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9) 교회 환경운동의 본격 태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로운 사회 발전의 토대인 수많은 윤리 가치들은 생태 환경 문제와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서 ‘오늘날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 자연 자원의 피폐, 점차 악화되는 생활의 질적 저하로 인해 세계 평화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해 이같이 강조한 교황은 ‘과학기술 발전의 무차별 적용으로 오늘날 생태계는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는 생명과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점차 상실시켜 인간 경시에 이르고 마는 비자연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세계관을 낳게 됐다’고 개탄했다.”(가톨릭신문 1990년 1월 1일자 1면) 한국교회 환경운동의 공식적인 출발점은 1991년입니다. 1984년 울산 온산 지역의 대규모 공단 폐수 오염에 따른 ‘온산병’ 발병과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등으로 당시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습니다. 이는 국가 주도의 압축적 산업화가 낳은 환경 재난들이었습니다. 이런 재난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환경오염과 파괴가 인간 삶의 질적 저하, 심지어 생존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는 평화’를 발표했습니다. 이 담화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소비주의가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있음을 경고하며, 생태계 보호가 신앙인의 도덕적 의무이자 참된 평화를 향한 과제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담화는 한국교회가 환경 문제를 공식적인 사목 과제로 채택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환경보전 인식의 대전환 한국교회가 교황 담화에 응답하면서 교회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했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1991년 환경 보전에 관한 교황 담화 자료집을 발간하고, 개인과 본당, 교구 단위의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어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산하에 ‘하늘땅물벗’이라는 생태 사도직 모임을 구성하고 월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에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주관으로 교회 내 22개 환경운동단체가 참가한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가 처음 열렸고 이듬해에는 ‘환경상’도 제정됐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1991년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생활 수칙 70가지’ 포스터와 자료집 ‘생명과 해방으로 가는 길’을 제작, 보급한 데 이어,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공청회는 교회 안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농촌사목 분야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생명공동체 운동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1990년 가톨릭농민회는 제20차 대의원대회에서 사람과 땅, 자연을 살리는 생명 농업 실천을 공식 결의했습니다. 안동교구의 생명 공동체 운동이나 대구대교구의 푸른평화운동본부 등은 이러한 유기적 생명관에 기초해 비신자를 포함하는 폭넓은 연대 활동을 전개하며 초기 환경운동의 외연을 확장했습니다. 1994년에는 환경교육의 내실화, 환경운동의 정착 및 확산, 타 단체와의 연대 활동 등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서울과 대구대교구 등에서 환경전담사제가 임명됐고 전국 환경사제모임이 결성됐습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활실천부는 환경 문제를 전담하는 ‘환경보전부’로 개칭했고, 대구대교구 푸른평화운동본부가 지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교회 환경운동의 정체와 답보 한국교회는 환경운동을 신앙 실천의 하나로 수용하게 됐지만, 초기의 열정과는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 교회 환경운동은 제자리걸음에 머물게 됩니다. 초기의 환경운동은 쓰레기 분리수거, 합성 세제 감축, 자원 재활용 등 생활 실천 운동에 집중됐습니다. 공해 문제에 대한 구조적,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고, 주로 개인의 도덕적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는 윤리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점차 운동의 동력과 방향성을 잃고 답보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가톨릭신문은 기획기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교회 환경운동의 이러한 문제를 진단했습니다. 1996년에는 교회 환경운동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본당 환경 분과나 단체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답보 상태임을 지적했습니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10여 개가 못 되고 이들 단체의 책임자들은 ‘기존의 환경운동이 개인적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는 만큼 눈에 띄는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가톨릭신문 1996년 4월 21일자 1면) 2003년에는 ‘본당 중심 환경운동 답보 상태’라는 취지의 기사에서, “교회 환경운동의 손발이 없어 환경보전운동이 생활 속의 실천 운동으로 확산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교구 전체 본당 가운데 환경분과가 설치된 본당은 불과 7곳뿐이고 실질적으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곳은 단 2곳으로 집계되고 있다.”(가톨릭신문 2003년 6월 1일자 1면) 본당 환경분과는 생활 실천 운동을 추진하거나, 지역사회의 환경 관련 사안들에 대한 참여가 이뤄지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환경운동의 ‘손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환경운동, 특히 본당 단위의 풀뿌리 교회 환경운동은 사실상 오랫동안 침체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 관련 현안에 대한 범종교 연대 1990년대 중반 이후 교회 환경운동이 초기의 활력을 잃고 정체기에 접어들었지만, 2000년대 초반 거대한 환경 파괴 현장에서는 천주교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인 새만금 간척 사업과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공사 반대 운동 등에서 천주교는 피조물의 생명권을 수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은 종교계 연대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문규현 신부와 불교계 수경 스님 등은 도심 한복판에서 ‘3보 1배’의 고행을 통해 생명 살상의 실체를 고발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결성된 5대 종단 연대 기구인 ‘종교환경회의’를 통해 천주교는 이웃 종교와 함께 생태 보전, 탈핵, 기후위기 대응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실천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990년 교황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계기로 본격화된 교회 환경운동은 오랜 기간의 정체기를 거쳐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반포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회칙은 인류의 환경 위기를 ‘근본적인 영적 위기’로 규정하고, 자연환경의 위기가 인간 및 사회의 위기와 별개가 아니라는 ‘통합적 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시하며, 인류 전체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생태적 회개(Ecological Conversion)’를 촉구했습니다.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8) 임수경·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수산나) 양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파북 된 전주교구 문규현(바오로) 신부가 임 양과 함께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문 신부와 임 양은 군사분계선을 넘는 즉시 유엔군사령부 경비병에 의해 연행됐으며 유엔군사령부 측은 공동경비구역 외곽에서 우리 측에 신병을 인계했다. 문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오기 전 판문점 북측 지역인 판문각에서 거행된 환송집회 중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헤어질 수 없는 하나의 동포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신했다’고 밝혔다.”