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3) 「쇄신과 화해」, 한국교회 과거사 반성

“한국교회가 역사와 민족 앞에 200여 년 한국교회의 잘못에 대해 고백하고 참회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박정일 주교)는 12월 3일자로 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신앙으로 결합된 형제자매로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함께 고백하고 참회한다’며 ‘이러한 참회를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하려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서,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주교단과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의지 표현으로 평가된다.” (가톨릭신문 2000년 12월 3일 자 1면) 주교회의, 2000년 12월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 발표 7개 항목 걸쳐 포괄적 고백 담아…참된 용서 청원·쇄신 다짐 2000년 12월 3일,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기해 주교회의는 200여 년의 한국 교회사 안에서 교회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 문건인 「쇄신과 화해」를 반포했습니다. 이 문건은 한국 주교단 전체 명의로 발표됐고, 각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동시에 거행된 참회 예식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기억의 정화’ 이처럼 한국교회가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보편교회가 추진한 ‘기억의 정화’라는 신학적 쇄신 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4년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를 발표했는데, 33항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하여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에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교황의 권고는 2000년 3월 12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용서 청원 예식’을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교황은 종교재판과 폭력, 십자군 전쟁, 교회 분열, 유다인 박해, 여성 및 소수자 차별 등 7개 범주에 걸친 교회의 과오를 하느님과 인류 앞에 고백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식민 통치와 분단이라는 고유한 역사적 지평 안에서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성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부여받게 됐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 군부독재 시기 의문사 규명 등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했습니다. 이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교회는 군사 독재 시절 인권 수호에 앞장서 양심의 보루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역사적으로는 식민지 시기 일제의 군국주의 전쟁에 협력하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독립운동을 배척했던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었습니다. 특히 1909년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살인 행위’로 규정하여 단죄했던 사건은 교회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역사적 멍에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 담론 형성에 소극적이었던 점, 그리고 급격한 교세 팽창 과정에서 나타난 성직자 권위주의와 중산층화 역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었습니다. 포괄적 고백 양식으로 최종 결정 이 문건은 역사학계와 신학자들의 전문 연구, 그리고 주교단의 심의 과정에서 빚어진 신학적·정치적 긴장을 수렴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1999년 1월부터 참회 문건 작성의 필요성이 본격 제기됐고, 2000년 3월 교황청의 용서 청원 예식을 기점으로 작업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주교회의 역사신학위원회 산하 전문 소위원회가 마련한 초기 문서안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기반해 과오의 주체와 구체적인 사건명을 가감 없이 명기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초안에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 함대의 내항을 안내하거나 편승한 행위,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 안중근 의사에 대한 종부성사 집전 금지 및 살인자 규정, 3·1운동 당시 신학생들의 참여 제재, 1930년대 후반 교황청 훈령을 방패 삼은 신사참배 적극 권유와 일제 전시 동원 체제 순응,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및 역대 군사독재에 대한 보신주의적 침묵 등이 구체적인 고유명사로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 10월 추계 정기총회와 11월 9~10일 주교회의 임시총회에서 주교단은 초안을 전면 재검토하여, 구체적인 역사 사건명을 삭제하고 교황의 용서 청원 양식과 같은 7개 항목의 포괄적 고백 양식으로 문건을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수정된 전문이 11월 임시총회에서 통과되어 12월 3일 최종 공개된 것입니다. 「쇄신과 화해」, 무엇을 담았나 「쇄신과 화해」는 도입부에서 대희년의 의미와 제삼천년기를 맞이하는 교회의 정화 필요성을 밝힌 뒤, 본론에서 7개 항에 걸친 과오를 고백하고 결론부에서 참된 용서 청원과 미래 쇄신의 다짐을 천명했습니다. 7개 항 중에서 앞부분의 3개 항은 박해 시대와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를 역사 순으로 다뤘습니다. 1항과 2항은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수호를 구실로 외세에 의존하거나 일제 식민 통치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신자들을 단죄한 데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의 외세 의존, 황사영 백서 사건, 안중근 의사 단죄 등이 그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3항은 분단 상황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투철하지 못했던 점에 대한 반성입니다.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비극을 야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상흔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 과정에서 복음의 메시지와 민족의 염원에 바탕을 둔 활동을 얼마나 충실히 펼쳤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았습니다. 4항부터는 분야별 성찰로 이어집니다. 4항은 사회 안에 상존하는 갈등 해소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부족, 공동선 실현을 위한 노력이 미흡했음을 반성했습니다. 5항은 생명 경시 풍조에 맞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정 공동체의 가치를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과오를 고백합니다. 6항은 봉사자로서의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성으로, 특히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와 외형적·양적 성장에 치우쳤던 풍조를 깊이 성찰했습니다. 마지막 7항은 다종교·다문화 사회인 우리나라 안에서 타 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고백했습니다. 2000년 12월 3일 반포된 「쇄신과 화해」는 식민 통치 협력, 외세 의존, 분단 상황에 대한 침묵, 성직자 권위주의 등 200년 한국 천주교 역사 속 구조적 과오를 겸허하게 고백한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구체적인 사건과 인명을 적시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자신의 과오를 공식 인정하고 ‘기억의 정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2) 교구 시노드 봇물

“인천교구가 교구 대의원회의를 개막, 2000년대의 새로운 복음화를 모색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희망과 쇄신을 향해 나아갑시다’를 주제로 한 인천교구 대의원회의는 6월 6일 오후 2시 주안 3동성당에서 거행된 개막미사와 총회를 시작으로 2000년 9월 3일 폐막까지 1년 3개월간 교구의 목표와 현실을 점검하고 새복음화, 재복음화, 사회복음화의 기치 아래 2000년대 사목방향을 결정한다.”(가톨릭신문 1999년 6월 13일자 1면) “수원교구가 새로운 세기를 여는 대희년을 맞아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해 보는 교구 시노두스(대의원회의)를 개막했다. … 수원교구는 이날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오는 2000년 12월 3일까지 교구 공동체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교회 기초 공동체 활성화’, ‘자율적인 젊은이 신앙생활’ 등 두 의안에 대한 새로운 방향점을 설정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는 시노두스를 개최하게 된다.”(가톨릭신문 1999년 7월 25일자 1면) 2000년대 새로운 복음화 모색, 전국 교구 시노드 잇따라 개막 사회 변화 속 사목적 한계 성찰… 교회 구조·의식적 변화 이끌어 대희년 앞둔 교회의 쇄신 노력 2000년 대희년을 앞둔 한국교회는 새로운 교회로 변화하기 위한 보편교회의 노력에 동참하면서, 새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고 참된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쇄신 노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교구 시노드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1999년은 이러한 교구 시노드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해였습니다. 우선 6월 6일에는 새복음화, 재복음화, 사회복음화를 기치로 2000년대 사목 방향을 결정할 인천교구의 시노드가 개막됐습니다. 