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아빠 베드로는 이제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이 울리면 초록색 동그라미를 오른쪽으로 밀기만 하면 된다고 엄마 소피아가 백 번을 넘게 말해도 소용없답니다. 이제 팔순이 넘은 베드로는 이미 수년 전에 인지장애 판정을 받았고 작년에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클라라는 늘 베드로가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고 경기도 파주에서 경상남도 밀양까지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갈 수는 없기에 영상통화를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전화를 받지 못하니까 소피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화면 속 아빠 베드로는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엄마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느그 아빠 니가 사 준 옷 입고 있다, 지금”, “니 첫 월급 받았을 때 백화점에서 사 준 옷 있다아이가.” 첫 월급이라니요. 그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중간고사 마치고 첫 직장에 취업했으니 1998년 늦가을이었을 것입니다. 첫 월급을 받고 나서 샀다면 정확히 27년 전 한겨울이었을 텐데, 그 옷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니요. 이제 완연한 봄 날씨인데, 베드로는 계절을 상관없이 27년 전의 그 따뜻한 온기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 클라라가 사 준 옷, 우리 클라라가 사 준 옷…” 하면서요. 하느님께서 손수 지으셨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 각자 가진 고유의 아름다운 어떻게 찾고 사랑해야 할까 저, 클라라는 베드로가 정신이 또렷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제가 베드로의 노후에 대해 걱정하면, 베드로는 “나는 건강하게 타고났는데도 나이가 들어서 (건강 상태가) 이 모양인데, 니는 약하게 타고났으니 나이가 들면 더 힘들끼다. 니 걱정이나 해라”라고 했고, 제가 소피아의 노후에 대해 걱정하면, 베드로는 “느그 엄마는 내가 잘 챙길끼다. 그러니까 니는 니나 잘 챙기라” 했었습니다. 그랬던 아빠 베드로가 이제 엄마 소피아 없이는 전화도 받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마음만큼은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약하게 타고난 딸 클라라가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진정한 성인이 되었던 그날, 어쩌면 클라라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놓았을 그 순간 말이지요.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지혜서를 읽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기도 지향은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 베드로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함께 하며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일과는 제가 사 드린 옷을 입고 집 앞 골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쓰레기를 줍고 빗자루로 깨끗하게 좁은 길을 쓰는 일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몸을 깨끗이 씻고 하루하루 생을 정돈합니다. 그 모습에서 젊은 베드로가 매일 어린 클라라의 구두를 닦았던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소멸해 가는 존재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참 아름답습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은 먹이고 돌보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두고 흔히 ‘방귀를 튼 사이’라고 말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가족의 본질을 꽤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가족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사이입니다. 숨길 것도 체면도 없이 서로의 습관과 약점까지 아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서로에게 엉겨 붙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호르몬이 작용합니다. 자극을 찾게 하는 도파민, 만족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 스트레스 때 분비되는 코르티솔 같은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사랑 호르몬’이라는 별칭을 가진 호르몬이 옥시토신입니다. 옥시토신은 손을 잡거나 포옹할 때,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분비됩니다. 옥시토신이 충분히 분비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안정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와 연결될 때 안정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힘과 서로를 살리는 책임이 함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두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로 설명합니다. 에로스는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이고, 아가페는 자신을 내주는 사랑입니다. 가족은 이 두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감정일 뿐만 아니라 서로를 살게 하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부활의 첫 장면은 놀라울 만큼 평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숯불을 피우시고 물고기와 빵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행동은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식사 뒤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세 번 명령하십니다. 전례용 성경에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리듬이 있습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먹여라.” 예수님은 먹이고, 돌보고, 다시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동사’로 보여 주십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살게 하는 행동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차려 주고, 지친 사람을 돌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족의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함께 식탁에 앉고, 서로의 하루를 묻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는 경쟁과 성취를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이루라는 압박이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경쟁이 아니라 사랑에서 옵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합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과 서로를 살리는 책임이 함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함께 어우러진 사랑, 그것이 가족의 근간입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사랑의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먹이고, 돌보고, 다시 먹이는 사랑. 그것이 가족을 이루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발을 씻어 주는 일

