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9) 교회 환경운동의 본격 태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로운 사회 발전의 토대인 수많은 윤리 가치들은 생태 환경 문제와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서 ‘오늘날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 자연 자원의 피폐, 점차 악화되는 생활의 질적 저하로 인해 세계 평화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해 이같이 강조한 교황은 ‘과학기술 발전의 무차별 적용으로 오늘날 생태계는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는 생명과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점차 상실시켜 인간 경시에 이르고 마는 비자연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세계관을 낳게 됐다’고 개탄했다.”(가톨릭신문 1990년 1월 1일자 1면) 한국교회 환경운동의 공식적인 출발점은 1991년입니다. 1984년 울산 온산 지역의 대규모 공단 폐수 오염에 따른 ‘온산병’ 발병과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등으로 당시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습니다. 이는 국가 주도의 압축적 산업화가 낳은 환경 재난들이었습니다. 이런 재난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환경오염과 파괴가 인간 삶의 질적 저하, 심지어 생존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는 평화’를 발표했습니다. 이 담화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소비주의가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있음을 경고하며, 생태계 보호가 신앙인의 도덕적 의무이자 참된 평화를 향한 과제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담화는 한국교회가 환경 문제를 공식적인 사목 과제로 채택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환경보전 인식의 대전환 한국교회가 교황 담화에 응답하면서 교회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했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1991년 환경 보전에 관한 교황 담화 자료집을 발간하고, 개인과 본당, 교구 단위의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어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산하에 ‘하늘땅물벗’이라는 생태 사도직 모임을 구성하고 월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에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주관으로 교회 내 22개 환경운동단체가 참가한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가 처음 열렸고 이듬해에는 ‘환경상’도 제정됐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1991년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생활 수칙 70가지’ 포스터와 자료집 ‘생명과 해방으로 가는 길’을 제작, 보급한 데 이어,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공청회는 교회 안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농촌사목 분야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생명공동체 운동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1990년 가톨릭농민회는 제20차 대의원대회에서 사람과 땅, 자연을 살리는 생명 농업 실천을 공식 결의했습니다. 안동교구의 생명 공동체 운동이나 대구대교구의 푸른평화운동본부 등은 이러한 유기적 생명관에 기초해 비신자를 포함하는 폭넓은 연대 활동을 전개하며 초기 환경운동의 외연을 확장했습니다. 1994년에는 환경교육의 내실화, 환경운동의 정착 및 확산, 타 단체와의 연대 활동 등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서울과 대구대교구 등에서 환경전담사제가 임명됐고 전국 환경사제모임이 결성됐습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활실천부는 환경 문제를 전담하는 ‘환경보전부’로 개칭했고, 대구대교구 푸른평화운동본부가 지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교회 환경운동의 정체와 답보 한국교회는 환경운동을 신앙 실천의 하나로 수용하게 됐지만, 초기의 열정과는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 교회 환경운동은 제자리걸음에 머물게 됩니다. 초기의 환경운동은 쓰레기 분리수거, 합성 세제 감축, 자원 재활용 등 생활 실천 운동에 집중됐습니다. 공해 문제에 대한 구조적,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고, 주로 개인의 도덕적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는 윤리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점차 운동의 동력과 방향성을 잃고 답보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가톨릭신문은 기획기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교회 환경운동의 이러한 문제를 진단했습니다. 1996년에는 교회 환경운동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본당 환경 분과나 단체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답보 상태임을 지적했습니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10여 개가 못 되고 이들 단체의 책임자들은 ‘기존의 환경운동이 개인적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는 만큼 눈에 띄는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가톨릭신문 1996년 4월 21일자 1면) 2003년에는 ‘본당 중심 환경운동 답보 상태’라는 취지의 기사에서, “교회 환경운동의 손발이 없어 환경보전운동이 생활 속의 실천 운동으로 확산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교구 전체 본당 가운데 환경분과가 설치된 본당은 불과 7곳뿐이고 실질적으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곳은 단 2곳으로 집계되고 있다.”(가톨릭신문 2003년 6월 1일자 1면) 본당 환경분과는 생활 실천 운동을 추진하거나, 지역사회의 환경 관련 사안들에 대한 참여가 이뤄지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환경운동의 ‘손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환경운동, 특히 본당 단위의 풀뿌리 교회 환경운동은 사실상 오랫동안 침체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 관련 현안에 대한 범종교 연대 1990년대 중반 이후 교회 환경운동이 초기의 활력을 잃고 정체기에 접어들었지만, 2000년대 초반 거대한 환경 파괴 현장에서는 천주교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인 새만금 간척 사업과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공사 반대 운동 등에서 천주교는 피조물의 생명권을 수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은 종교계 연대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문규현 신부와 불교계 수경 스님 등은 도심 한복판에서 ‘3보 1배’의 고행을 통해 생명 살상의 실체를 고발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결성된 5대 종단 연대 기구인 ‘종교환경회의’를 통해 천주교는 이웃 종교와 함께 생태 보전, 탈핵, 기후위기 대응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실천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990년 교황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계기로 본격화된 교회 환경운동은 오랜 기간의 정체기를 거쳐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반포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회칙은 인류의 환경 위기를 ‘근본적인 영적 위기’로 규정하고, 자연환경의 위기가 인간 및 사회의 위기와 별개가 아니라는 ‘통합적 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시하며, 인류 전체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생태적 회개(Ecological Conversion)’를 촉구했습니다.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8면

[Hearing the Intellectuals of the Global Church – Father Anselm Grün]