이어 7월 17일에는 수원교구가 ‘새로운 복음화의 길 찾기’를 대주제로 시노드 개막미사를 거행했고, 1997년 개막된 대구대교구 시노드가 10월 10일 폐막됐습니다. 그리고 대희년이 시작된 2000년에는 서울대교구가 시노드를 개막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교구 시노드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청주교구는 2008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두고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시노드를 개최했고, 대구대교구는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제2차 교구 시노드를 개최했습니다. 대전교구도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며 새로운 사목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새 시대의 도전과 자기 성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은 전례 없는 사목적 성찰과 구조적 전환이 일어난 중대한 시기였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구가했던 한국교회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사회가 세속화, 다원화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양적 팽창 이면에 가려져 있던 내적 빈곤과 사목적 한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세 성장 둔화, 주일미사 참례율 감소, 냉담 교우의 양산과 성사 생활 참여의 저하, 그리고 기복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 행태 등 복합적인 위기 징후들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과거의 수직적 사목 방식으로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할 수 없다는 자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성찰은 보편교회의 흐름과도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가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새로운 복음화를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이라는 역사적 기점은 교회가 하느님 백성 전체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교구의 미래 비전을 공동으로 식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교구 시노드의 결실과 한계 시노드를 통해 각 교구는 고유한 사목 환경과 여건에 맞춰 자기 쇄신을 위한 방안과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사목 정책을 수립해 나갔습니다. 특히 1990년대 말 집중적으로 열린 교구 시노드들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구조적, 의식적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논의하고 ‘담대한 경청’을 하는 것이 교회의 본래 운영 방식임을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성직자 중심의 일방적이고 하향식의 지시와 순명에 익숙했던 신자들은 시노드 여정을 거치며 “하느님 백성의 상처 입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식별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첫 번째의 성과와 깊이 연결되는 것으로서, 평신도들의 위상 제고와 사목 참여 구조의 실질적 확대였습니다. 시노드 과정 자체에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평신도 대의원들이 동등한 하느님 백성의 자격으로 한자리에 모여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숙의한 경험은, 한국교회 내에 강렬한 시노달리타스의 체험으로 남았습니다. 셋째, 소공동체 사목의 전면 도입은 모든 교구 시노드에서 공통적으로 평가됐습니다. 시노드에서 강조된 사목 방향 가운데 하나도 소공동체 활성화였습니다. 이전까지 한국교회의 본당 조직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 행정 단위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시노드를 기점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의 교회론을 바탕으로 본당을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재규정하는 신학적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넷째, 청소년 사목이 교회의 주변부에서 핵심적 사목 의제로 승격됐다는 점입니다. 수원교구는 아예 젊은이를 핵심의제로 삼았고, 인천교구는 청소년·청년 영역을 세분화했으며, 서울대교구는 청소년·청년을 동등한 현재의 교회 구성원으로 보도록 명시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선제적 체험 교구 시노드들이 해당 교구의 미래 비전을 모색하고 교구를 새로운 면모로 일신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여전히 남은 과제와 한계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풍성한 논의와 결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고 구조적이며 제도적인 후속 작업을 통해 성과를 가시화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말 집중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교구 시노드의 체험은 외적 팽창과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한계에 부딪힌 한국교회가 복음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자기 존재의 근거를 신학적으로 재정립하고자 했던 각고의 노력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보편교회의 화두인 시노달리타스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200주년 사목회의, 그리고 특히 교구 시노드들을 통해서 선제적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1) ‘새로운 양 찾기’, 대규모 선교운동 확산

“전 신자가 조직적, 체계적으로 전교에 나서 큰 성과를 거둔 본당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인천교구 만수1동본당(주임 김병상 필립보 신부)이 지난 4월부터 본당 사목협의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양 찾기」 운동을 펼쳐 6월 25일 오후 2시 470여 명의 입교 희망자와 인도자, 본당 신자 등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모임을 가졌다. 이날 입교식 행사를 한 예비자들은 모두 42개 반으로 나눠 각 반당 1명의 봉사자가 이끄는 10명 내외의 소공동체로 조직, 영세 때까지의 제반 신앙생활을 안내하게 된다. 특히 내년 1월로 예정된 영세식까지 6개월간의 예비자 교리교육을 기존의 예비자교리 교육 방식이 지닌 단점을 보완하는 소공동체 형식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본당 전 신자가 기도운동과 함께 전교 활동의 일환으로 펼친 「새로운 양 찾기」 운동은 본당 단위의 전교 활동의 한 모범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가톨릭신문 1995년 7월 2일자 14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성장률의 급격한 둔화와 냉담자 증가라는 구조적 위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천주교회는 민주화 운동과 사회 정의 구현에 적극 참여하며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이후 세속화, 물질주의의 확산, 그리고 본당 구조의 대형화 및 중산층화 현상이 맞물리면서 신영세자 수의 증가율이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냉담 교우의 비중과 주일미사 불참률이 치솟았습니다. 인천교구 만수1동본당 선교운동, 적극 참여 속 신영세자·예비신자 대거 배출 대규모 선교운동 전국으로 확산… 한계도 있지만 선교 패러다임 전환 이끌어 둔화된 성장과 치솟는 냉담률 가장 직접적인 배경은 신자 증가 속도의 둔화였습니다. 1980년대 한국교회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7% 후반대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1996년과 1997년에 이르러서는 각각 약 3.2%에 머물렀습니다. 냉담자와 거주불명자는 전체 신자의 4분의 1에 달했습니다. 이같은 현상의 밑바탕에는 선교 의식과 문화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조용하고 엄숙하며, 개인의 영성 생활을 중시하는 ‘점잖은’ 태도를 미덕으로 삼아왔습니다. 이는 개신교의 적극적 선교 방식과 대비되는 동시에, 비신자들에게 능동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소극성과 폐쇄성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선교의 위기가 대두되면서 천주교회도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복음 선포 활동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인천교구 만수1동본당을 시작으로 전국에 폭발적으로 확산된 ‘새로운 양 찾기’ 및 ‘잃은 양 찾기’ 운동이었습니다. 만수1동본당의 혁신적 선교 활동 1994년 하반기, 만수1동본당에서 시작된 혁신적인 선교 운동은 냉담 신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주임 김병상 신부의 사제 은경축을 맞아 물질적 선물 대신 냉담 신자를 다시 공동체로 모셔 오는 영적 예물을 봉헌하자는 제안이 계기가 됐습니다. 만수1동본당은 1994년 12월, 냉담교우들의 회두를 목표로 한 제1차 ‘잃은 양 찾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체계적 방문과 꾸준한 관심, 편지 보내기 등을 통해 냉담자의 행적을 파악하고 이들을 영성표에 재입적시킴으로써 판공성사 참례율을 65%까지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를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1995년 2월, 비신자를 대상으로 한 제1차 ‘새로운 양 찾기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그 결과 1차 운동을 통해 481명의 신영세자를 배출했고, 2차 운동에서는 600여 명이 입교해 단 두 차례의 집중 선교만으로 1000명이 넘는 예비신자를 배출했습니다. 선교운동의 전국적 확산 만수1동본당의 성과는 가톨릭신문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보도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돼, 20여 개 이상의 본당이 각자의 사목적 여건에 맞추어 이 운동을 도입했습니다. 군포본당의 경우 단 한 차례의 운동으로 1195명의 예비자를 입교시키는 성과를 냈고, 청주교구와 인천교구 등은 교구 차원의 장기 복음화 계획과 연계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대구대교구 이판석(요셉) 신부 등이 주도한 ‘가두선교’ 및 ‘방문선교’ 모델과 결합하면서 더 큰 효과를 냈습니다. 