(가톨릭신문 1989년 8월 20일자 1면) 1989년 대한민국은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화 열기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전이되는 격동기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7 선언’으로 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했으나, 통일 논의는 철저히 국가가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임수경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의 동행 귀환은 국가의 독점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를 존립 기반으로 삼던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북한 선교’라는 시혜적 태도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사목 노선으로 대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투쟁에서 통일을 향한 갈망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 운동권은 6월 항쟁의 동력을 조국 통일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분단의 고착화가 남한 내 독재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와 남북 학생 회담 추진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당시 서울대생 조성만(요셉) 군이 조국 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한반도 전역에서 통일 운동이 더욱 세차게 번져가는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바야흐로 통일 논의의 주체가 정부를 넘어 민간으로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7·7 선언을 발표해 북한을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남북 교류를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민간 차원의 접촉은 철저히 통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재야인사들의 방북이 이어지는 가운데, 1989년 7월 전대협은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을 대표로 파견해 거대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분단의 장벽을 넘어, 사제단의 결단 임수경은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정부는 즉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에 착수했고, 그녀의 안전한 귀환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이에 정의구현사제단은 분단의 장벽을 깨기로 결단을 내리고 문규현 신부를 평양으로 파견했습니다. 광복 44주년인 8월 15일, 두 사람은 남북 및 유엔군의 경고 속에서도 나란히 손을 잡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습니다. 판문점을 넘기 직전 임수경은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극적인 귀환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남측 경계를 넘자마자 체포된 두 사람은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충격과 당혹감 정부는 이를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순 세력의 도발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안 정국을 조성했습니다. 교회 당국 역시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주교단은 7월 27일 담화문을 발표해 충격과 유감을 표명하고 “통일을 촉진하고 싶은 사제들의 마음은 이해한다”면서도 “우리 사회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행동이 앞섬으로 인해 많은 국민에게 우려와 불안을 준 것은 마땅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불법적인 정치 개입이라는 비판과, 교회가 비로소 분단 문제에 온몸으로 응답했다는 지지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토론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엄혹한 공안 정국 속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제 막 이뤄 노동 문제 등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들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국민 대중의 의식 수준은 아직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학생 대표와 사제단의 ‘불법적’인 방북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센 내부 갈등은 한국교회를 포함한 전 국민이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민족 화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고통스러운 산고의 과정이었습니다. 반공주의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이 사건은 북한을 ‘침묵의 교회’, ‘타도의 대상’으로 보던 교회의 시각을 ‘대화와 화해의 상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식의 변화는 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출범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주교회의도 기존 ‘북한선교부’를 ‘민족화해위원회’로 개칭하며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인도적 지원, 민족 화해 미사 봉헌, 평화 교육 등을 적극 전개하며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비록 당시의 법체계와 사회적 금기, 부분적으로는 교계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충격과 당혹감을 던졌지만,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가 독점해 온 통일 담론을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영역으로 확산시켰으며, 분단의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방북을 보는 가톨릭신문의 시각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가톨릭신문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1989년 8월 6일자 2면에 실린 사설에서 방북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 사설은 사제단의 행동으로 교회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졌으며, 거기에는 사제단이 창설된 1974년 이후 이를 방치해 온 주교단에 책임을 묻고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사제들을 질타했습니다. 충격적인 방식에 우려를 표할 수는 있으나, 민족 화해라는 본질적 가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외면한 채 교회의 기강 확립에만 집중한 점은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사설은 기강의 해이함이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이 창설된 후부터 시작됐다고 단정했습니다. 이로써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재 청산의 과정에서 보여준 사제단의 역할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결국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기반해 볼 때, 이 사설은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고 예언직의 수행에 소홀했으며, 그럼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다행히 1년 뒤인 1990년 6월 24일자 특집 기사에서는 “사제단의 방북이 교회 내 통일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통일 논의를 억압한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한층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7)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성찬례 통해 성체 신비 생활화 다짐, 교황 두 번째 訪韓, 미사 주례 -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를 통해 나눔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는 역사적인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핵심 행사인 장엄미사가 대회 마지막 날인 10월 8일 오전 10시30분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례하고 각국에서 온 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으로 집전한 가운데 성대하게 봉헌됐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지난 10월 4일 개막과 함께 기도회, 학술 심포지엄, 젊은이 성찬제 등 각종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 이번 성체대회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이날 장엄미사에는 전 세계 108개국에서 온 200여 명의 주교단 및 2000여 명의 사제단과 65만 명의 국내외 신자들이 참례, 성체 안에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성체 신비의 생활화를 다짐했다.”(가톨릭신문 1989년 10월 15일자 1면) 1989년 10월 8일,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 있었던 드넓은 광장에는 65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가톨릭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폐막미사가 거행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날 미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방한해 주례했습니다.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된 이 여의도광장은 원래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아스팔트 활주로가 있던 비행장이었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71년 ‘5·16 광장’이라는 이름의 비상활주로 광장으로서 대대적인 군사 및 국가 행사 공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군사정권 잔재 청산과 환경친화적 도시개발 계획이 추진돼 1999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됐습니다. 여의도광장 시절, 광장은 7만2000평, 도로 면적을 포함하면 총 12만 평에 달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최대 수용 인원은 약 70만 명이며, 현실적으로는 50만 명 수준이 한계였습니다. 그러니까 무려 65만 명이 한자리에 모인 이날 행사가 얼마나 큰 규모를 기록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이처럼 역사적 공간 위에서 열린 대회는,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전환과 깊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아직은 동양의 작은 나라였던 한국, 선교지역의 미미한 교세를 가진 작은 지역교회에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국제행사가 열린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은 가장 역동적이고 고통스러운 전환기였습니다. 