This article is released on March 25, 2026, in both print and online formats. The Catholic Times is launching its centenary project, Hearing the Intellectuals of the Global Church, seeking answers to the questions facing the Church today, through the voices of those who have long pursued the essence of faith, the mission of the Church, and the questions of the age within the global Church. Through dialogue with intellectuals of the global church, we hope to discover words of insight to which the Korean Church should listen, in these rapidly changing times. The series' first instalment features Fr Anselm Grün, the inaugural interviewee, whose books are regularly found in the religion sections of bookshops, with hundreds of them translated into many languages around the world, reaching tens of millions of readers. Yet the central message of the monk, who has lived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at Münsterschwarzach Abbey of the Order of St. Benedict in Germany, is simple: « entrust yourself to God just as you are. » He speaks about his writings and spiritual experiences, his advice for those living in an anxious age, his message to The Catholic Times as it approaches its centenary next year, and his words of encouragement to the Korean Church and its young people preparing for World Youth Day (WYD) 2027 in Seoul. Still active at eighty Fr Grün turned eighty on 14 January 2025. Yet he remains fully active. At the abbey’s retreat house, he gives spiritual formation courses and leadership courses for executives, and at the request of various institutions, including Berlin’s Ministry of Labour and the Federal Intelligence Service, he also takes part in leadership training. At a spiritual healing centre for priests, religious and Church employees experiencing spiritual crisis, he quietly accompanies them as a spiritual director. Asked about the secret of his prolific writing, he said « I try to explain things in the simplest language possible, so that people may find real help in their own lives as they try to live out Christian spirituality. Rather than putting moral admonition or instruction to the fore, he added, I try to speak to the wisdom that resides in the human soul, and I write with a constant awareness that within every person there is a longing for God and for spirituality. » The central theme running through his writings is ‘healing’: he traces his focus on this theme to the Desert Fathers of the early fourth century. « The spiritual journey of the Desert Fathers was always a path that transformed and healed the human person, he said, as I came to see afresh that Jesus’ public ministry, too, was essentially directed towards healing and restoration, I became more deeply interested in healing and inner growth. » Asked what core message he most wants to convey to readers through his books, the priest replied, « Faith frees us from the pressure constantly to display ourselves, justify ourselves and prove ourselves. » He explained: « Faith allows us to lay down the burden of having to make ourselves into better people, and went on to say, only when we acknowledge what is within us as it is and entrust it to God does change truly begin; only what we fully accept and offer to God can, in God’s hands, move beyond mere ‘change’ and be transfigured. » As the most important virtue for discovering one’s true self and growing spiritually, he named « honesty. » Speaking of his own practice, he said, « I remain quietly before God and entrust to him everything that rises up within me, he added, in that quiet encounter, I come to know myself by facing even the dark sides that I had long kept suppressed in ordinary life. » The era of AI… consolation comes not from a screen but from human encounter AI is now penetrating deeply even into the realms of counselling, consolation and spiritual advice. On this point, Fr Grün drew a clear line, stressing that « modern technology must be used carefully, but we must not be dominated by it, he said, AI in particular cannot provide ‘consolation’, because consolation requires not words read from a computer screen, but a concrete encounter with another person. » As a practice for preserving spirituality in such an age, he proposed « a healthy ascetic discipline (Askese): we need a good form of restraint, a discipline that resists constantly filling ourselves with information, he said, when we entrust to God in prayer what we read and hear, we can escape the danger of circling endlessly around the world’s problems and becoming powerless because of them. » Fr Grün has long stressed the balance between work and faith, spirituality and everyday life. « To maintain this harmony, he said, the most effective way is to have a personal daily ‘ritual’ (Rituale), because it gives a person a ‘sacred time’ that belongs to God and to oneself alone. » « What is just as important is one’s inner attitude. Only when we are fully engaged from within do we avoid burnout, because we are constantly drawing strength from the inexhaustible spring of the Holy Spirit. » He explained, « this is precisely what St Benedict’s teaching, ‘Ora et Labora’ — pray and work — means. It means working not out of the ‘ego’, which seeks to display itself before others and prove itself, but out of the power that wells up from the inner centre, the ‘true self’ (Selbst). » Asked what the deepest spiritual experience of his long life as a monk had been, he answered, « It is bringing everything I have gone through to God and facing him there, he continued, only then does inner transformation truly begin. What I have learned is that what matters is not simply changing myself, but becoming new in an essential way. When I accept myself as I am and offer myself to God, everything within me can at last be transfigured. » To the Korean youth looking forward to Seoul WYD Looking ahead to World Youth Day (WYD) 2027 in Seoul, Fr Grün turned his thoughts to Korean young people: « We should be grateful that so many young people in the Korean Church are serving and taking an active part in the Church, he said, I hope that young people in the Korean Church will be an example to young people in Europe, who have to preserve their faith in a secularised world. » To young people weighed down by employment pressures, competition and anxiety about the future, he offered this counsel: « You must never lose hope. Hope is different from expectation. Our expectations may end in disappointment, but hope cannot be disappointed, he added, hope is not about drawing a concrete picture of the future, but about trusting that life, whatever form it may take, will be led towards the good. » The priest repeatedly stressed, « I hope young people will