가두선교단이 제작한 안내 책자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는 8년간 전국 900여 개 본당과 150여 개 단체에 보급돼 330만 부 이상 발행되는 기록을 세웠고, 330개 본당에서 5만 5000명 이상이 가두선교 연수를 수료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대규모 선교운동의 성과 ‘새로운 양 찾기’ 운동이 가져온 가장 일차적이고 눈에 띄는 성과는 신영세자 수의 비약적 증가였습니다. 대부분 본당에서 적게는 2~3배, 많게는 5배 이상의 신영세자를 배출했습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은 침체 일로를 걷던 교세 성장률에 일시적 반등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1998년과 1999년의 전체 입교자 수 증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양적 성과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신자들의 의식 변화였습니다. 외적 신앙 표현을 쑥스러워하던 신자들이 이 운동을 체험하면서 능동적 선교 주체로 거듭났습니다. 선교 활동에 앞서 전개된 기도 운동과 성경 공부는 느슨했던 영성을 재무장시켰고, 이웃에게 교회를 알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영적 쇄신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비판적 평가와 한계 1990년대 말 폭발적인 열기 속에서 추진되었던 대규모 선교운동은 수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열기가 잦아들었고, 이벤트성 선교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제기됐습니다. 가톨릭신문은 1998년 ‘전교의 달’ 기획 특집에서 다음과 같이 그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상당한 인력과 재정이 투여돼야 하는 한시적 운동으로서 선교 의식의 진작을 위한 초기 단계의 선교 전략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삶의 전체를 통해 수행해야 하는 의무인데 이같은 한시적 운동이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두 번째는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영세를 할 경우, 예비자 교리교육이나 영세 후 신앙생활이 충실하게 이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세 번째는 대개 본당들이 생활 수준, 신자 계층 분포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새로운 양 찾기를 사목 환경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사례 연구가 필요하다.”(가톨릭신문 1998년 10월 18일자 16면) 이처럼 비록 한계와 부작용이 지적되기는 했지만, 한국교회 초유의 이 대규모 선교운동은 ‘찾아 나서는 교회’로의 선교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낸 의미 있는 사목적 시도였으며, 신자들에게 선교 열정을 불어넣은 큰 계기가 됐습니다.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0) 한국 현대순교자 215명 선정

“한국전쟁 등 격변기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신앙과 양심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의 ‘현대 순교자’들의 명단이 작성됐다.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12월 1일 회의를 갖고 사무처가 교구와 수도회, 대한성공회 등의 자료를 모아 마련한 한국 ‘현대 순교자’ 215명의 명단을 영문으로 작성, 로마로 보내기로 했다. 교황청 2000년 대희년위원회 새 순교자 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이 명단은 로마에서 전 세계 교회의 명단을 모두 모아 대희년에 맞춰 ‘현대 순교록’으로 작성된다. 이번에 작성된 목록은 성공회 6명 외에 209명이 가톨릭이며 개신교는 포함돼 있지 않다.”(가톨릭신문 1998년 12월 13일자 1면) 제삼천년기와 새로운 순교의 시대 한국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성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20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번 박해와 순교의 시대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하고 참혹한 종교 박해가 자행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공산주의와 파시즘 등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의 독재 정권과의 충돌 등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피로써 신앙을 증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며 발표한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를 통해 “제2천년기 말에 와서 교회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의 교회가 되었다”고 천명하며, 전 세계 지역교회가 20세기에 피 흘린 신앙의 증인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영원히 기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을 통해 103위 순교 성인이 시성됐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124위 순교 복자가 시복되는 등 초기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 작업이 괄목할 만한 결실을 봤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에 대한 조사가 상대적으로 미진하다는 교회사적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교황청의 요청에 부응해 1997년부터 20세기 순교록 작성을 위한 공식 조사에 착수했고, 이듬해인 1998년 12월 1일 상임위원회에서 첫 번째 결과물인 한국의 ‘현대 순교자’ 215명의 명단을 확정하고, 12월 4일 이를 교황청에 제출했습니다. 이후 조사가 계속되면서 1999년 8월 25일과 12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6·25 전쟁 당시 희생자 24명이 추가로 제출됐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가 대희년위원회 새 순교자 위원회에 제출한 ‘현대 순교자’는 모두 23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현대 순교자 시복 추진 이 명단은 주로 6·25전쟁과 제주교난 당시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하되, 성공회 신자 6명이 포함돼 있었고 개신교 신자들은 포함돼 있지 않았습니다. 1998년 당시 이 명단은 완결된 것은 아니었으며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순교자들이 추가되거나, 명단에 포함돼 있던 이들 중 자격 조건에 못 미치는 경우 제외될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명단에 포함된 215명 중 한국인이 162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외국인은 53명이었습니다. 독일 출신이 가장 많아 29명이었고, 프랑스 13명, 아일랜드 6명, 미국 3명, 벨기에 2명 등이었습니다. 평신도가 절반이 넘는 121명이었고, 사제 57명, 남녀 수도자 26명, 주교 3명, 신학생 2명이었습니다. 천주교 소속 209명을 살펴보면 수도회 소속 순교자의 희생이 두드러집니다. 성 베네딕도회가 33명으로 가장 많으며, 파리외방전교회가 12명,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8명을 기록했습니다. 수녀들의 경우에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4명,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3명,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와 가르멜 수녀회가 각각 2명, 메리놀 외방 전교회 1명입니다. 특별히 외국인 선교사 53명 중 독일인이 29명으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는 덕원과 원산, 함흥 등 북한 지역에 진출하여 활동하던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공산 정권의 집중 표적이 되어 수용소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이 명단은 크게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첫째는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제주교난) 당시 희생된 51명의 천주교 신자입니다. 제주교난은 무속 신앙과 지역 토착 세력, 봉세관의 조세 수탈에 반발하는 민중의 불만이 일부 천주교 신자들의 폐단과 얽혀 발생한 대규모 민란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약 600여 명의 신자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둘째는 6·25전쟁 전후 북한 공산 정권과 남침한 인민군 그리고 좌익 세력에 의해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한 희생자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정치적 피해자가 아니라 유물론적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미 반동 세력’이나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매도되어 죽임을 당한 전형적인 현대 순교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순교자 시복 시성 본격 추진 1998년 현대 순교자 명단 작성은 한국교회 차원의 시복시성 추진과는 구별됩니다. 이는 보편교회가 대희년을 맞아 ‘신앙의 증인’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사업이었고, 한국교회는 이를 계기로 현대 순교자에 대한 교회법적 시복시성을 추진하게 됐습니다. 주교회의는 2007년과 2009년 정기총회를 거쳐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에 대한 시복 조사를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관할하여 통합 추진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와 함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한국 진출 100주년을 두 해 앞둔 2007년, 덕원과 함흥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희생된 소속 수도자들의 시복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의 현대 순교자 명단은 주교회의 통합 추진 과정에서 순교를 입증하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2012년 최종적으로 81명으로 크게 압축됐고, 이듬해 3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라는 안건명이 승인됐으며, 2015년 8월 사진과 명단이 공개됐습니다. 특히 제주 신축교안 희생자 51명 중에서는 단 1명이 남고 모두 제외됐는데, 이는 신축교안이 복합적 요인이 얽힌 민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희생자들의 사망 동기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교회의가 통합 추진하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과 성 베네딕도회가 추진하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 안건이 각각 정식 시복 추진되기 시작했고, 현재 한국교회 차원의 심사를 마치고, 교황청의 심사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9) 양업시스템 개통

