 성당 건물과 사제관 그리고 한국교회 성경 번역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고(故) 선종완 신부(라우렌시오, 1915~1976) 생가터와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이 그것이다. 성당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인 동시에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안식을 주는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5월 2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됐을 뿐만 아니라 원주시가 ‘원주 8경’ 중 제7경으로도 선정해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용소막성당을 찾았다. 신자들이 원해, 신자들 손으로 지은 성당 용소막본당(주임 윤종민 안토니오 신부)은 강원도에서는 풍수원본당(1888년), 원주본당(1896년, 현 주교좌원동본당)에 이어 1904년 5월 4일 세 번째로 설정된 본당이다. 설정 당시 신자 수는 864명, 관할 구역은 원주·평창·영월·제천·단양 등 5개 군에 공소는 17개로, 명실공히 강원도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다. 본당이 자리한 ‘신림면(神林面)’이라는 지명부터가 범상하지 않다. ‘신성스런 수림’이라는 뜻이어서 본당이 현 위치에 터를 잡게 된 교회사적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본당 주변에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해관(베드로·66) 용소막성당 성지 해설사는 “우리 집안도 누대에 걸쳐 본당 신자로 살아왔고, 신자 중 4대나 5대째 용소막본당에서 신앙을 이어가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며 “평지보다 높은 곳에 지어진 용소막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주민 중 지금도 천주교 신자 비율이 꽤 높다”고 밝혔다. 순례자들은 성당이 지닌 외형적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보호수로 지정된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완만한 언덕 위에 서 있는 성당은 붉은색과 회색 벽돌이 조화를 이룬 외벽에 날씬하게 높은 종탑, 동판으로 덮인 지붕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지금의 성당 건물은 1915년 가을 약 330㎡(100평) 규모로 완공됐다. 건축 연도 기준으로 1892년 중림동약현성당, 1898년 주교좌명동대성당 등에 이어 한반도 전체에서 8번째로 지어졌다. 전통적인 고딕양식을 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아 아담하고 정겹다. 세월이 흐르며 일제강점기에는 종을 공출당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성당이 군수창고와 마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마루 교체 등 일부 보수 공사를 한 것 외에는 111년 전 처음 지어졌을 때의 원형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다. “예수 기력이 핍진하사 제이차 업더지심이라”는 십자가의 길 제7처 문구가 성당의 오랜 역사를 대변한다. 그러나 이해관 성지 해설사는 “겉으로 보이는 성당의 아름다움보다 성당 건축에 담긴 신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신앙 선조들이 고생한 덕으로 오늘의 신자들은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성당은 신자들이 먼저 나서 건축에 힘쓴 결실이었다. 외벽에 사용된 벽돌은 신자들이 마을 가마터에서 구워 손수 날랐고, 성당 내부를 받치고 있는 소나무 기둥들도 장마철에 하천이 불어난 시기를 이용해 운반했다. 구석구석 신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함께 지어진 사제관도 순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이하게도 성당보다 5~6m 높은 곳에서 신비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성당 부지 지형과 지질을 활용하다 보니 지금 자리에 지었다는 설, 그리고 사제가 신자들이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신자들과 교감하려는 생각에서 일부러 높은 자리를 택해 지었다는 설이 공존한다. 성당 마당에서 사제관으로 오르는 기다란 계단 또한 독특한 모습이다. 성경 번역의 역사, 선종완 신부 성당 앞 텅 빈 듯한 잔디밭은 순례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잔디밭에 세워진 바윗돌을 눈여겨보면 ‘선종완 노렌조 신부 생가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노렌조는 라우렌시오를 과거에 부르던 세례명이다. 