come to feel that, in this uncertain age, faith offers us support and stability, and that the Church can be the very place from which hope is drawn. » What he hopes for from The Catholic Times Speaking of The Catholic Times as it marks its 99th anniversary this year, Fr Grün said, « on the one hand, it must face the problems of the age with courage; on the other, it must provide a space for reflection in which people may be invited into silence, he added, for that, faith must be proclaimed in a language that people today can understand. » And to the readers, most of all, he commended gratitude for those who have gone before them in faith. « I hope people will carry within themselves a spirit of gratitude for the many who walked the path of faith before them. We live upon the roots of faith they laid down, and we share in the strength of faith they possessed. » The priest also asked people to trust that the Christian Gospel remains, even in these times, good news that brings healing and courage: « in this confused age, this Gospel offers hope, concluding the interview with these words: I hope the faithful of the Korean Church will become leaven in Korean society, fostering reconciliation and hope. » ■ About him Fr Anselm Grün is one of the most prominent spiritual writers of the modern age and a prolific author whose work has deeply resonated with readers across the world. Born in Germany in 1945, he entered a Benedictine monastery in 1964 and went on to study philosophy, theology and business administration, following a path that has brought together monastic life, scholarship and practical work. His spirituality brings together the tradition of the Desert Fathers, Scripture, modern theology and psychology. Through this, he offers a way of encountering God in daily life, in emotions and in human relationships. Emphasising moderation and balance rather than excessive asceticism or idealism, he has continued through his writing and lectures to help modern people, burdened by anxiety, woundedness and exhaustion, to accept themselves and move towards healing. His nearly 200 books, written in accessible language on happiness and emotion, friendship and community, and the miracles of everyday life, have been translated into dozens of languages and have become spiritual guides for millions of readers worldwide. Having visited Korea several times for lectures and meetings, Fr Grün has brought to people living amid the realities of division, competition and exhaustion a message of reconciliation, healing and self-acceptance. ■ His handwritten message in celebration of the journal's 99th anniversary Dear readers, I congratulate The Catholic Times on its 99th anniversary, and I pray for God’s blessing upon you all. May the writings in this newspaper strengthen your faith, so that you may become trustworthy witnesses who proclaim the Gospel of Jesus in Korean society. May our Lord’s blessing always accompany your path, and may you yourselves become a blessing to the people of Korea. Yours, Fr Anselm Grün reported by Lee Juyeon milki@catimes.kr translated by reporter Bak Juhyeon ogoya@catimes.kr

입력일 2026-05-13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4) 가톨릭신문이 전한 성모 신심

5월은 성모 성월이다. 1622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제정된 이후 교회는 이 시기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고 특별한 은총을 청하며 공경을 표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삼고 있는 한국교회는 태동기부터 특별한 성모 신심을 간직해 왔다. 가톨릭신문이 전한 한국교회의 성모 신심을 돌아보자. 가톨릭신문의 첫 성모 신심 보도는 1928년 8월 1일자(제17호)로 추정된다. 당시 기사는 “세상에는 천주교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기보다 성모 마리아를 존경한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성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느님의 어머님, 둘째는 영원한 동정, 셋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부터 올바른 성모 신심에 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해 온 가톨릭신문은 한국교회 성모 신심이 박해 시기인 19세기부터 형성돼 있었음을 밝힌다. 1996년 5월 5일자(제2001호)와 2004년 8월 15일자(제2411호) 등에서는 박해 당시 순교자들이 묵주 기도에 의지했으며, 압수된 물품 중에는 묵주, 성모 상본 등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성모 신심 단체의 활동도 여러 차례 소개했다. 1953년 발행된 지면들에서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운동을 안내하고, 도입 소식을 알렸다. 같은 해 5월 15일자(제125호)는 “성모님의 ‘죄인들의 회개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응답하는 운동이 곧 푸른 군대”라며 “회원은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고 희생하며, 죄를 멀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1974년 5월 19일 파주 자유의 다리에서 개최된 ‘제1회 통일 기원 기도회’ 소식도 지면에 실었다. 1962년 12월 16일자(제355호)에서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 10주년을 기념해 1953년 7월 28일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첫 쁘레시디움이 조직된 사실과 이는 기도와 활동으로써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채로운 성모 성월 행사도 보도했다. 1949년 6월 1일자(제76호)에는 대구대교구 계산동 주교좌본당 학생들이 성모상 행렬에 참여한 소식이 담겨있다. 기사는 “성모 성월을 기념해 성모님께 꽃다발을 봉헌하고, 성가 제창과 공동 기도를 드린 후 행렬에 들어갔다”며 “이날은 북한의 종교 박해 속에서 고통받는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교우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뜻깊은 행사”였다고 전했다. 또한 2010년 5월 23일자(제2698호)에서는 부산교구 양산 물금본당이 5월 한 달간 ‘성모 성월 축제’를 지내며 ‘파티마의 성모님 가정 순례’, ‘성모님과 함께하는 어린이날·어버이날’ 등의 활동으로 성가정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명시했다. 올바른 성모 신심을 촉구하는 역할도 해 왔다. ‘파티마 제3의 비밀’ 공개 전 유언비어와 나주 윤 율리아 관련 문제 등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했다. 1996년 5월 5일 자(제2001호) 사설에서는 “성모 신심이 그 열성만큼 삶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마리아를 닮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성모 신심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8) 임수경·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수산나) 양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파북 된 전주교구 문규현(바오로) 신부가 임 양과 함께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문 신부와 임 양은 군사분계선을 넘는 즉시 유엔군사령부 경비병에 의해 연행됐으며 유엔군사령부 측은 공동경비구역 외곽에서 우리 측에 신병을 인계했다. 문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오기 전 판문점 북측 지역인 판문각에서 거행된 환송집회 중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헤어질 수 없는 하나의 동포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신했다’고 밝혔다.”