“서울대교구가 교회 역사상 최초로 교구 전체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한 종합정보시스템 ‘양업시스템’을 개통, 교회 정보화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서울대교구는 … 9월 20일 오전 11시30분 ‘천주교 서울대교구 종합정보시스템’ 개통식을 가졌다. 양업시스템은 서울대교구 교구청과 산하 각 본당, 기관을 네트워크로 연결한 종합정보시스템으로 1년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이날 정식 개통했다. 이번 종합정보시스템 개통은 정보 사회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 대응으로 그동안 다소 뒤처진 감이 있던 한국교회 전체의 전산화, 정보화 사업 추진이 가속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네트워크의 구축에서부터 그룹웨어, 교구 및 본당 행정 프로그램, 인터넷 홈페이지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발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 타교구 및 전체 한국교회 정보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가톨릭신문 1998년 9월 27일자 1면)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정보사회로 진입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특히 1994년 정보화 정책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가 이뤄진 것이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PC통신이 1980년대 후반부터 대중화되었는데, 1997년 이후 초고속 인터넷 보급으로 빠르게 인터넷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90년대 말, 이미 정보사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한국 사회 안에서 교회는 정보화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양업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양업’ 시스템의 명칭은 두 번째 사제이자,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던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종합전산화 구상인 ‘모세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한국교회의 정보화는 1998년 전 세계 가톨릭 최초의 단일 교구 행정망인 ‘양업시스템’ 개통, 2008년 전국 단위의 ‘통합 양업시스템’ 구축을 거쳐, 2026년 현재 인공지능(AI) 기반의 ‘성 가롤로 아쿠티스 프로젝트’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정보화 시대에 맞춰 행정·사목·선교 네트워크 구축 1998년 서울대교구 개통 이어 통합 시스템에 전국 교구 참여 한국교회 유기적 연결 체계로 독창적 ‘디지털 복음화‘ 이끌어 사목 행정 전산화의 모태, 모세 프로젝트 한국 천주교 사목 행정 전산화의 체계적인 출발점은 1995년 4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발표한 종합전산화 사업 ‘모세 프로젝트’입니다. 당시 정보화 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주교회의 사무처 특별기구인 ‘가톨릭 사목행정 발전위원회’와 ‘한국가톨릭전산원’ 등이 공동으로 이 청사진을 수립했습니다. 모세 프로젝트는 단순한 사무 전산화를 넘어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IT 기술을 통해 확장하려는 3단계 중장기 발전 전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단계는 전국을 하나로 잇는 종합행정망 및 표준 행정서비스의 완성, 2단계는 전국 신자 및 사목 정보 DB 구축과 사목·선교 정보 서비스 운용, 그리고 3단계는 멀티미디어 서비스 제공 및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인적, 물적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사실상 무산됐고, 교회 정보화는 멀어진 듯했습니다. 전산화, 정보화의 초기 투자비가 엄청났지만 눈에 띄는 사목적 성과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 프로젝트는 한국교회 최초로 행정 관리, 사목 활동, 선교 사업의 표준화를 도모하고 체계적인 교회 정보화를 시도한 첫 사례였고, 이후 ‘양업시스템’을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양업시스템의 출범 수년 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던 교회 정보화가 획기적인 진전을 이룬 것은 1998년 서울대교구의 양업시스템 개발이었습니다. 1997년 당시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이었던 염수정(안드레아) 신부를 중심으로 ‘사목행정 발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의 기술 및 자금 후원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실로 1998년 9월 20일, 서울대교구는 교구청과 전체 본당 및 산하 기관을 단일 네트워크로 연결한 종합정보시스템인 ‘양업시스템’을 세계 가톨릭 최초로 정식 개통했습니다. 양업시스템의 도입은 교회 행정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종이 교적 및 필기식 장부에 의존하던 신자 관리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로 전환되었고, 교무금 자동이체, 전자문서 유통 등 각종 행정 처리가 온라인으로 가능해졌습니다. 나아가 서울대교구는 선교의 지평을 넓히고자 가톨릭 포털 ‘인터넷 굿뉴스’를 함께 개통하여, 인터넷을 통한 미사 중계와 신앙 정보 제공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로써 서울대교구는 한국교회 정보화 사업에 획기적인 선례를 남겼으며, 그 기술력과 경험은 다른 교구의 정보화 추진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후 각 교구에 양업시스템이 속속 도입되었고, 이는 전국 모든 교구의 행정 전산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목 행정 표준화 완성과 통합 양업시스템 구축 1998년 이후 교구별로 독립적인 전산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데이터의 중복이나 처리 기준의 상이함 등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사목행정표준화위원회’를 구성, 사목 행정 문서와 회계 원칙 등의 통일 작업이 추진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업시스템이 개발되었으며, 마침내 2008년 9월 전국 대다수 교구가 참여하는 ‘통합 양업시스템’이 정식으로 가동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2008년 10월 5일자 통합 양업시스템 개통 해설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전했습니다. “개통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한국교회 종합정보화 시스템 ‘통합 양업시스템’은 전산 체계상의 통합 뿐 아니라 사목 행정 체제의 일관성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각 교구가 독자적으로 그물을 쳐 물고기를 낚아 왔다면 이제는 13척으로 이뤄진 대선단이 서로 협력해 그물을 치는 형국인 셈이다.”(가톨릭신문 2008년 10월 5일자 19면) 정보화는 사목을 지향한다 한국교회는 세계 가톨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이고 선도적인 사목 행정 전산화 모델을 구축해 왔습니다.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작된 교회 정보화 사업은 단순한 본당 업무 자동화를 넘어, 전국 교구를 하나의 유기적인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거대한 디지털 복음화 네트워크로 발전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올해 5월 인공지능(AI) 시대에 맞춰 교구 정보 시스템 전반을 사목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성 가롤로 아쿠티스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정보화를 통해 보유한 본당양업, 교구양업, 그룹웨어, 굿뉴스, 하상앱 등 다양한 정보 자산의 활용을 사목에 집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6개월간의 컨설팅 후 3~5년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할 계획입니다.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8) 범교회적 ‘금 모으기’ 운동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단체 대표와 106개 시민, 소비자, 종교, 농민 단체 등이 참여하는 외채 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이 1월 12일 본격 가동됐다. 김수환 추기경과 송월주 스님, 서영훈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한국소비자연맹 정광모 회장 등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명동 YWCA 강당에서 외채 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발대식을 갖고 장롱 속에서 사장되고 있는 금을 모아 국가 외환위기를 극복하자는 운동에 돌입했다.”(가톨릭신문 1998년 1월 18일자 1면)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의 붕괴 1997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단순한 금융 시장의 유동성 부족 사태를 넘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일시에 폭발한 전대미문의 국가적 재난이었습니다. 