바윗돌 옆 ‘생가터 소개’라고 적힌 안내비에는 “이곳은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로 시작하는 선 신부의 간략한 일대기가 소개돼 있다. 선 신부가 태어난 1915년 8월 8일은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던 시점이었다. 선 신부와 성당은 동갑인 셈이다. 성당을 순례하다 보면, 선 신부가 설립한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가 본당과 협력해 1988년 11월 개관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을 볼 수 있다. 유물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선 신부가 일생토록 성경 번역에 몸과 마음을 다 쏟았던 열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선 신부는 현행 성경 이전에 사용되던 공동번역성서 번역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참여하기 전에 단독으로 사비를 들여 성경 번역과 출판에 정열을 바친 선구자였다. 유물관에는 선 신부가 1952년 예루살렘에서 공부할 때, 지역 박물관을 매일 방문해 카메라가 없어 손으로 유물 내용을 필기한 공책,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일하며 시간을 아끼려 타고 다녔던 오토바이 부품, 단독으로 번역한 성경 원고 등 귀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선 신부가 직접 고안한 ‘6각 책상’이다. 성경 번역을 하며 여러 도서를 동시에 확인하기 위해 책상을 6각형으로 층을 나눠 만들었다. 유물관 담당 이상숙(마리 대건) 수녀는 “선 신부님은 성경 말씀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아직 성경 번역이 되지 않던 시절,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해 주려는 일념으로 잠을 줄여 가며 사셨다”고 말했다.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는 올해 선 신부 선종 5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선 신부 시복 추진에 역량을 모을 계획이다. ◆ 순례 길잡이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신림면 구학산로 1857(용암리 719-2) 미사: 주일 오전 11시(토요일 오후 7시), 월요일 오전 7시, 화·목요일 오후 7시, 수·금요일 오전 10시 문의: 033-763-2343 본당 사무실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17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제주교구 하논성당길

제주 서귀포의 어느 목장 귀퉁이. 수령 100년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못했던 하논본당 터를 품고 70년을 버텨 온 나무다. 2010년, 제주교구 서귀포본당 110주년 ‘뿌리 찾기’ 사업을 추진하던 신자들이 38만 평 하논분화구를 며칠째 헤매다 이 나무와 마주쳤다. 하논본당 제3대 주임이었던 에밀 타케 신부가 1910년경 성당 소유지임을 표시하려 심었다는 바로 그 나무였다. 설립 당시 지번도 없고 상황을 아는 사람도 없던 터. 70년간 묻혀 있던 성당 자리가 은행나무 한 그루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잊혔던 제주 산남지역 신앙의 출발점이 다시 확인됐고, ‘하논성당길’이 시작됐다. 하논성당길 순례는 서귀포성당을 기점으로 한 바퀴 원을 그리듯 도는 코스다. 천지연 산책로를 지나 하논성당 터와 하논분화구를 거쳐, 솜반천과 흙담소나무길을 지나 홍로성당 터 면형의 집에 닿는다. 여기까지는 에밀 타케 신부가 성당을 옮기며 걸었던 길이다. 이어 서귀복자성당과 이중섭거리를 지나 다시 서귀포성당으로 돌아온다. 시작과 끝이 연결돼 있음을 깨닫는 ‘성찰’의 뜻이 깃들어 있다. 이번에는 역사의 시간순으로, 하논성당 터에서 출발해 각 장소를 짚었다. 산남지역 신앙의 못자리 제주 서귀포시 일주동로 하논분화구 가장자리에 먼저 섰다. 한반도 최대의 마르형 분화구, 38만 평 너른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분화구 안으로 내려가 10여 분 걷자, 하논성당 터에 다다랐다. 목장 귀퉁이, 잎을 모두 떨군 그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당시 제주에는 은행나무가 거의 없어 목포에서 묘목을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은행잎을 보러 비신자들도 많이 찾는다. 은행나무 앞에서, 초기 본당 공동체와의 만남을 이끈 섭리를 생각했다. 1899년 제주본당(현 주교좌중앙본당)에 이어 1900년 6월 12일 세워진 하논본당은 한라산의 남쪽, 즉 산남 지역 최초의 본당이었다. 오늘날 한라산 남쪽 아홉 개 성당, 신자 3만 명이 모두 이 한자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듬해 신축교안, ‘이재수의 난’으로 공동체는 큰 피해를 입었다. 