(가톨릭신문 1989년 8월 20일자 1면) 1989년 대한민국은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화 열기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전이되는 격동기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7 선언’으로 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했으나, 통일 논의는 철저히 국가가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임수경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의 동행 귀환은 국가의 독점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를 존립 기반으로 삼던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북한 선교’라는 시혜적 태도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사목 노선으로 대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투쟁에서 통일을 향한 갈망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 운동권은 6월 항쟁의 동력을 조국 통일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분단의 고착화가 남한 내 독재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와 남북 학생 회담 추진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당시 서울대생 조성만(요셉) 군이 조국 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한반도 전역에서 통일 운동이 더욱 세차게 번져가는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바야흐로 통일 논의의 주체가 정부를 넘어 민간으로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7·7 선언을 발표해 북한을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남북 교류를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민간 차원의 접촉은 철저히 통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재야인사들의 방북이 이어지는 가운데, 1989년 7월 전대협은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을 대표로 파견해 거대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분단의 장벽을 넘어, 사제단의 결단 임수경은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정부는 즉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에 착수했고, 그녀의 안전한 귀환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이에 정의구현사제단은 분단의 장벽을 깨기로 결단을 내리고 문규현 신부를 평양으로 파견했습니다. 광복 44주년인 8월 15일, 두 사람은 남북 및 유엔군의 경고 속에서도 나란히 손을 잡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습니다. 판문점을 넘기 직전 임수경은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극적인 귀환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남측 경계를 넘자마자 체포된 두 사람은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충격과 당혹감 정부는 이를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순 세력의 도발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안 정국을 조성했습니다. 교회 당국 역시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주교단은 7월 27일 담화문을 발표해 충격과 유감을 표명하고 “통일을 촉진하고 싶은 사제들의 마음은 이해한다”면서도 “우리 사회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행동이 앞섬으로 인해 많은 국민에게 우려와 불안을 준 것은 마땅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불법적인 정치 개입이라는 비판과, 교회가 비로소 분단 문제에 온몸으로 응답했다는 지지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토론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엄혹한 공안 정국 속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제 막 이뤄 노동 문제 등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들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국민 대중의 의식 수준은 아직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학생 대표와 사제단의 ‘불법적’인 방북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센 내부 갈등은 한국교회를 포함한 전 국민이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민족 화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고통스러운 산고의 과정이었습니다. 반공주의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이 사건은 북한을 ‘침묵의 교회’, ‘타도의 대상’으로 보던 교회의 시각을 ‘대화와 화해의 상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식의 변화는 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출범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주교회의도 기존 ‘북한선교부’를 ‘민족화해위원회’로 개칭하며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인도적 지원, 민족 화해 미사 봉헌, 평화 교육 등을 적극 전개하며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비록 당시의 법체계와 사회적 금기, 부분적으로는 교계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충격과 당혹감을 던졌지만,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가 독점해 온 통일 담론을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영역으로 확산시켰으며, 분단의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방북을 보는 가톨릭신문의 시각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가톨릭신문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1989년 8월 6일자 2면에 실린 사설에서 방북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 사설은 사제단의 행동으로 교회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졌으며, 거기에는 사제단이 창설된 1974년 이후 이를 방치해 온 주교단에 책임을 묻고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사제들을 질타했습니다. 충격적인 방식에 우려를 표할 수는 있으나, 민족 화해라는 본질적 가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외면한 채 교회의 기강 확립에만 집중한 점은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사설은 기강의 해이함이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이 창설된 후부터 시작됐다고 단정했습니다. 이로써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재 청산의 과정에서 보여준 사제단의 역할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결국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기반해 볼 때, 이 사설은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고 예언직의 수행에 소홀했으며, 그럼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다행히 1년 뒤인 1990년 6월 24일자 특집 기사에서는 “사제단의 방북이 교회 내 통일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통일 논의를 억압한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한층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7)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성찬례 통해 성체 신비 생활화 다짐, 교황 두 번째 訪韓, 미사 주례 -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를 통해 나눔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는 역사적인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핵심 행사인 장엄미사가 대회 마지막 날인 10월 8일 오전 10시30분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례하고 각국에서 온 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으로 집전한 가운데 성대하게 봉헌됐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지난 10월 4일 개막과 함께 기도회, 학술 심포지엄, 젊은이 성찬제 등 각종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 이번 성체대회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이날 장엄미사에는 전 세계 108개국에서 온 200여 명의 주교단 및 2000여 명의 사제단과 65만 명의 국내외 신자들이 참례, 성체 안에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성체 신비의 생활화를 다짐했다.”(가톨릭신문 1989년 10월 15일자 1면) 1989년 10월 8일,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 있었던 드넓은 광장에는 65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가톨릭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폐막미사가 거행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날 미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방한해 주례했습니다.