1970년대 고도성장 뒤에는 노동, 빈곤, 인권 유린, 군사 독재 등 첩첩이 쌓인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 상황이 있었고, 이는 1980년대 들어 전 사회적인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아픔에 깊숙이 참여해 교회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고, 민주화와 인권 수호의 보루로서 복음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양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정치적 민주화의 달성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시민 사회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됐고, 그 한가운데에 천주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단순한 신앙 행사가 아니라, 민주화 이후 사회적 치유와 통합을 향한 교회의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계성체대회는 1881년 프랑스 릴에서 시작, 4년마다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개최됩니다. 이 대회의 본질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비로운 일치를 통해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특히 1960년 독일 뮌헨 대회 이후 세계성체대회는 교회의 담장을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적 의미가 강화됐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수성과 민주화 이행기라는 시대적 요청, 그리고 신흥 성장 국가인 한국이 아시아 선교의 거점이 되리라는 기대가 맞물려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정치적 민주화의 성취는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 참여적 에너지를 신앙과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는 복음적 실천력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용서가 전제된 복음적 평화였고, 이는 민주화 이후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려는 교회의 사목적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평화, 감사, 회심과 일치를 향한 염원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열린 세계성체대회는 평화와 감사, 회심과 일치를 향한 한국민들의 염원을 가득 담아 성대하게 개최됐습니다. 대회는 평화의 사도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인 10월 4일 전야제 평화의 날을 시작으로, 5일 감사의 날에는 제찬과 성찬 심포지엄이 개최됐습니다. 6일 회심의 날에는 세계 평화와 교회를 주제로 한 강연회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본 한반도의 평화 심포지엄 및 젠 베르데의 공연 ‘깨어나라’가 열렸으며, 이어 참회 예절과 철야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7일 일치의 날에는 성공회 성당에서 각 교파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회가 개최됐고, 한반도의 분단 지점이 보이는 도라산에서는 ‘하나 되게 하소서’를 주제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 통일 기원미사가 봉헌됐습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 도착한 교황은 서울대교구 논현동성당에서 ‘엠마우스 성시간’을 주재한 뒤 ‘젊은이 성찬제’에 참석했습니다. 대회 마지막 날인 8일 축제의 날에는 교황이 직접 주례하는 장엄미사가 여의도광장에서 성대하게 봉헌됐습니다. 교황은 이날 강론 서두에서 “한국교회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지 5년 만에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폐막미사를 거행할 수 있게 된 은총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한 뒤, “성도들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은 근원이 있으며 성찬례 안에 가장 충만한 성사적 표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한마음한몸운동’의 제도적 정착입니다. 이 운동은 성체대회의 정신을 '생활 실천'으로 구체화했는데, 초기에는 헌미헌금운동을 중심으로 시작됐으나, 점차 생명 나눔, 환경 보존, 국제 원조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지금도 왕성하게 나눔운동과 생명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비록 5일간의 짧은 기간 개최된 대회였지만,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의 현실 속에서,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참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의 마음을 모아,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6) 6월 항쟁, 그 위대한 승리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온 명동성당 농성 시위 사태가 6월 15일, 농성 중인 학생, 시민들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사태 발생 6일 만에 극적으로 일단락됐다. 이번 농성 시위에서 극적인 해산 결정이 나오기까지 사제단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11일 경찰이 명동성당 구내에 최루탄을 다량 발사한 데 항의, 명동본당 주임 김병도 신부가 사제들을 소집함으로써 이날 오후 처음 자리를 같이한 서울대교구 사제들은 12일,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하고 오후 8시 농성학생, 시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으며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기도회를 갖는 등 ‘함께한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자 11면) 임계치에 도달한 분노 1987년 5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제단의 폭로 이전에 전두환 정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패착을 둔 상태였습니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일체의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고 ‘체육관 선거’로 불린 간선제 헌법 체제를 유지해 군부독재를 영구화하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 12명은 4월 21일 오후 7시부터 가톨릭센터 6층 소성당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4·13 특별담화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말살시켰다’고 말하고...”(가톨릭신문 1987년 4월 26일자 11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참상을 담은 ‘5·18 사진전’을 광주와 부산 등지에서 개최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참혹한 증거들이 시민들에게 공개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태생적 불법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폭로됐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다 사제단의 고문 조작 폭로와 단식, 5·18 사진전 등으로 촉발된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는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범국민적 연대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공식 발족했습니다. 이어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 5일 끝내 숨을 거둔 이한열의 피격 장면은 외신과 국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박종철의 죽음과 겹치며 분노는 마침내 폭발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권은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의 후계자를 내세우는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같은 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됐습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6월 민주항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발생한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이어집니다. 명동성당, 6일간의 해방구 명동성당 농성의 발단은 학생운동 단체의 기획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6.10 국민대회에 참가하려던 대학생 500여 명이 경찰에 쫓겨 성당 구내로 들어옴으로써 시위가 시작됐고, 성당 구내에 있던 상계동 철거민과 시민 100여 명이 가세, 600여 명이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11일 오전 시위대가 중앙극장 쪽 골목, 로얄호텔 쪽 골목, 판넬골목 등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 3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으며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등 강력히 저항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 자 11면) 당시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22년 6월 22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처음 학생들로부터 ‘해방구’란 말을 들었다”며 “성당은 본디 해방구이니 절묘한 은유법이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나를 밟고 가라” 정부는 비상계엄 선포나 경찰력 투입을 검토했습니다.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성당 측은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재가를 얻어 11일 밤 사제 50명을 소집해 철야 농성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 농성의 과정에서 비폭력의 도덕적, 영적 권위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사제와 수녀들이 위태로운 순간마다 농성대와 경찰 사이 최전방 대치선으로 나아갔습니다. 