희생된 신자 309명 중 216명, 70%가 본당 관할 신자였다. 1902년 타케 신부가 홍로(烘爐) 마을로 본당을 이전한 뒤 빈터로 남은 자리는, 4·3을 거치며 하논마을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하논성당길의 별칭 ‘환희의 길’은 잃어버렸던 성당 터를 되찾은 기쁨에서,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를 떠올리며 붙인 이름이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 길에서만큼은 세상사를 잠시 내려놓고 환희로 충만한 순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솜반천을 따라 - 타케 신부의 길 하논성당 터를 뒤로 하고 흙담소나무길과 솜반천을 따라 걸었다. 타케 신부가 홍로 마을로 갈 때 걸었던 옛길을 따라 조성됐기에 ‘에밀 타케의 길’로도 불린다. 홍로성당 터에는 한국 순교 복자 성 직수도회 제주분원이자 피정 시설인 ‘면형의 집’이 들어서 있다. 타케 신부가 13년간 선교한 장소다. 그는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고 온주밀감을 제주에 들여왔으며, 1만여 점의 제주 식물을 채집해 유럽으로 보내며 제주를 식물의 보고로 세계에 알렸다. 식물 채집으로 선교 비용을 마련하면서도 어르신들에게 감귤밭을 무상으로 경작하게 하고, 지역 주민과의 화합으로 신축교안의 상처를 수습해 나갔다. 성당 입구에 전시된 '홍로의 맥'은 타케 신부가 심었던 온주밀감 나무 중 고사한 나무로 만든 조형물이다. 뒤틀린 마른 가지들이 당시 밀감나무를 직접 심고 돌봤을 그의 손길을 떠올리게 했다. 서귀포성당·서귀복자성당 터와 이중섭거리 면형의 집을 나와 서귀포성당에 닿았다. 1937년 현재 자리에 정착한 이후 산남지역 여섯 개 본당을 분가시킨 실질적인 모태 성당이다. 성당 한편의 ‘하논 카페&갤러리’에는 하논본당-홍로본당-서귀포본당으로 이어진 본당 역사와 타케 신부의 식물채집 기록, 옛 하논성당 복원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걸음은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입구 중앙공원으로 이어졌다. 1970년 서귀포성당에서 분가한 서귀복자성당이 있던 자리다. 1980년대 민주화 항쟁 당시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을 피해 성당 지하실로 몸을 피했고, 수녀가 두 팔 벌려 형사들의 진입을 막아섰다. 지금은 표지석과 항쟁 기념비가 남아 있다. 현 서귀복자성당에는 네 명의 성인 유해가 안치돼, 참배와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성당 맞은편 이중섭거리에는 화가 이중섭의 옛 거주지가 남아 있다. 교회의 역사와 지역 문화, 서민의 삶이 맞닿는 구간이다. 순례의 발걸음이 어느새 일상의 한복판으로 스며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신자들이 찾아 나선 길 약 11㎞, 네 시간 남짓. 하논성당길은 제주 서귀포 천주교의 형성과 신축교안의 상처, 4·3의 기억, 하논분화구의 생태 환경, 타케 신부의 식물사, 지역의 민주화 역사까지 교회사와 생태·문화를 겹겹이 품고 있다. 무엇보다 이 길은 많은 순례길들이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 것과 달리, 신자들이 잊힌 서귀포 신앙의 뿌리를 찾아 나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는 의미가 크다. 하논성당 터와 면형의 집에서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고, 서귀복자성당 이후로는 시장과 이중섭거리에서 일상을 체험하는 흐름으로 걸으면 좋다. 신앙의 역사와 현재의 삶이 하나의 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걷는 내내 하논분화구의 생태 환경 보전 문제와 제주 지하수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길이다. ◆ 순례 길잡이 제주교구 하논성당길(환희의 길) : http://santoviaggio.com 서귀포성당 : 064-762-3444 서귀복자성당 : 064-733-5523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인천교구 이승훈 베드로 성지

조선 첫 영세자로서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를 이끄는 데 헌신했던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 몇 차례 체포와 유배 끝에 순교까지 했던 그의 정신을 뿌리로 조선교회는 사제 없이 평신도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약 100년간 1만 명 넘는 순교자를 배출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한 이승훈은 인천 장수동(반주골) 산135번지(남동구 무네미로 143) 소재 선산에 묻혔다. 그 순교 공적을 기리고자, 인천교구와 인천시는 이승훈 묘역(인천시 기념물 제63호)을 중심으로 약 5만㎡ 대지에 역사공원과 기념관을 갖춘 ‘이승훈 베드로 성지’를 조성했다. 