클라라가 만삭이었을 때 일입니다. 엘리사벳이 태어날 즈음, 클라라는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신발 가방을 따로 챙겨야 했습니다. 두 발은 무거워진 몸을 지탱하기가 힘겨워 보였습니다. 아침에는 괜찮았던 발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어서 퇴근할 무렵이면 출근할 때 신었던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퉁퉁 부은 발이 들어갈 만한 큰 사이즈의 신발을 넣은 신발 가방은 만삭 임산부의 필수 지참물이 되었습니다. 직장 동료가 말린 쑥을 챙겨주었습니다. 미지근한 물에 넣고 불린 다음 발을 담그면 부기가 가라앉을 거라고 하면서요. 집으로 돌아와 쑥물에 족욕을 했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루를 버텨 준 두 발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양손으로 구석구석 주물러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했을 뿐인데도, 발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 온몸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좋은 곳에 갈 때 가족이 떠오르는 것처럼 족욕의 기쁨도 가족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와 카타리나를 불러 식탁 의자에 앉혔습니다. 쑥물이 담긴 대야 두 개를 두 사람 발 앞에 각각 두었습니다. 두 발을 담그라고 하자, 두 사람은 클라라를 빤히 쳐다볼 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발이 더럽고 냄새도 날 거라며 발을 내보이기를 부끄러워했습니다. 클라라는 곧 자신의 발을 씻은 그 방식대로 두 사람의 발을 담그고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날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세족식을 한 날입니다. 만삭의 몸으로 두 사람의 발을 씻어 주던 그날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하루 종일 신사용 검정 구두 안에 갇혀 건장한 남성의 체중을 견디며 분주하게 움직였을 큰 발과 엄마 아빠가 일하는 사이 다섯 살의 세상을 누볐을 작은 발. 클라라는 그 발들을 씻으면서 그들이 보낸 하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의 세족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클라라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은 ‘발을 씻어 주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언젠가 친한 친구의 발에 통풍성 관절염으로 심한 부종이 생긴 걸 본 적 있습니다. 그의 발을 씻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의 발을 씻어 주는 대신, 그의 아픔을 목격하며 얼마만큼 아픈지 어쩌다 아프게 되었는지 도울 일이 있는지 그의 말을 천천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게 발을 씻어 주는 일의 의미는 아픔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지치고 고단했을 발을 씻어 주는 시간, 온몸으로 사랑이 전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자주 서로의 발을 씻어 줍니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하루의 무게가 물 안에 풀어지고, 손끝으로 전해진 온기가 다시 몸으로 스며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나누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 갑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공부는 어디에 서느냐의 문제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만난 황용연(바오로 예레미야) 신부님은, 훗날 이태석(요한)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이끈 분이십니다. 황 신부님은 중학생인 저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빵집 유리창을 깨고 빵을 꺼내 먹었다면, 그 사람은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저희는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 나라 법으로 무죄입니다.” 그 말은 세상의 법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평가와 비교의 언어로 배워 왔습니다. 얼마나 잘했는지, 누구보다 앞섰는지를 묻고 답하는 데 익숙합니다.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가족과 나누지 않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들꽃을 가리키시며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아라”(마태 6,28) 하십니다. 무엇을 먹고 입을지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먼저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불안을 덜어 내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공부는 평가하기 전에 먼저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바라봄은 경탄을 낳고, 끝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서게 합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12,34),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복음은 생각보다 거칩니다. 그 거친 언어는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는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 앞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는 점수에는 민감하지만, 불의에는 침묵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의 점수는 묻지만,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결과를 요구하는 데 익숙합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우리를 머물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경탄은 우리를 바라보게 하고, 그 바라봄은 끝내 정의를 찾게 합니다. 공부는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서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공부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설 것인지, 외면당한 이들과 함께할 것인지, 이런 선택들이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를 드러냅니다. 분노가 감정으로 흩어지지 않고 삶의 방향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공부는 가족 안에서 드러납니다. 자녀는 버티고 있는데, 우리는 결과를 먼저 묻습니다. 함께 견디며 머무르는 일에는 서툽니다. 그렇게 자녀는 우리 곁에서 자라지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함께 배웁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이해하려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공부는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기보다, 더 깊이 바라보고, 외면하지 않으며, 끝내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성당 컨테이너에서 시작한 가족 독서