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된 이 여의도광장은 원래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아스팔트 활주로가 있던 비행장이었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71년 ‘5·16 광장’이라는 이름의 비상활주로 광장으로서 대대적인 군사 및 국가 행사 공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군사정권 잔재 청산과 환경친화적 도시개발 계획이 추진돼 1999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됐습니다. 여의도광장 시절, 광장은 7만2000평, 도로 면적을 포함하면 총 12만 평에 달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최대 수용 인원은 약 70만 명이며, 현실적으로는 50만 명 수준이 한계였습니다. 그러니까 무려 65만 명이 한자리에 모인 이날 행사가 얼마나 큰 규모를 기록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이처럼 역사적 공간 위에서 열린 대회는,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전환과 깊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아직은 동양의 작은 나라였던 한국, 선교지역의 미미한 교세를 가진 작은 지역교회에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국제행사가 열린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은 가장 역동적이고 고통스러운 전환기였습니다. 1970년대 고도성장 뒤에는 노동, 빈곤, 인권 유린, 군사 독재 등 첩첩이 쌓인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 상황이 있었고, 이는 1980년대 들어 전 사회적인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아픔에 깊숙이 참여해 교회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고, 민주화와 인권 수호의 보루로서 복음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양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정치적 민주화의 달성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시민 사회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됐고, 그 한가운데에 천주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단순한 신앙 행사가 아니라, 민주화 이후 사회적 치유와 통합을 향한 교회의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계성체대회는 1881년 프랑스 릴에서 시작, 4년마다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개최됩니다. 이 대회의 본질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비로운 일치를 통해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특히 1960년 독일 뮌헨 대회 이후 세계성체대회는 교회의 담장을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적 의미가 강화됐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수성과 민주화 이행기라는 시대적 요청, 그리고 신흥 성장 국가인 한국이 아시아 선교의 거점이 되리라는 기대가 맞물려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정치적 민주화의 성취는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 참여적 에너지를 신앙과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는 복음적 실천력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용서가 전제된 복음적 평화였고, 이는 민주화 이후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려는 교회의 사목적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평화, 감사, 회심과 일치를 향한 염원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열린 세계성체대회는 평화와 감사, 회심과 일치를 향한 한국민들의 염원을 가득 담아 성대하게 개최됐습니다. 대회는 평화의 사도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인 10월 4일 전야제 평화의 날을 시작으로, 5일 감사의 날에는 제찬과 성찬 심포지엄이 개최됐습니다. 6일 회심의 날에는 세계 평화와 교회를 주제로 한 강연회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본 한반도의 평화 심포지엄 및 젠 베르데의 공연 ‘깨어나라’가 열렸으며, 이어 참회 예절과 철야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7일 일치의 날에는 성공회 성당에서 각 교파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회가 개최됐고, 한반도의 분단 지점이 보이는 도라산에서는 ‘하나 되게 하소서’를 주제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 통일 기원미사가 봉헌됐습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 도착한 교황은 서울대교구 논현동성당에서 ‘엠마우스 성시간’을 주재한 뒤 ‘젊은이 성찬제’에 참석했습니다. 대회 마지막 날인 8일 축제의 날에는 교황이 직접 주례하는 장엄미사가 여의도광장에서 성대하게 봉헌됐습니다. 교황은 이날 강론 서두에서 “한국교회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지 5년 만에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폐막미사를 거행할 수 있게 된 은총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한 뒤, “성도들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은 근원이 있으며 성찬례 안에 가장 충만한 성사적 표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한마음한몸운동’의 제도적 정착입니다. 이 운동은 성체대회의 정신을 '생활 실천'으로 구체화했는데, 초기에는 헌미헌금운동을 중심으로 시작됐으나, 점차 생명 나눔, 환경 보존, 국제 원조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지금도 왕성하게 나눔운동과 생명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비록 5일간의 짧은 기간 개최된 대회였지만,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의 현실 속에서,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참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의 마음을 모아,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8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3) 가톨릭신문 속 신학교 역사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시기에는 그중에서도 사제, 수도자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한다. 신학교는 사제 성소 식별과 계발을 도우며, 사제를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 가톨릭신문이 담아온 ‘성소의 요람’, 신학교 기사들을 살펴본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는 프랑스 출신 메스트르 신부가 1855년 충청북도 배론에 세운 ‘성 요셉 신학교’로 추정된다. 병인박해 시기인 1866년까지 운영됐으며, 박해가 끝난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로 재건됐다. 이후 1945년 ‘경성천주공교신학교’를 거쳐 1959년 가톨릭대학교까지, 가톨릭신문은 신학교 역사에 관한 자료를 취합해 종합 정리하는 기사를 1970년대부터 다뤄왔다. 또한 1931년 촬영된 성 요셉 신학교와 이후 촬영된 예수성심신학교 터 사진을 보유하고 있어 초기 신학교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은 1962년 문을 연 대건 대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학교)의 설립 배경과 개교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1960년 11월 6일자(제253호)에서는 공사가 곧 시작된다는 소식과 함께 당시 제5대 광주대교구장이었던 고(故) 현 하롤드 대주교의 노력 덕분에 설립이 결정됐음을 알렸다. 새로운 신학교의 필요성과 ‘대건’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설명했다. 1961년 6월 18일자(제283호)에서는 “교회 발전의 토대인 사제를 늘리는 일은 신자와 본당 수 증가에 따라 시급해졌다”며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만으로는 필요를 충족할 수 없어 1959년 1월 21일 로마 성청(현 교황청)이 설립을 허가했다”고 전했다. 이어 “타국에서 얻은 성직으로 전교하고, 푸른 충절을 선혈로 새기며 한국교회에 빛을 남긴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이름을 ‘대건 대신학교’로 정했다”고 덧붙였다. 1914년 개교했다가 일제에 의해 폐교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1982년 개교한 선목신학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설립 소식도 다루고 있다. 1982년 6월 6일자(제1308호)에서는 개교기념식을 보도하며 초대 총장 고(故) 이종흥(크리산도) 몬시뇰의 말을 인용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해 현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활달하고 창의적인 목자 양성에 노력할 방침”이라고 설립 목표를 밝혔다. 신학교 설립 기사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984년 3월 4일자(제1395호)에서 수원가톨릭대학교가 1984년 3월 2일 입학식, 4월 초 개교기념식과 본관 건물 축성식을 열 계획임을 밝혔다. 