선교사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교회 근원을 간직한 성지를 찾았다.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 인천 만수역에서 인천대공원역에 이르는 ‘이승훈베드로길’ 끝에 사방으로 트인 공터가 나타난다. 4단으로 된 피에타 연못과 정원이 입구에서 순례객을 반긴다. 4대에 걸쳐 아들 이신규(마티아), 손자 이재의(토마스) 등 8명 순교자를 배출한 이승훈 집안의 순교 내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연못을 지나 펼쳐지는 ‘이승훈 베드로 광장’ 잔디밭 너머에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 원형 건물 ‘이승훈베드로성지기념관’이 있다. 이승훈 순교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기념관 오른편 벽에는 이승훈이 참수형을 앞두고 남긴 신앙 고백문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이 붙어 있다. “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듯이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솟구치더라도 연못에서 다하는 것 같이 내 신앙은 결국 천주 안에서 다한다”는 뜻이다. 건물과 중앙 광장도 달(月)과 연못(池)을 형상화해 원형으로 조성됐다. 공터에 깊이 스미는 자연광은 어둠 속에 빛이신 주님을 찾던 선조들의 믿음을 엿보게 한다. 과시보다 절제, 설명보다 체험의 의미를 살리고자 빛과 그림자, 단단한 재료(석재)와 비어 있는 공간의 대비를 강조했다. 기념관 2층 상설 전시실은 이승훈이 최초의 세례자이자 조선교회의 반석, 순교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인간적 고뇌, 대를 이은 후손들의 순교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이승훈을 통해 전해진 초기 신앙자료들, 그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가성직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사제 파견을 요청하며 보냈던 서한 등 다양한 사료도 전시돼 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정미반회사건, 진산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에서 이승훈이 겪었던 갈등과 고뇌, 그리고 신유년(1801년)에 순교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했던 진정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영상 전시실은 그의 삶을 소개하는 영상과 평화로운 분위기의 대형 영상도 상영돼 순례객이 잠시 머물며 묵상하기에도 좋다. 입구에는 이승훈이 북경 북당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받는 장면을 재현한 포토존이 있다. 순교자를 따르는 순례자는 오늘 잠시 이승훈이 되어 찰칵, 추억 한 컷을 남긴다. 평신도에 의해 태동한 조선교회를 묵상하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평신도들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세운 조선교회. 자발적 복음화의 근원을 품은 성지라는 점에서 이승훈 베드로 성지는 의미가 크다. 1층 경당 제대 뒤쪽 벽에는 루카복음 18장부터 24장까지의 말씀이 적혀 있다. 대리석 위 오목새김(陰刻)된 글자마다 색유리 조각이 수 놓여 경건하고도 차분하다. 한국교회 최초로 번역된 성경이 루카복음이라는 의미와, 평신도로서 조선교회 창설 주역이었던 이승훈의 공통점에 착안한 디자인이다. 벽 오른편에 유리 조각 45개로 만들어진 감실은 45세 나이로 순교한 이승훈의 의지를 형상화했다. 신자석 오른쪽 벽에 걸린 십자가의 길 유리공예 작품은 유리 3장 안에 주님 수난과 조선교회 평신도 순교 정신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를 상징하는 노란 선과 오상(五傷)을 상징하는 빨간 점들 사이로, 평신도들에 의해 조선교회 신앙의 꽃이 피었음을 상징하는 초록색 점이 수 놓여 있다. 기념관 뒤 산속에는 이승훈과 두 아들의 묘소까지 이르는 400m 십자가의 길이 목재 데크로 조성돼 있다. 설명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묵상의 길…. 신앙을 증거한 한 사람의 선택이 한 가정, 더 나아가 한 교회의 역사가 되었음을 깊이 느끼게 한다. 