외환 보유액 고갈로 인한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한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초고금리 정책, 강도 높은 긴축 재정과 노동 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금융·기업 부문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이 강요됐고, 이는 실물 경제에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8년 한 해에만 2만4000여 개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자 수가 200만 명을 상회했습니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극빈층이 양산되었으며, 경제적 빈곤은 가정 해체와 생명 경시 풍조로 이어졌습니다. 실직과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한 가장들의 투신자살, 부모의 실직을 비관한 청소년들의 동반 자살, 급격한 이혼율 증가와 결식아동의 양산 등 이른바 ‘IMF형 사회 병리 현상’이 사회 전반을 뒤덮었습니다. 교회의 새로운 소명 이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수호했던 한국교회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경제 폭력에 의해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하고 붕괴된 공동체를 복원하는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은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던 물질주의, 과소비, 허위의식에서 찾았습니다. 교회는 위기의 본질을 ‘가치관의 위기’로 규정하고, 위기 극복 노력이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삶의 양식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파탄 위기에 처한 국가 경제난을 극복하자는 적극적 선택에 나섰다.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는 최근 경제난 극복을 위한 노력으로 고급 스포츠와 해외여행의 자제, 과소비 근절, 우리 상품 애용 등을 촉구하는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마련, 전 교회 차원의 경제난 극복 운동에 돌입했다. … 신자들의 동참 또한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가톨릭신문 1998년 1월 11일자 1면) 신자유주의 국제 경제 구조의 비판 한국교회는 개인의 도덕성 회복에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인 국제 경제 구조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당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석희(이냐시오) 주교는 IMF 1주년을 맞아 「위기를 기회로 삼읍시다」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담화는 위기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고도성장 위주 경제 정책, 정경 유착에 따른 관치 금융, 기업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중복 투자 그리고 각자의 도덕적 불감증”에서 비롯됐다며 위기의 근본 원인은 “경제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정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담화는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맹목적인 자유시장경제 체제와 투기적 국제 자본의 횡포에서 위기의 외부적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어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무한 경쟁으로 개도국과 중진국 경제는 물론 인간과 자연의 파멸을 강요하는 비인간적 체제를 유발하고 있다”며 “자유경쟁을 강조하며 약자의 고통을 외면했던 자유주의에 대응해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듯 신자유주의 물결이 새로운 전체주의나 과격주의의 온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 이끈 한국교회… 종교계와 함께 위기 대응 교회 공적 책임 다해… 사회복지 전반적 역량 이정표 구축 금 모으기 운동으로 자신감을 한국교회의 IMF 외환위기에 대한 대응은 초기에는 위기 극복을 위한 기도운동과 금 모으기 그리고 인식과 삶의 변화를 위한 실천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실직과 빈곤, 가정 해체 문제에 대응하는 사회복지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국민이 보여준 집단적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외채 상환 금 모으기 운동’이었습니다. 39억 달러까지 곤두박질친 가용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기 위해 장롱 속의 금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이 범국민적 희생 운동에서, 천주교회는 기획 단계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국적인 동참을 이끌어냈습니다. 1998년 1월 12일 오전 10시30분, 명동 YWCA 강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송월주 스님, 서영훈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등 종교계와 106개 시민사회단체 대표가 모여 ‘외채 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발대식’을 거행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신자들이 선물로 준 것을 모아두었던 금 142.58g을 헌납하며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종교계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은 집단적 패배감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위기 극복을 향한 강력한 도덕적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국민이 석 달 동안 모은 금의 총량은 227톤(약 22억 달러 규모)으로, 당시 1500억 달러에 달하던 총 외채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집단적 공포와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붕괴된 사회 안전망의 복원 외환위기가 남긴 가장 뼈아픈 상흔은 대량 해고로 인한 실업과 노숙의 급증이었습니다. 구조조정과 연쇄 부도의 칼바람을 맞은 가장들은 지하철역과 공원 등 거리로 내몰렸지만 이들을 보호할 국가의 복지 안전망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교회가 가장 먼저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실직자 지원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은 서울대교구 명동본당이 1998년 4월 13일 정식 개원한 ‘평화의 집’이었습니다. 가톨릭회관의 지하 주차장을 개조하여 실직자들을 위한 대규모 무료 급식 및 취업 상담 시설을 조성했습니다. 1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IMF 후유증이 장기화되고 실직자가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 2002년 7월 16일 폐원 미사를 봉헌할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운영됐습니다. 누적 이용 건수가 14만 2002건에 달했고, 매년 1500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위기 대응 1997년 시작돼 수년간 이어진 한국교회의 IMF 대응은 단순한 애국 캠페인 참여를 넘어, 한국교회가 사회적 위기에서 어떤 공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은 교회의 ‘상징 자본’(비물질적이지만 사회적 위계와 권위를 만들어내는 자원)을 드러냈고, 평화의 집을 비롯한 교회 내 본당과 단체, 시설 등의 실직자와 가정 지원 활동은 교회의 사회복지 역량을 시험했습니다. 그 결과가 모든 요구를 충족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이후 한국교회가 사회적 위기 대응에서 보여줄 수 있는 표준을 상당 부분 이 시기에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7) 남북 신자 첫 통일 세미나

“남북한 천주교 신자들이 분단 반세기 만에 만났다. 남북한 및 해외 천주교인들은 10월 30일 뉴저지 포트리시 힐튼호텔에서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역할’과 ‘남북 해외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 차례의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서 남측의 장덕필(니콜라오) 명동본당 주임신부와 손병두(요한 보스코)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국제분과위원장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 김유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각각 주제발표했다. 남북 참가자들은 일요일인 29일 뉴욕 소재 퀸즈한인성당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교민 신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최창무(안드레아)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 미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전제, ‘평양의 장충성당 교우와 남한과 해외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고 양측의 만남에 기쁨을 표시했다. 이어 차성근 장충성당 회장은 ‘북측 신자들은 미흡하나마 주일을 거룩히 지켜왔다’며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지만 여기에 그치지 말고 통일의 그날까지 함께 하기를 기원하자’고 인사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11월 5일자 1면) 1995년 뉴욕에서 역사적 만남 남북 천주교 신자 친교 이루며 체제·이념 초월한 형제애 나눠 분단 50년 만의 감격스러운 만남 1995년 10월, 분단 50년 만에 남한과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형제애를 나눴습니다. 남북 대표단은 28일 상견례와 만찬, 29일 공동 주일미사에 이어 30일 뉴저지 포트리의 힐튼호텔에서 통일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남한 천주교 인사들의 간헐적인 북한 방문은 있었지만, 남북한과 해외 천주교 신자들이 직접 모임을 갖고 통일을 위한 논의를 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당시의 감격적인 만남의 순간들을 가톨릭신문은 11월 5일자 1면 보도기사에 이어 3면에서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미국 뉴욕 퀸즈본당 주임 안상인(요셉) 신부는 “여기 특별히 반가운 손님들이 오셨다”며 “우리 모두 북한의 형제들을 뜨겁게 환영하자”고 인사했습니다. 