13일 새벽, 무력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전날인 12일 저녁, 공권력 투입을 통보하던 정부 고위 당국자를 향해 김 추기경은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가서 내 말을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해주시오. 공권력이 투입되면 내가 맨 앞에 누울 테니 나를 밟고 넘어가시오. 그다음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오. 그들을 모두 밟고 넘어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독재정권의 폭력적 공권력을 완전히 압도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쟁취한 민주주의 성당 내부의 결사 항전은 담장 너머 시민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고립과는 달리, 1987년의 명동은 수많은 목격자와 지지자를 양산했고 도심 한복판이 거대한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해방의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6월 15일,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의 끈질긴 설득 그리고 극단적인 유혈사태를 피하려는 정부의 부분적인 양보로 명동성당 농성대는 자진 해산했습니다. 농성은 끝났지만, 투쟁의 무대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항쟁의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고,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처럼 폭력 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범국민적인 저항의 불씨가 전국을 휘감았고, 국제사회의 압박, 특히 전두환 정권의 군 투입 불가와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의 뜻이 전달됐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있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의원은 이른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즉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그 골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전면 수용을 비롯한 8개 항의 민주화 조치였습니다. 7월 1일 전두환이 이 수습안을 공식 수용함으로써 국민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주권을 되찾게 됐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된 진실의 씨앗이 6개월간의 혹독한 겨울과 투쟁의 봄을 거쳐, 마침내 6·29라는 민주주의의 결실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여정의 한가운데, 한국 천주교회가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5)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박종철 군 사건 진상은 조작 - 정의구현사제단은 5월 18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전(前)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문화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가 아니라, 학원문화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경장 이정오’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광주사태 7주기 추모미사’ 후 이같이 밝힌 사제단은 ▲조한경 경위는 반장으로서 박종철 군에 대한 신문(訊問)을 담당한 3명(황정웅, 방근곤, 이정오)에게 ‘말 안 하면 혼내주라’는 말만 하고 고문실을 나왔으며, 한 시간쯤 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박종철 군은 이미 늘어져 있었다. ▲강진규 경사는 1반 반원이 아니며, 강 경사가 소속된 반에서 찾고 있는 학생에 대해 박종철 군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 방에 갔을 뿐이라며 두 사람은 직접적인 고문살인의 주범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또 사제단은 ‘경찰은 당초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조 경위에게만 지휘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려 했으나, 여론의 빗발치는 진상 조사 요구에 의해 고문치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인만은 계속 조작, 조 경위와 강 경사에게 덮어씌우고 있다’며 ‘범인 조작은 1월 17일 이후 두 경찰관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최초로 이뤄지고 같은 상황하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5월 24일 1면) 다시 불붙는 민주화 운동 광주의 비극으로 시작된 1980년대,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과 교황 방한으로 주춤했으나, 1980년대 후반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과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사제단은 1985년 6월 6일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 학원 문제, 언론 자유 침해 등 시국 전반에 걸친 독재 정권의 비민주성을 질타했습니다. 국가 폭력과 공안 정국 1985년 8월, 정부는 학생운동권과 민주화 세력을 영장 없이 ‘순화 교육’ 시킬 수 있는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을 시도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를 ‘위험한 발상’이라며 명백한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8일자 1면 기사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최근 정부와 여당이 서두르는 ‘학원안정법’은 나라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하고 “학원안정법의 제정을 즉각적으로 철회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85년 하반기부터 1986년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폭증하는 등 본격적인 공안 정국이 조성됐습니다. 이 시기 국가 공권력의 타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86년 6월 발생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었습니다. 위장 취업했다가 연행된 대학생 권인숙에게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고문을 가한 만행이었습니다. 공안 당국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가해자를 비호하며 도리어 피해자를 구속기소 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교회는 여성계, 재야 단체 등과 연대해 ‘천주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폭력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 열망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1986년 3월 9일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 시국 미사 강론을 통해 “법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간선제 헌법의 반민주성을 비판했습니다. 이어 “불의를 저지른 이들은 그 불의를 인정해야 한다”며 정권의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임기 내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간구하는 9일 기도’를 전국 각 교구에서 바치기 시작했고, 개헌 서명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탁’ 치니 ‘억’,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촉즉발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 속, 1987년 벽두, 전국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물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황당한 변명으로 박 군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박 군의 억울한 죽음에 교회는 전 국민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가톨릭신문 1987년 1월 25일자 보도에 의하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1월 19일 성명을 발표해 이 땅에서의 고문 종식을 지향으로 1월 25일 미사 봉헌과 기도회를 전국 각 본당에서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성명서는 “말단 수사관의 우연한 실책으로 이 고문이 자행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박 군의 죽음을 계기로 고문 행위의 근본적, 필연적인 원인이 밝혀져야 하고 고문 종식을 위한 민족적 결단이 이뤄지길 촉구”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주일 정오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정부 당국은 이번만은 참으로 정부와 나라 전체의 공정을 위해 사건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호도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밝힐 것”을 촉구했습니다. 진실의 폭로, 6월 항쟁의 도화선 경찰은 조한경, 강진규 두 명의 수사관만을 구속하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으나, 진실은 감옥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습니다. 구속된 두 수사관이 남부구치소 안유 보안계장 등에게 추가 범인 3명이 더 있으며 치안본부 수뇌부가 이를 은폐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안유 계장은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민련(전국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부영은 비밀 쪽지에 내용을 기록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반출시켰습니다. 재야인사 김정남을 거친 이 쪽지는 최종적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마티아) 신부와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전달됐습니다. 감옥 안의 의로운 교도관들과 민주 인사들의 목숨을 건 릴레이가 진실을 성당의 제단 위로 밀어 올린 것입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미사 직후, 김승훈 신부는 제단 위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경찰의 조작극 전모는 물론, 은폐되었던 진범 3명의 이름까지 정확히 실명으로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는 독재정권을 엄청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고, 숨어있던 진범 3인과 조작을 지휘한 박처원 치안감 등 수뇌부가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거대한 국가 폭력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시킨 이 폭로는 다가오는 6월 민주항쟁을 향한 완벽한 기폭제가 됐습니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4) 분단 후 처음 북한 땅에서 미사 봉헌