전시실, 묵상 공간, 경당, 산속 순례길이 이어진 성지는 순례자가 ‘역사에서 신앙으로’, ‘지식에서 묵상으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이승훈 묘역 성지개발 담당 겸 대외협력위원장 정광웅 신부(마르코·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위원장)는 “이승훈의 삶이 바로 우리 신앙인 각자의 삶”이라며,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시는 주님의 따뜻함을 전해주는 성지를 지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내·해설 봉사자 박명숙(엘리사벳·인천교구 부평1동본당) 씨는 “역사공원과 기념관을 둘러본 후 산속을 거니는 십자가의 길 여정을 통해 ‘내 신앙은 어디에서 시작됐으며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가’라는 묵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관은 경당 내 추모의 벽과 기도의 벽, 후원자의 방, 십자가의 길 14처에 후원자 이름과 세례명을 기록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순례 길잡이 - 미사: 매주 화~토요일 오전 11시(매월 세번째 목요일은 오후 3시 후원회 미사) 주일·월요일 미사 없음 - 후원 계좌 신협 131-016-645915 (재)인천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 순례 문의 032-765-6916 이승훈베드로성지기념관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3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대성당

서울 혜화동 낙산 자락, 서울대교구 대신학교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면 도심의 북적임이 한순간 사라진다. 운동장에 들어서면, 올해 4월부터 재건축에 들어가는 대신학교 대성당이 저 멀리 나무 사이에 반쯤 가려진 채 순례자를 맞는다. 최근에는 대성당의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 아쉬움과 추억을 좇는 사제들의 발걸음도 잦다. 재건축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대성당을 순례했다. 60여 년…신학생들의 기도와 성찰 쌓인 영적 못자리 1960년 봉헌된 대신학교 대성당은 지난 60여 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신학생의 기도와 성찰, 깊은 고민이 머물러 있는 영적 못자리다. 국내에 신학교가 몇 없던 1980년대까지는 서울대교구뿐 아니라 타 교구와 여러 수도회 신학생도 이곳에서 수학했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장소다.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미사를 봉헌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대성당 앞에 다다르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석상이 성당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석상의 오른팔은 신학교 교정 입구를 향하고 있는데, 이는 양성 과정을 마친 새 사제들에게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격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성지이기도 하다. 6.25 전쟁 당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에 매장돼 있던 유해는 1960년 7월 이곳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제대 옆 감실 석관에 모셔져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신학생들이 시간 전례를 위해 향하는 길목에 성모상과 게시판이 눈에 띈다. 신학생들은 기도하러 올라갈 때마다 이 성모상에 인사를 드리고, 그날의 전례 공지를 확인한다. 2층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그림이 방문객을 맞는다. 부산교구 김옥수 신부(도미니코·원로사목)가 기존의 이콘을 타일화로 제작해 신학교에 기증한 작품 <예루살렘 입성>이다. 작품을 지나 성당 문을 열면, 높은 천장과 간결한 구조 덕에 더욱 넓어 보이는 내부가 펼쳐진다. 1980년대 들어 성소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기존의 성당에서 모든 신학생이 전례를 할 수 없게 되자 1985년 성당을 증축해 현재의 모습처럼 넓어졌다. 바닥과 목재로 이뤄진 벽면, 유리화 등은 모두 증축 이후 설치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당 내에서 가장 오래, 60년을 온전하게 자리를 지킨 건 제대 뒤 십자가다. 해마다 해마다 부르심에 더욱 가까이 신학생들의 자리는 지정석으로, 1학년은 제일 뒷자리에, 고학년일수록 앞자리에 앉는다. 7학년인 부제반은 제대 가장 가까이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대신학교 6학년 원감 최요안(요한 세례자) 신부는 “한 해 한 해 지나갈 때마다 신학생이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성당 증축이 필요했을 정도로 신학생이 많던 시절, 새내기 신학생에게는 제대가 얼마나 까마득했을지 짐작이 간다. 성당 오른편 유리화를 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은은히 내부를 비춘다. 