카타리나가 일곱 살이고 엘리사벳이 세 살이었을 때 저, 클라라는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경기도 파주시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처음 성당을 방문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엘리사벳을 유아차에 태워 카타리나와 함께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성당에 갔습니다. 성당에 들어가 맨 앞자리에 앉아 세 모녀가 두 손을 모았습니다. ‘이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몇몇 여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구일기도를 하는 자매님들이라 소개하며, 본당의 새 가족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구일기도의 마지막 날이었고, 마침 새 가족이 들어와 더욱 반갑다고 하시며, 앞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이런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당시에는 반가움이나 고마움보다는 예상치 못한 환대가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줍고 민망해 뒷걸음치다, 성당 앞마당 한 구석의 컨테이너를 발견하였습니다. 컨테이너 문 앞에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교육하기 전에 나를 먼저 교육해요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기 전에 먼저 책을 읽는 부모 아이 잘못을 나무라기 전에 먼저 이해해 주는 부모 사교육 없이 아이를 키워도 주눅 들지 않는 부모 옆집 아이가 잘해도 부러워하지 않는 부모 대안교육의 길을 열어주는 부모가 되기 위해 공부합니다. 어떻게 공부할까요? 어린이책을 읽고 토론합니다. 어른책도 읽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봅니다. 컨테이너는 도서관이었습니다. 컨테이너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에 감탄했습니다. 지역 도서관이 없던 시절, 지역 여성들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만들고 월 만 원의 회비를 걷어 헌책방과 출판 단지를 돌며 싼 값에 책들을 사들였다고 했습니다. 책들이 쌓이자 서가를 만들고 라벨링해 관리했다고요. 지역 여성들이 뭉쳐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만든 컨테이너 도서관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역 어린이들에게 책을 이용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공연장으로, 사랑방으로, 벼룩시장이나 나눔 장터를 하는 행사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당 앞마당 컨테이너 도서관을 중심으로 공동 육아와 사교육 없는 자립 교육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2011년 봄날의 깨달음은 2026년 봄날에도 유효합니다. 그때 컨테이너 도서관을 드나들며 가족이 함께 책을 읽고 대화하던 시간은, 장소만 공공도서관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날의 깨달음을 기억하며 클라라, 아우구스티노 부부는 함께 가족인문학연구소를 운영하며 널리 가족 독서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새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가족 독서의 시작을 열어 주신 여성 동지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정답을 넘어서 함께 머무르는 공부

성경을 읽다가 문득 멈출 때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좀 불편합니다.”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항합니다. 교회 안에서 질문을 꺼내면 종종 이런 말이 돌아옵니다. “그건 너무 나간 해석이야”,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마.” 어느새 그 말은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가 됩니다. 흔들림은 흔히 위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믿음은 단단해야 하고, 신앙은 안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천천히 읽어 보면,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십니다. 세리와 식탁에 앉으셨고, 안식일의 질서를 뒤흔드셨고,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냐”(마르 3,33)고 물으셨습니다. 가족과 혈연, 권위의 경계까지 다시 묻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위로이기 전에 먼저 불편함이었습니다. 익숙한 자리를 흔들어 놓는 말씀이었습니다. 불편함을 믿음의 위기로 오해하곤 하지만, 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아무 질문도 남지 않고, 아무 저항도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야말로 신앙이 멈춘 것은 아닐지요. 불편함은 믿음이 살아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언어와 자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움직임입니다. 신앙의 여정뿐 아니라 공부 또한 그러합니다. 공부는 나를 옳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묻게 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 온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연습입니다.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 공부, 그것이 예수님의 공부법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불편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아이의 선택이 부모의 기대와 어긋날 때, 배우자가 이전과 다른 길을 말할 때, 부모 세대와의 대화가 자꾸만 충돌로 끝날 때. 그때 우리는 일단 설득하려 하고, 보다 강하게 통제하려 합니다. 불편함을 서둘러 정리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가족이 할 수 있는 공부는 다른 길일지도 모릅니다. 견디며 곁에 머무르는 일. 쉽게 답을 내지 않고, 관계를 서둘러 끊지 않는 일. 불편함은 관계의 결렬이 아닌,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히 무관심해졌다면 우리는 아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아직 관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불편함이 없는 상태를 더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이 보여 주는 평화는 갈등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마음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불편함을 밀어내지 않고 그 안에 함께 머무를 수 있을 때, 관계는 조금씩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오해를 단번에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남기시고, 시간이 흐르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품도록, 그 질문이 삶이 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때로는 정답이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답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불편함을 듣고 그 안에 함께 머무르며 우리가 걸어갈 길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식탁은 어떠한 자리입니까. 정답만을 점검하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서로의 불편함을 드러내고 함께 머무르며 길을 찾아가는 자리입니까.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 (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보이지 않아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루카 18,41)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에게 엄마란 무엇이든 들어줘야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말 못 하는 아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온 감각을 동원해 주의를 기울여도 넘겨짚기 일쑤입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는 속수무책 당황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길러 내리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 냅니다.