“분단 40년 만에 종교가 말살된 북녘땅 공산 치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미사성제가 봉헌됐다.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집전으로 봉헌된 북녘땅에서의 미사는 평양 방문 3일째이자 한국순교성인대축일 주일인 지난 9월 22일 오전 7시 20분경 숙소인 고려호텔 3층 제1영화관에서 봉헌됐다. 분단 40년 만에 남한의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한 지학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1945년 해방 직후 모든 성직자가 순교하여 40년간 미사성제가 없었던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하게 돼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면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분단 후 북한 땅에서 첫 미사 1985년 9월, 남북 관계의 경직된 장벽에 작은 틈이 생겼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방문단의 일원으로 당시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 역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실향민으로, 당시 북한 방문을 통해 누이동생 용화(당시 61세) 씨를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주일이었던 9월 22일 오전 7시20분경, 지 주교와 함께 15명의 고향 방문 단원이 함께한 평양 고려호텔 면담실 제1영화관은 임시 성전이 됐습니다. 여기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홍성철(미카엘) 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강성숙(로욜라) 수녀, 가수 하춘화(체칠리아) 씨 등이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의 주례로 거행된 이날 미사는 분단 이후 북한 땅에서 공식적으로 봉헌된 최초의 미사였습니다. 이날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었습니다. 불과 1년 전인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의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에 중단된 미사 가톨릭신문은 9월 29일자 1면에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어 7면에서 3박4일 동안 이뤄진 북한 방문 소식을 화보와 함께 전했는데, 특히 첫 미사를 집전하는 지 주교의 감격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평양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한 지주교는 미사 중 본기도를 바치다가 눈물이 복받쳐 약 2분간 미사가 중단됐다. 이날 미사가 마침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 미사인 데다가 전날 37년 만에 누이동생을 상봉한 여운 때문인지 지 주교가 ‘순교자’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더 이상 잇지 못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울어 미사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7면) 지 주교가 복받치는 감격에 소리 내어 울자 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흐느꼈고, 면담실은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지 주교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1백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감격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남한 신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고, 민족 화해를 위한 교회의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상징적 사건이 됐습니다. 교차 방문의 정치적 배경 감격적인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해빙된 남북 관계와 국내의 정치적 필요성이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1984년 남한에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하면서 북한이 구호물자 제공을 제의했고, 이를 정부가 수용하면서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후 화해 무드가 조성됐고 1973년 이후 중단됐던 남북 적십자회담이 재개됐으며, 이를 통해 교차 방문이라는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부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반도 긴장 완화가 절실했습니다. 나아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진 가운데,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1985년의 교차 방문은 최초의 이산 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성과인 동시에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와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남북한 당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멸공’에서 화해와 일치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교회 안에서도 분단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신학적 성찰이 심화됩니다. 북한에서의 첫 미사는 한국교회가 멸공에서 복음적 화해와 일치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남한 교회는 분단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멸공의 이념을 취해왔습니다. 통일은 북한 정권의 멸망과 교회의 수복을 의미했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현대 세계와의 대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됐습니다. 특히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진정한 평화는 대결이 아닌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을 얻게 됐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교회는 교회의 공식 사목 방침으로 민족 화해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의 과정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미 1982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를 발족한 데 이어 1984년에는 북한선교부가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된 뒤, 북한선교회로 명칭이 바뀝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5년에는 서울대교구와 각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멸공을 넘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교회의 확고한 사목적 지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85년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의 민족 화해를 위한 노력은 더욱 담대해집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평양에서는 장충성당이 준공되고 당시 신부였던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와 정의철(다마소) 신부가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10월 30일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지학순 주교와 달리 공식적인 교회 대표 자격으로 북한 땅을 밟은 두 신부의 방문은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10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3) 가톨릭농민회, 소몰이 시위