이어 북한 장충성당 차성근 회장은 “해외 교우들에게 장충성당 교우들의 뜨거운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만남에서 특히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노인들은 북측 참가자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 새삼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황해도 출신 신자들은 앞다퉈 북한 신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북한 신자들은 미사에 앞서 안상인 신부에게 북에서 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기도서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열린 만찬에서는 남과 북의 신자들이 함께 식사하며 일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자들은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되자 서로의 어깨를 껴안고 정을 나눴고,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리랑, 도라지 등 남북한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우리 민요를 열창했습니다. 남북 교류와 인도적 지원 물꼬 터 1995년은 통일과 민족화해 분야에서 큰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해였습니다. 서울대교구가 3월 1일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키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교회의 사목적 인식에도 중요한 전환이 이뤄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을 침묵의 교회나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대화와 화해를 통해 일치를 이뤄야 할 상대로 여기게 됐습니다. 주교회의도 1999년 기존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꾸고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남측의 민화위와 북측의 조선천주교인협회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마침내 뜻깊은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당시 세미나는 학술 토론 자체보다 단절됐던 남북 교회 구성원들이 공식적으로 만나 끊어졌던 관계를 잇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북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함으로써 향후 남북 간의 인도적 지원과 인적 교류를 상설화하는 공식적인 고리를 만들어내는데 그 참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측에서는 최창무 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를 포함해 7명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위원장(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과 차성근 회장(평양 장충성당 회장) 등 5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습니다. 해외 대표단은 박창득 신부(아우구스티노·미주 교포 사목부 총대리) 등 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신뢰 구축·교류 위한 대화로 남측 사제단 공식 방북 성사 민족화해 사목 지속 기반 마련 통일세미나의 성과와 영향 1995년의 뉴욕 세미나는 일회적인 교류에 그치지 않고, 남북 천주교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1년 반 뒤인 1997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는 제2차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베이징 세미나는 일회성 만남을 넘어 지속 가능한 교류와 민족화해 노력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실무적 성격의 대화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방북 추진과 이에 앞선 남측 관계자의 방북, 명동성당과 장충성당의 자매결연, 상호 방문 등이 논의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구축된 신뢰를 바탕으로, 1998년 5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최창무 주교 등 7명으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의 공식 방북이라는 역사적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북측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의 공식 초청으로 성사된 이 방북에서 남한 사제단은 평양 장충성당에서 북한 신자들과 함께 직접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분단 이후 한국 주교가 사목적 목적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첫 사례가 됐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0년 6월까지 서울대교구 민화위를 통해 총 78억 3000여만 원에 달하는 식량과 긴급 구호 자금이 북한 수재민과 취약계층에 전달됐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 1995년 남북 가톨릭 신자 간의 첫 공동 세미나는 단지 50년 만의 악수나 일회성 만남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남한교회가 북한 가톨릭 공동체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공식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으며, 남한교회 내부에 지속적인 민족화해 사목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026년 7월 현재 한반도는 분단 81년, 6·25전쟁 정전 73년을 맞이했지만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대화 채널이 전면 단절된 극단적인 경색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북한은 2024년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데 이어 2026년 개헌에서는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영토 조항을 신설하는 등 ‘두 국가’ 노선을 명확히 제도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실천적이고도 다각적인 화해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주영(시몬) 주교는 2025년 8월 15일 발표한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에서 “불신과 미움 속에서 무기와 군사력을 방패 삼아 상대를 굴복시켜 얻은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북한 동포를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호혜적 협력에 기반한 교류를 지지하며 함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6) 역사상 첫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6월 6일 오전 8시 명동성당 내에 농성 중이던 장현일 쟁의실장 등 한국통신 노조원 6명에 대한 경찰의 기습적 구속 연행으로 한국교회 사상 첫 공권력 투입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명동본당 사제단은 ‘현 정부는 2000년 동안 지켜온 교회의 관례법을 침해했다’고 규정하고 ‘2~3일 내로 사제단회의 소집을 요청하고 서울대교구 차원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사제단은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5공과 6공 군사 독재 시절에 지탄받던 비도덕적인 권력의 남용과 현 정부의 모습도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6월 11일자 1면) 1995년 6월 6일, 현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거룩한 공간으로 여겨지던 명동성당과 종로구 조계사에 경찰이 전격 투입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과 통신시장 개방, 한국통신 민영화 추진, 노조 간부 징계·사법처리 방침에 반발해 투쟁하던 한국통신(현 KT) 노동조합 간부들을 강제 연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은 1970년대 유신 체제와 1980년대 제5공화국의 군사 독재 시절에도 민주화 운동가들과 약자들을 품어 안았던 ‘성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 독재 정권조차 넘지 못했던 이 성역의 문턱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안고 탄생한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무력으로 유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1995년 명동성당서 농성하던 한국통신 노조원 강제연행 종교계, “성역 침탈” 강력 반발… 4개 종단 공동 침묵시위 사태의 사회적 배경 우선 당시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세계화 질서로의 편입과 신자유주의적 노동 재편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국통신 파업 사태는 단순한 사업장 내의 임금 협상 결렬이 아니라, 국가의 거시적 경제 정책과 노동계의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정부는 ‘세계화’를 최우선 국정 지표로 내걸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고, 노조는 통신 시장 개방 반대와 대기업 위주의 통신 산업 민영화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노사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는 노조의 주장을 ‘국가 전복의 저의’라고 규정하고 엄중한 사법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경찰, 두 차례 명동성당 난입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경찰은 노조 간부 20여 명에 대한 검거에 돌입했습니다. 노조 지도부는 5월 22일 공권력의 출입이 제한되는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해 무기한 천막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농성 초기, 명동성당 측은 당혹감 속에서도 이들을 보호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노조 간부들에게는 극한투쟁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고, 사측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한 중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6월 초, 정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악화된 국정 지지율을 만회하고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해, ‘통신 대란’을 구실로 대화와 타협 대신 무력 진압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경찰의 명동성당 난입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경찰은 6일 오전 8시, 5월 22일 이후 3주째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 등 6명을 전원 연행했습니다. 