유리화는 1997년 최영심(빅토리아) 작가가 제작한 것으로, 신약성경 속 예수님의 행적과 구약성경 일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대 쪽으로 좀 더 다가서면 성화 <파견하시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온다. 2015년 가톨릭대 개교 16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장긍선(예로니모) 신부와 회원들이 제작해 기증했다. 성화 상단에 복음서를 들고 있는 예수님이 있고, 하단에는 대신학교의 모태인 충북 배론의 초가집 신학교를 사이에 두고 성 김대건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서 있다. 이는 예수님이 두 사제를 세상에 파견한다는 의미와, 신학생들이 이를 본받길 바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성소의 길 시작된 곳, 사제의 기억 머문 자리 재건축 소식이 알려지자, 교구 사제들도 종종 이곳을 찾아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매년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열던 교구 사제 대상 사목교서 설명회를 올해는 특별히 이곳에서 열었다. 최 신부는 “선후배 신부님들이 (철거 소식에) 얼마나 아쉬웠는지 동기모임 장소를 이곳으로 정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사제 각자가 지닌 추억도 남다르다. 최 신부는 “사제 성소를 꿈꾸기 전,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친구 두 명이 신학교에 들어가게 돼 입학미사에 온 적이 있다”며 “미사 중 제대 위 십자가의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끼며 마음속에 뜨겁고 강렬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최 신부는 이후 성소를 품고 예비 신학생 모임에 나가게 됐다. 지금의 대성당에서 신학교 생활을 모두 보내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한 주요한(요한) 부제는 “대성당은 신학생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공간이자 하루를 마치는 과정 중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양심을 성찰하고, 때로는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예수님께 털어놓으면서 계속해서 힘을 얻는 성장의 공간”이라며 “5학년 때 신학교에서 음악부장으로 봉사하며 매주 목요일 성가대석에서 성가를 연습했는데, 다 함께 성가를 부르는 신학생들의 노랫소리에 마음이 뭉클하거나 따뜻한 적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사라지는 것은 건물… 기억 간직하고 희망을 꿈꾸며 대성당의 재건축은 신학생들이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기도와 전례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필연적 조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현재와 미래의 신학생들을 사제로 양성하는 못자리가 될 새 성당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주요한 부제는 “지난 10년간 대신학교 생활의 모든 추억이 깃든 소중한 장소이기에 무척 아쉽지만, 대성당 건물이 사라진다고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모든 분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새로 지어질 대성당 건물에서 매일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고 성장할 후배 신학생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기대와 희망도 크다”고 전했다. 서울대교구 대신학교는 12월 21일 대신학교장 민범식(안토니오) 신부 주례로 신학생 1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대성당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대성당은 ‘천주교 서울 순례길’ 중 하나인 대신학교 내에서 순례객이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지만, 새 성당 완공이 예상되는 2028년 6월경까지는 순례가 제한된다. 현재 제대는 새 성당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석상도 재건축 공사 기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새 대성당에 모실 예정이다. 유리화는 다른 장소로 옮겨 보존하며 신학생들이 앉았던 장의자는 모두 교체한다. 새 대성당은 부지와 면적은 유지한 채 3층 규모로 지어질 예정이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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