특히 1984년 5월 6일자(제1404호)에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해 수원가톨릭대학교 본관 머릿돌을 축성한 소식을 호외로 발행했다. 이 외에도 부산·인천·대전가톨릭대학교 설립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올해 1월 4일자(제3473호)에서는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대성당이 재건축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장면과 2025년 12월 21일 이곳에서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사실을 기록했다. 가톨릭신문은 앞으로도 신학교의 모습을 담아내며, 교회의 미래를 이끌 사제 양성의 현장을 계속 보도할 예정이다.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6) 6월 항쟁, 그 위대한 승리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온 명동성당 농성 시위 사태가 6월 15일, 농성 중인 학생, 시민들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사태 발생 6일 만에 극적으로 일단락됐다. 이번 농성 시위에서 극적인 해산 결정이 나오기까지 사제단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11일 경찰이 명동성당 구내에 최루탄을 다량 발사한 데 항의, 명동본당 주임 김병도 신부가 사제들을 소집함으로써 이날 오후 처음 자리를 같이한 서울대교구 사제들은 12일,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하고 오후 8시 농성학생, 시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으며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기도회를 갖는 등 ‘함께한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자 11면) 임계치에 도달한 분노 1987년 5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제단의 폭로 이전에 전두환 정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패착을 둔 상태였습니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일체의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고 ‘체육관 선거’로 불린 간선제 헌법 체제를 유지해 군부독재를 영구화하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 12명은 4월 21일 오후 7시부터 가톨릭센터 6층 소성당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4·13 특별담화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말살시켰다’고 말하고...”(가톨릭신문 1987년 4월 26일자 11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참상을 담은 ‘5·18 사진전’을 광주와 부산 등지에서 개최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참혹한 증거들이 시민들에게 공개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태생적 불법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폭로됐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다 사제단의 고문 조작 폭로와 단식, 5·18 사진전 등으로 촉발된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는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범국민적 연대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공식 발족했습니다. 이어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 5일 끝내 숨을 거둔 이한열의 피격 장면은 외신과 국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박종철의 죽음과 겹치며 분노는 마침내 폭발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권은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의 후계자를 내세우는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같은 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됐습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6월 민주항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발생한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이어집니다. 명동성당, 6일간의 해방구 명동성당 농성의 발단은 학생운동 단체의 기획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6.10 국민대회에 참가하려던 대학생 500여 명이 경찰에 쫓겨 성당 구내로 들어옴으로써 시위가 시작됐고, 성당 구내에 있던 상계동 철거민과 시민 100여 명이 가세, 600여 명이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11일 오전 시위대가 중앙극장 쪽 골목, 로얄호텔 쪽 골목, 판넬골목 등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 3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으며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등 강력히 저항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 자 11면) 당시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22년 6월 22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처음 학생들로부터 ‘해방구’란 말을 들었다”며 “성당은 본디 해방구이니 절묘한 은유법이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나를 밟고 가라” 정부는 비상계엄 선포나 경찰력 투입을 검토했습니다.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성당 측은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재가를 얻어 11일 밤 사제 50명을 소집해 철야 농성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 농성의 과정에서 비폭력의 도덕적, 영적 권위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사제와 수녀들이 위태로운 순간마다 농성대와 경찰 사이 최전방 대치선으로 나아갔습니다. 13일 새벽, 무력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전날인 12일 저녁, 공권력 투입을 통보하던 정부 고위 당국자를 향해 김 추기경은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가서 내 말을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해주시오. 공권력이 투입되면 내가 맨 앞에 누울 테니 나를 밟고 넘어가시오. 그다음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오. 그들을 모두 밟고 넘어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독재정권의 폭력적 공권력을 완전히 압도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쟁취한 민주주의 성당 내부의 결사 항전은 담장 너머 시민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고립과는 달리, 1987년의 명동은 수많은 목격자와 지지자를 양산했고 도심 한복판이 거대한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해방의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6월 15일,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의 끈질긴 설득 그리고 극단적인 유혈사태를 피하려는 정부의 부분적인 양보로 명동성당 농성대는 자진 해산했습니다. 농성은 끝났지만, 투쟁의 무대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항쟁의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고,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처럼 폭력 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범국민적인 저항의 불씨가 전국을 휘감았고, 국제사회의 압박, 특히 전두환 정권의 군 투입 불가와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의 뜻이 전달됐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있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의원은 이른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즉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그 골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전면 수용을 비롯한 8개 항의 민주화 조치였습니다. 