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한결 수월해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두 딸에게 이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큰아이 카타리나는 “제가 울 때, 제 눈물을 꼭꼭 닦아 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나 된 아이가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이겠다고?’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그래도 내 아이를 믿어야지’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울 때 엄마가 네 눈물을 꼭꼭 닦아줄게.” 그리하여 카타리나가 울던 날,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말없이 눈물만 닦아 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카타리나는 눈물과 함께 눈물이 날 만했던 일까지도 씻어 내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을 함께하는 가족이라면 예수처럼 먼저 묻고 살핀 뒤 바라는 것 해주는 과정 필요 작은아이 엘리사벳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꼬옥 안아 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된 아이가 매일 안아 달라고?’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네가 오면 엄마가 꼬옥 안아 줄게.” 엘리사벳이 돌아올 무렵이면 두 팔을 벌리고 기다렸습니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한참을 안아 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은 그 시간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친한 친구가 제게 배우자 아우구스티노는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제 발에 딱 맞는 신발과도 같은 사람이라 대답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한 26년 동안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나요?”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제 대답을 기억해 두었다가 알맞은 순간에 실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지만 세월 속에서 제게 딱 맞는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일상을 함께 하는 가족이라면, 서로에게 예수님의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화의 과정이 바로 가족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묻고 살핀 후에 바라는 것을 해 주어야 합니다. 루카 복음 18장 41절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맹인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않아도 믿는 마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껴안는 일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한 순간에도, 스스로를 믿고 또 서로를 믿는 그 마음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0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선을 긋는 공부에서, 함께 앉는 공부로

아이들은 교과서보다 먼저 세상의 분류표를 읽습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사람의 값이 되고, 부모의 경제력이 실력처럼 작동하며, 성적이 인격의 등급이 되는 현실 속에서 큽니다. 우리는 그것을 질서라고 부르지만, 아이들 눈에는 하나의 서열입니다.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집니다. 이쪽과 저쪽,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아이들은 그 선을 배우며 자랍니다. 복음서 시대에도 선은 있었습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고 전합니다(5,29-32 참조). 당시 유다 사회는 정결 규정으로 ‘깨끗한 자’와 ‘더러운 자’를 나누었습니다. 식탁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삶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오늘 아이들이 성적과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누는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정결 규정으로 사람을 나누던 모습과 닮았습니다. 선은 달라졌지만, 분류의 방식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을 해설하거나 공격하기보다, 그저 그 선 위에 함께 앉으셨습니다. 그 식탁은 경계를 몸으로 지운 자리였습니다. 들어올 사람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누구도 밀려나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복음의 급진성은 식탁에서 시작합니다. 루카복음 10장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율법 교사가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분류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이웃을 가려내는 공부가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공부였습니다. 질문은 ‘선’ 대신 ‘자리’를 선택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비움’ 공부 서열과 경계를 결정하는 대신 서로의 곁에 서고 식별하는 일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를 미워하지 않으면…”(14,26 참조)이라는 말씀까지 남기십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혈연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가족마저 경계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직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누가 더 옳은지를 가르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 곁에 설 것인지를 배우는 연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비움’의 공부법은 여기에서 완성됩니다. 무엇을 더할지보다, 어떤 선을 지울지를 식별하는 일입니다. 이 공부는 가족 안에서 가장 먼저 시험 됩니다. 성적이 떨어진 날, 결과보다 먼저 아이의 마음을 묻는 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분위기를 그대로 두지 않는 태도. 동네와 배경을 두고 오가는 차별의 농담을 웃으며 넘기지 않는 선택.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을 통해 배웁니다. 어디에 선을 긋고, 어디에서 그 선을 지우는지를 식별합니다. 세상은 서열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아이를 키웁니다. 그러면서도 묻게 됩니다. 정말 이 길뿐일까. 복음은 선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쉽게 긋고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경계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누구를 밀어내기 위해 그은 선인지, 무엇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굳어진 선인지. 그리고 말없이 다른 자리를 보여 줍니다. 함께 앉는 자리입니다. 가족은 이미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선을 조금씩 지워 가는 연습의 자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식탁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삶과 식별을 듣는 자리일 수 있을지요. 그 질문이 조용히 남습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미워하고 미움받으며