1980년대 대한민국은 압축적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억압적 통치가 맞물려 사회 전반에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파열음을 내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이래 국가 주도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 전략 속에서 농업 부문은 철저히 소외됐고, 저곡가 및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접어들어 신군부 정권이 물가 안정과 산업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농축산물 수입 개방을 본격화함에 따라 농촌 경제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가 극적으로 폭발한 것이 1985년 전국 농촌 지역을 강타한 ‘소몰이 시위’였습니다. “재벌은 돈 밭에 농민은 똥 밭에” 1985년 7월 17일, 전남 함평 우시장에서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 마양분회 회원 김영천 씨가 2년 동안 키우던 소를 망치로 때려눕혔습니다. 105만 원에 사서 2년 10개월을 키운 소가 산 값의 절반도 안 되는 45만 원에 값이 매겨졌습니다. 분을 견디지 못한 그는 철물점에서 망치를 구해와 소의 머리를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그해 7월과 8월, 전국을 휩쓴 소몰이 시위는 일부 이익 집단의 생존권 투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사정권의 기만적 농업정책, 국제 자본의 통상 압력 그리고 정권 실세의 부패가 결합해 농민의 인간다운 삶을 수탈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1978년 2월 ‘수입자유화기본방침’을 확정한 데 이어,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인플레이션 억제와 독점 자본의 임금 상승 압력 완화를 위해 저물가 정책을 펴면서 농산물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350여 종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외국산 농축산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상황을 극단적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정부의 기만적 정책이었습니다. 정부는 ‘복합영농’을 장려하면서 소 사육을 권장했습니다. 빚을 내 비싼 값에 송아지를 입식한 농가가 120여만 호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뒤에서 싼값의 외국산 쇠고기와 생우 수입을 방조했고, 결국 소 한 마리 값이 개 한 마리 값보다 못하다는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천문학적 리베이트와 이권 탈취로 막대한 이익을 본 권력층의 거대한 범죄 카르텔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부패의 정점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전경환이 있었습니다.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시위의 전국 확산과 2만 농민의 합류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민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1985년 4월 기독교농민회(이하 기농)가 서울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미국 농축산물 수입 요구 반대 규탄 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농민운동이 국가 권력과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진입했음을 선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가농과 기농이 지역 단위로 조직적 역량을 결집하는 가운데, 경남 고성에서 7월 1일 처음으로 소몰이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실내 집회와 달리 소와 경운기를 몰고 거리로 진출했고, 경찰도 소가 날뛸 것을 염려해 함부로 최루탄을 쏘지 못했습니다. 쉽게 경찰 저지선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고성에서 시작된 소몰이 투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7월 12일, 충북 음성군 무극읍 무극성당 앞에 집결한 가농 회원들은 세 차례에 걸친 경찰의 저지를 뚫고 음성군청까지 행진했습니다. 100여 명의 농민과 8마리의 소, 경운기 7대가 함께 한 시위 행렬은 200m나 됐습니다. 7월 19일,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300여 명의 농민과 100마리의 소, 경운기 20대가 참가한 시위는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습니다. 막아선 청소차를 밀어내고 경찰차 3대를 언덕 밑으로 굴려버렸습니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경찰, 십자가 탈취 손상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전국에서 전개된 소몰이 시위는 모두 22건, 시위에 참가한 농민의 수는 2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농민 문제의 심각성을 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계기였고 전두환 정권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광주 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집권 세력은 소몰이 투쟁이 격렬해지자 위기를 감지하고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습니다. 소몰이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7월 28일 전북 완주에서는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평화적 십자가 행렬’이 가농 전주교구연합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1일자는 7면에서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전주 농민회 경찰과 충돌 - 소값 폭락에 대한 농민들의 소몰이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7월 28일 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주관으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행해진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평화적 십자가 행렬’을 경찰이 제지하는 과정에서 십자가가 경찰에 의해 탈취돼 손상되고, 교육국장 문규현 (바오로) 신부 및 농민회 회원 세 명이 크게 다쳤다. … 농민회 회원들은 이를 종교 탄압으로 보고 저녁 8시 전주 가톨릭센터에 집결해 ▲신부를 폭행하고 십자가를 손상시킨 경찰 색출 ▲구속 농민 석방 ▲수배자에 대한 수배령 철회 ▲소값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며 8월 3일까지 농성했다.” 당시 전주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는 해외교포 사목 방문을 위해 출장 중이었습니다. 총대리 김환철(스테파노) 신부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소몰이 시위나, 이와 관련된 시위 행위는 잘못된 농업 정책에 대항한 농민들의 당연한 생존권 행사”라고 규정하고 “가톨릭 농민회는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농민운동의 대전환 1985년 7월과 8월을 뜨겁게 달궜던 소몰이 시위는 9월 23일 가농이 주최한 전국 농민대회, 그리고 9월 25일 가농, 기농, 가톨릭여성농민회가 공동 주최한 ‘소값 피해보상운동 진상보고대회’를 통해, 전국 단위의 결집된 목소리로 수렴되며 1단계를 마무리했습니다. 완전한 피해 보상을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이 투쟁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사와 농민운동에 거대한 지각 변동을 가져왔습니다. 투쟁의 과정에서 가농은 파편화된 농민들의 분노를 하나의 정치적 구호로 결집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명서 발표와 성당이라는 물리적 성역 제공을 통해 농민들을 탄압에서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나아가 가농은 이후 도시 노동자 및 학생 운동과 연대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족 자주, 평화 통일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 주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종교의 지지를 넘어서 한국 농민운동 사상 최초로 전국 단일 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을 1990년 창립해 정치 세력화함으로써 농민운동의 대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2) 상계동 철거반 수녀 집단 구타 사건

“지난 11월 4일 오전 서울 상계5동 철거 지역에서 철거민 위로차 이곳을 방문했던 수녀 10여 명이 철거반으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고 이 중 2명의 수녀가 머릿수건 ‘베일’을 빼앗기고 머리카락을 뜯기는 등 일련의 불상사가 발생, 교회 내외에 큰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서울 신당동·암사동 지역에 잇달아 철거 문제가 일어나면서 해당 지역 본당이 대책 마련에 나서는 등 도시 철거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전에 없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가톨릭신문 1986년 11월 16일자 7면) 전쟁터 같은 철거 현장 1986년 11월 4일 오전 11시경, 서울 상계5동 철거 지역은 전쟁터와 다름없었습니다. 강제 철거를 위해 철거반 1000여 명과 가옥주 100여 명이 진입했고, 전투경찰 250여 명이 이들을 호위했습니다. 주민 100여 명이 저지선을 구축했고, 양측이 격돌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폭력은 현장을 찾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까지 향했습니다. 철거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선교 수녀회 소속 수녀 10여 명이 현장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수녀들을 골목으로 몰고 집단 구타를 가했습니다. 폭력은 구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2명의 수녀가 머릿수건을 빼앗겼고, 머리카락이 뽑혀 나갔습니다. 폭력은 성적, 인격적 모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수녀들 옷 벗겨라”, “머릿수건을 빼앗아 수녀 화형식을 하자”는 등 폭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현장에서는 빈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생존권을 옹호해 온 미국 출신의 예수회 정일우(요한) 신부도 표적이었습니다. 옥상으로 피신, 깨진 장독을 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해 가까스로 부상을 피했지만, 정 신부로 오인된 다른 한 신부가 구타를 당했습니다. 성직자와 수녀들이 대낮에, 그것도 공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된 폭력에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충격과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사태 종료 2시간 후인 오후 4시50분경,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벼랑 끝 빈민촌 철거민들 1980년대 대한민국은 독재 정권의 철권통치가 극에 달했고, 압축적 자본주의 성장이 불평등을 극대화하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공업화 정책과 이농으로 수많은 농촌 인구가 대도시로 유입, 도시 빈곤층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들은 도시 외곽에 ‘달동네’ 빈민촌을 형성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1986년)과 서울올림픽(1988년)을 유치했고, 이를 빌미로 도시 미관 개선과 불량 주택 정비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건설 자본, 투기 세력이 ‘합동재개발’ 방식을 도입해, 토지 및 가옥 소유주에게만 개발 이익을 분배하고, 영세 세입자와 무허가 정착민들을 폭력적으로 축출하는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곤궁한 삶이나마 그런대로 생존을 영위하던 철거민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강제 철거는 국가 공권력과 결탁한 개발 자본이 도시 빈민의 인권과 생존권을 철저히 유린하는 구조적 폭력이었습니다. 