7월 1일 전두환이 이 수습안을 공식 수용함으로써 국민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주권을 되찾게 됐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된 진실의 씨앗이 6개월간의 혹독한 겨울과 투쟁의 봄을 거쳐, 마침내 6·29라는 민주주의의 결실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여정의 한가운데, 한국 천주교회가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5)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박종철 군 사건 진상은 조작 - 정의구현사제단은 5월 18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전(前)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문화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가 아니라, 학원문화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경장 이정오’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광주사태 7주기 추모미사’ 후 이같이 밝힌 사제단은 ▲조한경 경위는 반장으로서 박종철 군에 대한 신문(訊問)을 담당한 3명(황정웅, 방근곤, 이정오)에게 ‘말 안 하면 혼내주라’는 말만 하고 고문실을 나왔으며, 한 시간쯤 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박종철 군은 이미 늘어져 있었다. ▲강진규 경사는 1반 반원이 아니며, 강 경사가 소속된 반에서 찾고 있는 학생에 대해 박종철 군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 방에 갔을 뿐이라며 두 사람은 직접적인 고문살인의 주범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또 사제단은 ‘경찰은 당초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조 경위에게만 지휘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려 했으나, 여론의 빗발치는 진상 조사 요구에 의해 고문치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인만은 계속 조작, 조 경위와 강 경사에게 덮어씌우고 있다’며 ‘범인 조작은 1월 17일 이후 두 경찰관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최초로 이뤄지고 같은 상황하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5월 24일 1면) 다시 불붙는 민주화 운동 광주의 비극으로 시작된 1980년대,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과 교황 방한으로 주춤했으나, 1980년대 후반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과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사제단은 1985년 6월 6일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 학원 문제, 언론 자유 침해 등 시국 전반에 걸친 독재 정권의 비민주성을 질타했습니다. 국가 폭력과 공안 정국 1985년 8월, 정부는 학생운동권과 민주화 세력을 영장 없이 ‘순화 교육’ 시킬 수 있는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을 시도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를 ‘위험한 발상’이라며 명백한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8일자 1면 기사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최근 정부와 여당이 서두르는 ‘학원안정법’은 나라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하고 “학원안정법의 제정을 즉각적으로 철회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85년 하반기부터 1986년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폭증하는 등 본격적인 공안 정국이 조성됐습니다. 이 시기 국가 공권력의 타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86년 6월 발생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었습니다. 위장 취업했다가 연행된 대학생 권인숙에게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고문을 가한 만행이었습니다. 공안 당국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가해자를 비호하며 도리어 피해자를 구속기소 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교회는 여성계, 재야 단체 등과 연대해 ‘천주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폭력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 열망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1986년 3월 9일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 시국 미사 강론을 통해 “법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간선제 헌법의 반민주성을 비판했습니다. 이어 “불의를 저지른 이들은 그 불의를 인정해야 한다”며 정권의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임기 내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간구하는 9일 기도’를 전국 각 교구에서 바치기 시작했고, 개헌 서명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탁’ 치니 ‘억’,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촉즉발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 속, 1987년 벽두, 전국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물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황당한 변명으로 박 군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박 군의 억울한 죽음에 교회는 전 국민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가톨릭신문 1987년 1월 25일자 보도에 의하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1월 19일 성명을 발표해 이 땅에서의 고문 종식을 지향으로 1월 25일 미사 봉헌과 기도회를 전국 각 본당에서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성명서는 “말단 수사관의 우연한 실책으로 이 고문이 자행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박 군의 죽음을 계기로 고문 행위의 근본적, 필연적인 원인이 밝혀져야 하고 고문 종식을 위한 민족적 결단이 이뤄지길 촉구”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주일 정오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정부 당국은 이번만은 참으로 정부와 나라 전체의 공정을 위해 사건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호도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밝힐 것”을 촉구했습니다. 진실의 폭로, 6월 항쟁의 도화선 경찰은 조한경, 강진규 두 명의 수사관만을 구속하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으나, 진실은 감옥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습니다. 구속된 두 수사관이 남부구치소 안유 보안계장 등에게 추가 범인 3명이 더 있으며 치안본부 수뇌부가 이를 은폐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안유 계장은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민련(전국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부영은 비밀 쪽지에 내용을 기록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반출시켰습니다. 재야인사 김정남을 거친 이 쪽지는 최종적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마티아) 신부와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전달됐습니다. 감옥 안의 의로운 교도관들과 민주 인사들의 목숨을 건 릴레이가 진실을 성당의 제단 위로 밀어 올린 것입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미사 직후, 김승훈 신부는 제단 위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경찰의 조작극 전모는 물론, 은폐되었던 진범 3명의 이름까지 정확히 실명으로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는 독재정권을 엄청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고, 숨어있던 진범 3인과 조작을 지휘한 박처원 치안감 등 수뇌부가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거대한 국가 폭력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시킨 이 폭로는 다가오는 6월 민주항쟁을 향한 완벽한 기폭제가 됐습니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2) 가톨릭신문 속 ‘부활’

“축 예수 부활. 그리스도는 죽음과 구속으로 인류를 구하셨다. 우리는 이에 감사하여야 하며,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하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이를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 가톨릭신문은 창간 1주년이 되는 1928년 4월 1일자(제13호)에서 부활을 맞아 위와 같은 글을 실었다. 그리스도 부활의 본질적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톨릭신문은 창간 이후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활을 둘러싼 여러 변화와 교회의 상황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부활 날짜에 관한 보도가 대표적이다. 1960년 1월 3일자(제210호)에서는 “최근 새로운 달력 개정 운동이 일어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고정하자는 등의 논의가 있으나, 교황청에서는 공익상 필요성이 분명하다면 이 문제를 공의회에서 논의하겠다고 알려져 있다”고 전하고, 이후 기사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해당 안건이 다뤄졌음을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날짜 고정은 무산됐지만,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날짜 산정 방식, 유래 등을 설명하는 기사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부활 제2주일에 지내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정 당시의 배경과 의미도 상세히 다뤘다. 2002년 4월 30일자(제2198호)에서는 제정 계기가 된 ‘자비의 사도’ 성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시성과 성인의 자비 신심을 전했다. 2001년 4월 22일자(제2246호)에서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첫 시행을 기념해 당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조규만 주교(바실리오·원주교구장)의 기고를 통해 하느님 자비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고찰했다. 