엄마와 딸의 관계는 각별합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여서 때로 서로를 침범하며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애와 증을 오갑니다. 고(故)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작가는 이러한 모녀 사이의 모순을 작품 「엄마의 말뚝」에서 신랄하게 풀어냈습니다. 그는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소설이기 이전에 한바탕의 참아내지 못한 통곡 같은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삼켜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삼키지 못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세상에 쏟아 냈고 후회도 많이 하셨다고요. 저, 클라라 역시 오래도록 모녀 사이 애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엄마 소피아를 미워하며 죄책감에 시달렸고, 큰딸 가타리나의 미움을 받으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고 미움받는 동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얽히고 또 끊어 내며 제 삶에서 꼭 해야만 하는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아에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순간 임신 중지를 결심했다던 엄마의 고백은 제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이 소멸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엄마 마음에 드는 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 마음에 드는 딸의 삶이 제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므로, 점점 그 사이 격차가 벌어지며 엄마를 미워했던 것이었습니다. 아픈 엄마를 위해 의사가 되겠다던 열 살 큰딸에게 엄마란 존재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엄마를 위해 선택한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닐 때, 그 갈등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자라는 동안 내내 엄마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그리되지 못한 저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클수록 엄마에 대한 미움도 커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미워하고 미움받으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제게, 루카복음 14장이 처음에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엄마를, 딸을,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하시다니……,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다니요. 하지만 묵상을 거듭하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공부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십자가를 찾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진짜 공부라는 깨달음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모녀 관계라는 테두리 너머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습니다. 엄마에게 얽매이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제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큰딸 가타리나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 소피아로부터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든지 나를 미워하렴. 그리고 네 길을 가렴.”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더하기가 아니라 비우기로 배우는 가족

우리는 공부를 ‘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더 풀고, 단어를 더 외우고, 경험을 더 쌓아야 안심합니다. 아이가 뒤처질까 불안한 마음에 자연스럽게 무엇인가를 얹습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율법은 육백여 개가 넘는 조항으로 정리됩니다. 수백 가지 세세한 규정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깨끗한지, 누구와 함께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구분하며 살아갔습니다. 삶은 복잡해지고, 신앙은 무거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율법을 단 두 문장으로 묶으십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그 많은 규정이 두 가지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복잡함은 사랑 앞에서 단순해집니다. 많이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무엇을 식별하여 남길 것인가를 묻는 신앙이 됩니다. 쌓는 공부가 아니라 덜어 내는 공부입니다. 신학은 이를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이라 부릅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뜻이 머물 자리를 내어 드리는 길입니다. 비움은 포기가 아니라 식별입니다. 무엇을 더할지보다 무엇을 남길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부법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은 수백 번에 이릅니다. 반면 예수님이 받은 질문에 직접적이고 단정적으로 답하신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정답을 보여주는 답안지 제공자이기보다, 멈추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자에 가까우셨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질문은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빠른 답으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보다, 질문 속에서 스스로 변화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더하기’의 방향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2024년 통계에 따르면 초·중·고 학생의 80%가 사교육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이 열 명 중 여덟 명이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또 다른 시간표로 살아갑니다. 그 시간을 떠받치는 것은 부모의 시간입니다. 교육의 흐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더 일하고 더 벌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아이는 배우느라 바쁘고, 부모는 마련하느라 바쁩니다. 함께 머무는 시간은 사라집니다. 식탁과 거실은 각자의 화면 불빛 아래 흩어집니다. 그만큼 대화는 짧아지고, 질문은 멀어집니다. 오늘의 가족은 멈추는 삶을 잃어갑니다. 멈춤은 뒤처짐이라고 여깁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공부법이 다시 떠오릅니다. 육백여 개의 복잡함을 두 가지 사랑으로 덜어 내셨던 분. 수백 번 질문하시며 사람을 멈추게 하신 분. 예수님의 공부법은 더 채우는 기술이 아니라, 덜어 내는 용기입니다. 사랑만 남기고, 나머지를 비워 내는 일. 우리 가족의 거실과 식탁이 정답을 점검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질문과 마음을 나누는 자리라면 어떨까요. 더 빨리 가는 가족이 아니라 더 깊이 머무는 가족.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비움의 공부로 초대하십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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