철거 현장에서는 용역 반원들의 물리적 폭력과 경찰의 묵인 속에서 수많은 인권 유린이 자행됐습니다. 철거민들의 집단적 저항 도시 빈민의 인권 침해가 본격화된 첫 사례는 19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 철거민 강제 집단 이주 폭동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개신교계와는 달리, 천주교는 전통적 의미의 구호와 복지사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곧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현상임을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1986년 10월 19일자 4면에는 “‘복지’ 차원에서 ‘참여’로 전환… ‘도시빈민사목’ 방향이 바뀌고 있다”라는 제하로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분석했습니다. 이 보도에 따르면, 1976년 서울 난곡동 빈민 지역에 공동체가 형성됐고, 특히 1977년 경기도 소래에 ‘복음자리’가 탄생함으로써 교회의 도시빈민사목이 본격화됐습니다. 1980년대 빈민들의 저항이 조직화된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결정적인 무대는 1983년에 시작된 서울 목동 신시가지 개발 현장이었습니다. 목동 철거 투쟁에서 주민들은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과 자본의 탐욕에 직면해 견고한 연대와 집단적인 저항을 선택했습니다. 교회는 목동 철거민들의 절박한 투쟁에 적극 화답하며 참여의 폭을 넓혔습니다. 1970년대 빈민사목은 소수 개인의 활동에 머물렀지만, 이제 지역교회 전체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목동본당을 구심점으로, 서울 제7지구에 속한 본당 사제들이 연대해 철거 현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경찰의 폭력을 저지하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도 철거민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 운동이 일어나는 등 지구 차원의 조직적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들불처럼 번진 연대 투쟁 목동에서의 혹독한 경험과 연대 투쟁은 한국 도시빈민 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토양이 됐습니다. 목동 철거민들이 틔운 연대 의식의 싹은 상계동 등 타 지역의 철거 투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이는 특히 1986년 상계동 합동 재개발 철거 투쟁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고 비극적인 양상을 띠며 폭발했습니다.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불량 주택’ 밀집 지역으로만 여기던 상계동 일대에 전면적인 재개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상계동 이외에도 신당동과 암사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이 재개발의 광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상계동 철거 과정은 공권력의 비호 아래 자본이 자행하는 폭력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쇠 파이프와 해머로 가옥을 부수고 가재도구를 길거리에 내동댕이쳤습니다. 하지만 굴삭기의 삽날이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가운데서도 주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폐허가 된 집터 위에 천막을 치고 토굴을 파서 겨울의 혹한을 견뎌냈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철거반의 침탈에 맨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생존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남성들이 일터로 나간 사이, 마을을 지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끝까지 저항한 이들은 여성들과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수녀 집단 구타 사건은, 물리적 폭력이 종교적 신성함과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어떻게 철저하게 짓밟았는지를 고발하는 한국 철거 운동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후에도 인권 유린이 난무하는 철거민 문제는 여전히 반복됐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2009년 용산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재개발에 반대하며 농성하던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재개발 갈등을 넘어, 국가 권력, 개발 정책, 시민권 문제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1)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 납치 사건

“전주교구 문정현 神父 피랍 15시간 - 15시간 불법 강제 피랍에 항의, 단식에 들어갔던 전주교구 장계본당 주임 문정현 신부가 단식 7일째인 21일 당국이 정식 사과함으로써 단식을 풀었다. 이와 함께 20일부터 가톨릭센터에서 집단 단식 농성 중이던 일부 성직자 및 평신도 40명도 ‘사과’를 듣고 해산했다. 5·18민주화운동 5주기를 앞둔 15일 오전 9시30분경 문 신부를 강제 납치, 88고속도로를 거쳐 동해안 고속화도로를 경유, 경북 백암온천 입구까지 연행했다가 16일 새벽 1시경 장계성당에 돌려보낸 기관원들은 문정현 신부의 단식을 필두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항의가 강력해지자 21일 오후 4시경 교구청을 방문, 정평위 비상대책회의와 박정일 주교, 문정현 신부에게 차례로 사과를 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자 7면) 정부와 교회의 갈등 재개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와 교황 방한을 전후해, 교회와 정부는 행사 개최를 위해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축제의 분위기가 걷힌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정부와의 갈등은 다시 본격화됐습니다. 그 바탕에는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고통을 겪는 민중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민주화 운동 그리고 노동, 빈민, 인권 등 부조리가 만연한 제반 영역에서 참된 복음화와 인간화를 위한 노력에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정부와 교회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이 본격화된 사건이 5.18민주화운동 5주기인 1985년 5월 전주교구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 납치 사건입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5월 26일자 7면은 불법 납치에 대해 항의하며 7일간 단식하던 문 신부가 당국의 사과로 단식을 중단한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지면에는 전국 각 교구의 5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문 신부의 납치와 단식 그리고 5주기 추모 소식이 나란히 실린 지면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문 신부는 당시 “이번 납치는 5월 17일 광주 남동성당에서 있었던 광주 의거 추모미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며 “신부라는 특권을 갖고 산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런데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얼마나 곤욕을 당하겠는가”라며 공권력의 폭력과 인권 유린을 비판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촉구 5.18 민주화운동 5주기인 5월 18일을 앞두고 정부는 추모 행사 저지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전국에서 온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2000여 명이 하루 전날인 17일 저녁 7시30분 남동성당에서 추모미사 및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광주 정평위가 주최한 이날 추모식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됐던 광주 항쟁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광주 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당시 서울 구의동본당 주임이자 정평위 중앙위원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5월 17일 광주대교구 ‘5.18 광주의거 추모미사 및 추모식’에서 강론을 통해 “언제까지 광주를 묻어둘 수는 없다”며 “속히 진실을 알려 화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추모 행사들을 축소하고 저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비 검속 과정에서 문 신부가 납치됐던 것입니다. 문 신부는 이에 대해 항의, 단식에 들어갔고 20일부터는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 40여 명이 가톨릭센터에서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교회 내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21일 오후 4시경 납치했던 기관에서 전주교구청으로 박정일(미카엘) 주교와 문정현 신부, 그리고 정평위 비상대책위를 차례로 방문, 사과함으로써 모두 단식 농성을 풀었습니다. 