대면 미사가 중단됐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상황도 담았다. 2020년 4월 12일자(제3190호)에서는 대부분의 교구가 TV와 인터넷 등에서 성주간·주님 부활 대축일 전례와 미사를 생중계하기로 한 내용을 실었다. 2020년 4월 19일자(제3191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텅 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파스카 성야 미사를 주례했다”며 “코로나19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오랜 격리 생활로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했다”고 전했다. 2022년 4월 24일자(3221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약 5만 명의 신자들과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소식을 전달했다. 이처럼 가톨릭신문은 부활을 시대의 맥락 안에서 조명해 왔다. 올해 4월 5일자(제3485호) 사설에서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를 선택하고, 무관심과 혐오를 넘어 이웃의 아픔에 마음을 여는 자리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했다. 가톨릭신문은 앞으로도 시대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도록 그 여정을 함께 기록해 나갈 것이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4) 분단 후 처음 북한 땅에서 미사 봉헌

“분단 40년 만에 종교가 말살된 북녘땅 공산 치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미사성제가 봉헌됐다.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집전으로 봉헌된 북녘땅에서의 미사는 평양 방문 3일째이자 한국순교성인대축일 주일인 지난 9월 22일 오전 7시 20분경 숙소인 고려호텔 3층 제1영화관에서 봉헌됐다. 분단 40년 만에 남한의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한 지학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1945년 해방 직후 모든 성직자가 순교하여 40년간 미사성제가 없었던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하게 돼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면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분단 후 북한 땅에서 첫 미사 1985년 9월, 남북 관계의 경직된 장벽에 작은 틈이 생겼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방문단의 일원으로 당시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 역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실향민으로, 당시 북한 방문을 통해 누이동생 용화(당시 61세) 씨를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주일이었던 9월 22일 오전 7시20분경, 지 주교와 함께 15명의 고향 방문 단원이 함께한 평양 고려호텔 면담실 제1영화관은 임시 성전이 됐습니다. 여기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홍성철(미카엘) 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강성숙(로욜라) 수녀, 가수 하춘화(체칠리아) 씨 등이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의 주례로 거행된 이날 미사는 분단 이후 북한 땅에서 공식적으로 봉헌된 최초의 미사였습니다. 이날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었습니다. 불과 1년 전인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의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에 중단된 미사 가톨릭신문은 9월 29일자 1면에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어 7면에서 3박4일 동안 이뤄진 북한 방문 소식을 화보와 함께 전했는데, 특히 첫 미사를 집전하는 지 주교의 감격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평양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한 지주교는 미사 중 본기도를 바치다가 눈물이 복받쳐 약 2분간 미사가 중단됐다. 이날 미사가 마침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 미사인 데다가 전날 37년 만에 누이동생을 상봉한 여운 때문인지 지 주교가 ‘순교자’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더 이상 잇지 못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울어 미사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7면) 지 주교가 복받치는 감격에 소리 내어 울자 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흐느꼈고, 면담실은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지 주교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1백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감격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남한 신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고, 민족 화해를 위한 교회의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상징적 사건이 됐습니다. 교차 방문의 정치적 배경 감격적인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해빙된 남북 관계와 국내의 정치적 필요성이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1984년 남한에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하면서 북한이 구호물자 제공을 제의했고, 이를 정부가 수용하면서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후 화해 무드가 조성됐고 1973년 이후 중단됐던 남북 적십자회담이 재개됐으며, 이를 통해 교차 방문이라는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부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반도 긴장 완화가 절실했습니다. 나아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진 가운데,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1985년의 교차 방문은 최초의 이산 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성과인 동시에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와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남북한 당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멸공’에서 화해와 일치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교회 안에서도 분단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신학적 성찰이 심화됩니다. 북한에서의 첫 미사는 한국교회가 멸공에서 복음적 화해와 일치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남한 교회는 분단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멸공의 이념을 취해왔습니다. 통일은 북한 정권의 멸망과 교회의 수복을 의미했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현대 세계와의 대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됐습니다. 특히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진정한 평화는 대결이 아닌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을 얻게 됐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교회는 교회의 공식 사목 방침으로 민족 화해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의 과정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미 1982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를 발족한 데 이어 1984년에는 북한선교부가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된 뒤, 북한선교회로 명칭이 바뀝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5년에는 서울대교구와 각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멸공을 넘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교회의 확고한 사목적 지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85년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의 민족 화해를 위한 노력은 더욱 담대해집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평양에서는 장충성당이 준공되고 당시 신부였던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와 정의철(다마소) 신부가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10월 30일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지학순 주교와 달리 공식적인 교회 대표 자격으로 북한 땅을 밟은 두 신부의 방문은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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