전날인 5일 조계사 측과 중재안을 마련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명동성당 측은 정오에 사제단 기자회견을 갖고 배신감과 당혹감을 표명했습니다. 7일 저녁 9시 40분경 경찰이 재차 명동성당 내에 진입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을 무차별로 연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 성당에서 교리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신자들, 성당 직원들까지 연행됐습니다. 법치주의와 인권 보호 놓고 보수·진보 단체 극심한 대립 변화하는 사회 속 교회 역할 새로운 방향성 찾는 계기로 성역 침탈에 거센 분노 전두환 정권의 군홧발마저 멈춰 세웠던 성역이 유린당하자, 종교계와 시민사회는 비통함과 함께 정권의 비도덕성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틀 뒤 특별 메시지를 발표, 명동성당이 독재 시절에도 성역으로 지켜진 것은 ‘치외법권 지대’여서가 아니라, 불의에 쫓기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양심과 이를 존중해 준 시민사회의 도덕적 합의 덕분이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명동성당을 짓밟은 것은 곧 “(문민)정권 탄생의 모태를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에 정부는 다급해졌고, 6월 16일 이홍구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담화는 법 집행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명동성당이 치외법권 지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해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한국 사회는 교회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보수 세력과,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 주장을 폭력으로 짓밟고 종교를 모독했다는 진보 단체와 종교계의 규탄 사이에서 극심한 대립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습니다. 정치적 역풍과 명예 회복 정부가 명동성당 난입이라는 자충수를 둔 것은 6월 27일로 예정됐던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지지율이 폭락한 상황에서 정부는 보수 기득권층의 결집을 겨냥, 강한 정부의 이미지를 연출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거센 분노가 반정부 여론에 불을 질렀고, 집권 여당은 참패해 문민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국가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혀 명동성당에서 끌려 나갔던 노동자 대부분에 대해서도 그 혐의가 벗겨졌습니다. 결정적인 역사적 평가는 2006년에 내려졌습니다.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1995년 당시 해직 및 구속된 한국통신 노조 간부 26명 전원의 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하고 복직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성역’의 자발적 해제 이 사건은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에도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95년 공권력 투입 이후, 명동성당은 각종 단체와 노조의 농성장으로 변모하며 몸살을 앓게 됐습니다. 그해 12월, 결국 명동성당은 정상적 신앙 활동을 저해하는 집회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후 1997년 민주노총 지도부와 한총련 학생 농성, 1998년 퇴출 은행 노조 농성, 2000년 한국통신 노조 2차 농성 등 수많은 농성에서, 성당 측은 적극적 개입을 통해 자진 해산을 유도했습니다. 2000년 12월에는 관할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요청’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교회 안에서는 종교 본연의 기능 회복이라며 지지하는 입장과, 약자를 배제하고 교회의 기득권 계층화라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됐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은, 2010년대에 이르러 명동성당 구역에 대한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짐에 따라 어느 정도 그 방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본주의적 거대 소비 공간으로 재편된 명동성당 일대에서,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의 농성이나 공권력과의 대치가 벌어지던 ‘성역’의 면모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5)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

“재단법인 평화방송은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저동 본사 사옥에서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식을 가졌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선교적 요청에 따라 설립된 평화방송 케이블 TV의 개국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선교의 새장을 열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축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송하는 케이블 TV가 전국 교회를 하나로 묶는 뜻깊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곧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개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송출 버튼을 누름에 따라, 평화방송 케이블TV는 시그널이 행사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사적인 선교 TV 방송 첫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송출했다. ‘시대의 빛 가정의 벗’을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평화방송 케이블 TV는 채널 33을 통해 미사 중계, 성극, 종교영화 등의 직접 선교 프로그램과 생명, 환경, 가정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및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의 복음화와 인간화를 추구하게 된다.”(가톨릭신문 1995년 3월 12일자 1면) 영상 선교의 막 올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매체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케이블TV 방송국이 1995년 3월 1일 시작됐습니다. 평화 케이블TV 방송이 채널 번호 33번을 통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영상 프로그램을 최초로 송출함에 따라, 평화방송·평화신문은 TV와 라디오, 신문을 모두 갖춘 가톨릭 종합 매스컴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7년 11월 20일 개최된 서울대교구 사제총회 자리였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복음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인쇄 매체와 방송 매체를 동시에 아우르는 미디어 설립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듬해 1월 설립 추진 위원회가 구성됐고, 1988년 5월 15일 홍보 주일을 기해 주간 ‘평화신문’이 창간됐습니다. 당시까지 유일한 교회 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은 그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주간 ‘평화신문’이 지난 15일 홍보 주일을 기해 창간됐다. 매주 8면으로 발간되는 평화신문은 직접적인 교회의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으나 시사 문제를 교회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편집될 예정이다. 12면으로 발행된 창간호에는 광주 사태 해결 방안에 관한 김수환 추기경의 회견 내용을 비롯해, 한반도 핵 문제 및 공해 문제 등의 시사 문제가 폭넓게 다뤄졌다.”(가톨릭신문 1988년 5월 22일자 1면) 평화신문 창간 다음 해인 1989년 재단법인 평화방송 설립이 허가됨에 따라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취임했고, 초대 사장으로는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임명됐습니다. 이어 1990년 4월 15일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가 공식 개국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평화방송 라디오 개국에 대해서도 크게 환영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서울대교구 평화방송이 부활대축일인 4월 15일 오전 11시 개국, 본격적인 정규 방송에 들어간다. 국내 처음으로 보도, 사회, 교양, 음악, 오락, 종교 등 모든 것을 다루는 FM 종합 방송 매체로 개국하는 평화방송은 매일 아침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하루 21시간 주간 총 8820분간 방송된다.”(가톨릭신문 1990년 4월 15일자 1면) 초창기 전파 송출 시설은 남산타워에 가설됐고, 서울 중구 저동의 평화빌딩에 제작 스튜디오를 마련해 개국을 준비했습니다. 1990년 3월 6일 시험 전파를 첫 송출한 평화방송은 4월 1일부터 지상파 텔레비전을 통한 대대적인 광고를 시행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4월 15일 ‘맑은 소리, 밝은 세상’이라는 공식 캐치프레이즈 아래 FM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개국 초기 라디오 편성은 종교 18.1%, 보도 12.7%, 사회 교양 26.1%, 음악 및 오락 43.1%의 종합 편성 정책을 따랐습니다. 케이블TV 개국으로 종합 매스컴으로 발돋움 그런데 라디오 방송국 개국 직후인 1991년, 평화방송은 종교 방송의 사회적 역할과 보도 영역의 한계를 둘러싼 내홍을 겪게 됩니다. 