전방위적인 사회 참여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는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의 부조리를 양산했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가난한 민중들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교회의 사회교리에 바탕을 두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부와 극심한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1984년 7월부터 노동자들의 단결권 보장 등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전국 서명운동에 돌입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반년 만인 1985년 2월 25일까지 총 12만4941명의 서명을 모아 5월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또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85년 3월 근로자의 날을 맞아 정부 당국에 노동자들의 최저생계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저임금제 실시’와 정당한 교섭을 위한 ‘노동 3권 보장’을 강력히 촉구하며 노동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권과 빈민 문제로도 확산됐습니다. 정평위는 1985년 4월 11일 정치범과 양심수들의 조속한 석방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여기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민청학련, 오송회,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과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 정치인 및 종교인들의 사면과 복권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1985년 하반기에는 서울 목동과 신정동 일대 신시가지 개발 계획으로 대규모 철거민 사태가 발생하자, 목동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목동지역 철거대책 추진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이들은 무허가 철거민들의 생존권 보호를 위해 ‘선입주 후철거’ 및 철거 건물에 대한 현실적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시 당국과 크고 작은 충돌을 감내하며 끝까지 연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합니다. 그 여정은 고단하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었고 반독재 저항의 강력한 구심점이었습니다. 독재 권력은 학생 시위를 봉쇄하기 위한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 문정현 신부 불법 납치,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은폐 등 폭력으로 대응했지만 이는 오히려 천주교회 전체의 저항과 연대를 촉발하며 국가 권력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자충수가 됐습니다. 마침내 무소불위의 제5공화국 철권통치는 온 나라를 뒤흔든 1987년 6월 민중 항쟁으로 무너져 내릴 운명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이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0)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

“한국 가톨릭교회와 문화 종합 정리 -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지난 80년부터 기획, 만 5년여의 각고 끝에 간행된 ‘한국 가톨릭대사전’은 2백 년 한국 천주교 문화를 집대성하는 획기적인 작업으로 각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백 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2백 주년을 마무리하고 복음화 3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시점에서 간행돼 의의가 깊은 ‘한국 가톨릭대사전’은 한국 가톨릭교회와 문화 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바른 개념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한 해답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가톨릭신문 1985년 2월 24일자 1면) 역사상 최초 「한국가톨릭대사전」 발행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가톨릭대사전」 발행을 기획했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주관해 1980년부터 기획에 들어가 5년 동안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85년 2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게 됐습니다. 이는 200년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 종교의 사상적 깊이와 그 종교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엮은 ‘대사전’의 존재 여부입니다. 특정 종교의 교의, 역사, 문화, 철학, 그리고 제도적 규범을 총망라한 사전 편찬은 단순한 출판 및 인쇄 사업을 넘어섭니다. 이는 해당 종교 공동체가 지닌 학문적 역량의 총결산이자, 시대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세계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성사의 큰 기념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 수용으로 세워진 교회라는 독특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여 년에 걸친 혹독한 박해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독재 정치라는 근현대사의 격동을 거치면서 생존과 재건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 학술적 토대는 서구교회의 성과를 번역, 수용하는 수동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폭발적인 교세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 학문적 성숙을 모색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었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해 이러한 각성을 구체적인 기념사업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대사전의 발행이었습니다. 200년 천주교 문화 집대성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이 원대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5년 2월 20일 마침내 「한국가톨릭대사전」이 처음 선보였습니다. 이 대사전은 단순히 서구 신학의 성과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한국교회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편찬,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200년 한국 천주교 문화를 집대성하는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작업으로 각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편찬위원장 최석우(안드레아) 몬시뇰(당시 신부)을 비롯해 100여 명의 전문 학자들과 연구진이 집필과 감수에 동원되었으며, 교회법, 교회사, 문예, 사회과학, 성서, 신학, 종교학, 철학, 한국교회사 등 총 9개의 세분화된 분과 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대사전은 4·6배판 크기로 1430쪽에 달하는 본문편과 480쪽 분량의 별책부록 등 총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5000여 개의 표제 항목을 수록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학술적 성과는 전체 항목 중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2000여 개가 한국교회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서구 신학 사전의 틀을 맹목적으로 차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철저히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망라하려는 학문적 독립 의지의 발현이었습니다. 또한 나머지 3000여 개의 보편교회 관련 항목 역시 가능한 한국교회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되도록 서술 방침을 정했습니다. 특히 별책부록에는 성경 통계, 교황청 조직, 교부와 성인들에 관한 문헌 자료는 물론이고, 한국교회의 상세한 연표, 초기교회 신자의 가계표, 한국 순교자 명단 등 75종류의 귀중한 1차 사료들이 수록되어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식의 보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간행과 동시에 이 사전은 사목자들의 교리 교육과 선교 활동의 준거는 물론 평신도 재교육을 위한 종합 자료로 널리 활용됐습니다. 새 「한국가톨릭대사전」 총 12권 발행 한국교회사연구소는 4년 뒤인 1989년, 초판 대사전의 일부 오류와 누락된 서술 등을 수정·보완해 재판을 발행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학술적 진전은 단권 사전의 물리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신설된 ‘보유편(補遺篇)’의 간행이었습니다. 초판 본책에서는 자료 수집의 어려움으로 인해 주로 1950년 이전의 본당사(本堂史)만을 다루는 데 그쳤으나, 새롭게 발간된 ‘보유편’ 제1권에서는 6·25전쟁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1950년 이후의 현대 본당사를 상세히 수록하여 역사 서술의 연속성을 확보했습니다. 이 대사전 간행을 통해 축적된 역량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총 12권으로 완간된 새로운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1990년대 이후 급변한 시대와 사회 변화를 성찰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방대한 가르침과 새 교회법(1983년 개정)의 규범들을 체계적으로 담아낼 새로운 기획이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1993년부터 다시 시작된 새로운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 작업은 무려 13년에 이르는 험난한 장정 끝에 2006년 12권으로 완간되는 대역사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총 9952쪽의 방대한 분량에 8000여 개의 항목(가경자~힐턴), 1만여 점의 사진과 도표를 담고 있으며, 62명의 편찬위원을 포함한 각계 전문 집필자 1500명이 참여한 대장정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성과는 이미 1980년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엄청난 인력과 재정적 투입을 통해 대사전 발간을 이뤄냈던 숭고한 노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85년 발행된 초판 「한국가톨릭대사전」이 갖는 교회사적 의미는 참으로 막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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