갈등의 근원은 복음 선포와 영성 교육 중심의 순수 선교 방송을 지향했던 경영진과, 사회 정의 실현 및 비판 보도 기능을 우선시했던 제작진·기자들 간의 인식 차이에 있었습니다. 제작 거부, 파업과 농성, 공권력 투입과 대량 해고로 이어진 ‘평화방송 사태’는 국제기자연맹(IFJ)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할 정도로 대내외적 파장이 컸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보도 비중을 대폭 낮추고 선교 및 종교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내부 갈등을 수습한 평화방송은 1993년 8월 종합유선방송 가톨릭 채널 사업자로 허가를 받으며 영상 미디어 영역으로 진출, 다매체 선교 시대를 열게 됐습니다. 동시에 지방 방송국 네트워크 건립 사업을 추진, 1996년에 광주와 대구 평화방송이 개국했고, 2000년에는 부산과 대전 평화방송이 문을 열었습니다. 2002년에는 위성방송 가톨릭 채널(SKY-평화)을 개국했고, 2009년부터는 초고속 인터넷망 기반의 IPTV(Olleh TV, B TV, U+TV) 송출을 개시해 전국 어디서나 가톨릭 영상 프로그램을 가정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화방송은 2016년 11월 23일, 창립 이래 사용해 오던 영문 약칭 ‘PBC’를 ‘cpbc’로 개칭하고, 법인 및 매체 명을 ‘가톨릭평화방송’과 ‘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평화방송’이라는 사명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매체임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스마트 OTT 미디어 사목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공동체 미사의 중단이라는 전례 없는 영적 단절을 야기했습니다. 이에 가톨릭평화방송은 비대면 사목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대면 미사가 전면 통제된 시기에 가톨릭평화방송의 TV 미사 중계와 유튜브 성경 공부 콘텐츠는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적 유대감을 보존하는 가장 유력한 대체재로 부상했습니다. 이러한 뉴미디어 사목의 경험은 단발성 대응을 넘어 장기적인 디지털 플랫폼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졌습니다. 2023년 3월 3일, 가톨릭평화방송은 국내 최초의 가톨릭 전문 모바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인 ‘cpbc플러스’를 공식 출시했습니다. 46만 개에 이르는 방대한 가톨릭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스마트폰과 PC로 무료 제공함으로써, 현대 가톨릭 신자들의 일상에 최적화된 유비쿼터스 미디어 사목의 지평을 개척한 것입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4) 한국 사목지침서 공포

“주교회의는 3월 20~23일 3일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1995년 봄 정기총회를 갖고 … 한국 지역 교회법전으로 성청이 인준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를 부활대축일인 4월 16일자로 공포키로 하고, 6월 4일 성령강림대축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4월 2일자 1면) 교회 사목과 행정 부문의 쇄신 1995년은 한국교회의 사목행정 부문에서 혁신을 이룬 해입니다. 주교회의가 그해 확정한 교회 사목과 행정 부문 쇄신은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공포, 「한국 사제양성지침서」 제정, 교회 종합전산망 착수, 2천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구성, 미사통상문 개정안 확정, 농민주일 제정 등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황청이 인준하고 한국 주교회의가 총회에서 확정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는 당시 전 세계 전교지역에서 지역교회가 자국어로 만든 유일한 지역 교회법전이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전교지역에서 자국어로 번역된 보편 교회법전과 자국어로 작성된 지역 교회법전을 모두 갖춘 유일한 교회로 기록됐습니다. 주교회의는 동시에 「한국 사제양성지침서」를 승인해 사도좌에 인준을 신청했습니다. 이 지침은 한국 내 모든 대신학교 학칙과 내규에 적용될, 한국교회가 현대 세계와 교회에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88년부터 8년 동안 작업해 온 「미사통상문」 개정안도 확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2000년대 복음화를 대비해 미래 사목의 발판이 될 지역교회법과 사제양성 지침, 전례서 개정 문제 등을 확정, 시행함으로써 성숙한 지역교회로서의 자치권을 더욱 공고히 확립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교지역 최초의 자국어 교회법전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의 제정은 20년이 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 시발점은 1974년 주교회의가 기존 ‘한국 천주교 공동 지도서’(1932년 반포)의 개정 작업에 착수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공동 지도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전의 트리엔트 공의회적 신학과 제도를 담고 있어,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공의회 이후 쇄신된 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 사목 환경에 부합하고, 1983년 공포된 새로운 보편 교회법전의 정신을 지역교회 안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개별 교회법의 제정이 요구됐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해 주교회의는 산하 교회법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길고 고된 작업 끝에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에는 입법예고 형식의 공개 시안이 배포되었고, 1992년 최종 시안과 영문 번역본이 로마에 제출됐으며, 마침내 1995년 1월 23일 사도좌 인준을 거쳐 4월 16일 공포, 6월 4일 시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정은 사실 원래 계획보다 다소간 늦게 이뤄졌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우선 교황청의 심사 과정이 길고 복잡했으며, 수정과 보완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핵심적인 이유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사목회의의 결실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200주년 사목회의를 통해 수많은 평신도와 사제들이 고백한 공동체적 식별의 성과물들을 법적인 조문 구조 안으로 담아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평가에서는 200주년 사목회의의 성과는 불과 일부만이 사목지침서에 수용됐다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즉,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토착화, 교회 운영의 민주화, 분단 현실 인식 같은 특징적 의제가 부분적으로만 반영됐다는 지적입니다. 내용과 역사적 의의 사목지침서는 보편 교회법의 복잡한 규정들을 압축하고, 한국의 사목 현장에서 신부들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5분 안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실무 참고서’ 역할을 하도록 고안됐습니다. 총 1752조에 달하는 방대한 보편 교회법전의 체계를 긴밀하게 구조화하여 단 256개 조항으로 집약했으며, 이 중 성사생활에 관한 규정이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만큼 실천적이고 사목적인 유연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입니다. 총 6편 256개조의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된 사목지침서는 제1편 하느님 백성(1~32조), 제2편 전례와 성사(33~136조), 제3편 사목(137~197조), 제4편 선교와 신자 단체(198~214조), 제5편 사회(215~256조)의 순서로 돼 있습니다. 제5편 사회에서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을 대폭 수용했으며 제6편에서는 교회법이 준용하는 국내법 중 참고될 만한 법규를 발췌 수록했습니다. 사목지침서의 역사적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라틴어에 기반을 둔 선교지 지도서 체제에서 벗어나 한글로 편찬한 지역 교회법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자치성과 법적 자기 정체성이 크게 강화됐습니다. 둘째, 전례·성사·혼인·본당 운영·교구 구조·신자 단체·사회 참여 등 사목 전반을 표준화해 전국 교회의 공통 기준을 제공했습니다. 셋째, 200주년 사목회의의 선구적 문제의식 특히 성직주의 비판, 교회 운영의 민주화, 토착화, 분단 현실에 대한 더 넓은 응답이 모두 동등한 강도로 법전 안으로 수렴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문서는 ‘수렴’과 ‘선별’이 동시에 일어난 결과물이었습니다. 미완의 쇄신 사목지침서의 본질은 ‘한국교회의 자기 조직화’에 있습니다. 이 문서는 1930년대의 라틴어 지도서를 대체해 한글로 편찬한 지역 교회법으로서, 보편 교회법전·공의회 문헌·사목회의 의안·한국 사회 현실을 하나의 규범 체계로 묶은 것입니다. 전교지역에서 자국어로 작성된 지역 교회법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 평가의 핵심은 한국교회가 자신의 사목 환경 속에서 자기 언어와 사목적 감각으로 사목의 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이 문서는 ‘완결된 쇄신’이 아니라 ‘절충된 쇄신’의 산물이었습니다. 1984년 사목회의가 던진 토착화, 평신도 참여, 권위주의 비판, 사회·민족 현실에 대한 더 깊은 응답은 사목지침서 안에서 부분적으로만 제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서를 과대평가하면 쇄신의 미완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되고, 과소평가하면 전국 사목 표준화와 자치성 강화라는 실질적 성과를 놓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1995년 사목지침서의 최대 성과는 법적·사목적 공통 언어를 전국 교회에 부여한 데 있었고, 최대 한계는 그 법적 통합이 곧바로 시노드적 참여, 세대교체, 세속화 대응, 성직주의 극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95년에 하나의 법전을 가졌지만 그 법전을 복음적 가치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고쳐나가야 하는 사명을 여전히 부여받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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