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6) 가톨릭신문 속 월드컵

2026 FIFA(국제축구연맹) 북중미 월드컵이 6월 11일 개막해 7월 19일까지 이어진다. 한국 대표팀도 6월 12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체코전을 시작으로 장정에 오른다. 월드컵이 명실상부한 지구촌 축제로 불릴 정도로 관심을 끄는 스포츠 이벤트인 만큼 그동안 가톨릭신문도 월드컵에 관한 기사를 꾸준히 보도해 왔다. 가톨릭신문에서 찾을 수 있는 첫 월드컵 보도는 1982년 6월 27일자(제1311호)에 실린 기사다. 당시 기사는 스페인교회 주교단이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한 24개국을 환영하며 “일치된 형제애에 공헌하길 바란다”고 당부했음을 전했다. 같은 해 8월 1일자(제1316호)는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의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당시 기사에는 “수천 명의 로마 시민들이 이탈리아 국기를 몸에 두른 채 모든 분수대로 뛰어들었다”며 “7월 12일 산드로 페르티니 대통령이 퀴리날리궁에서 선수단에게 오찬을 베푸는 동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화를 걸어 이탈리아 선수단의 훌륭한 승리에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한국이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1986 멕시코 월드컵)에 진출하자, 가톨릭신문은 1985년 11월 10일자(제1480호)에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축구인들의 숙원이자 민족의 숙원이었다”며 “이 순간 거짓과 시기와 증오는 사라졌다”고 기쁨을 표했다. 반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벨기에에 패하자, 1면에 연재되던 신앙·시사 비평 칼럼 ‘걸림돌’을 통해 “한국팀에 대한 기대와 예상이 빗나가면서 잠을 자지 못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을 것”(1990년 6월 17일자(제1709호))이라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온 국민이 열광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보도가 가장 활발했다. 개막을 앞둔 2002년 3월 31일자(제2292호)에서는 창간 75주년 특집 ‘월드컵과 교회’를 통해 축구와 교회의 다양한 관계와 축구를 매개로 한 선교 방안을 제시했다. 전국 교구의 손님맞이 준비 현장도 전했다. 5월 19일자(제2299호)는 “서울대교구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선수들이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대회 기간 중 매 주일 세 곳에서 외국어 미사를 거행한다”며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을 소개하는 책자를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전주교구에서는 셔틀버스와 문화 행사 등을 준비하고, 수원교구에서는 무료 민박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회 기간 중 재미난 일화와 응원 열기도 조명했다. 6월 30일자(제2305호)에서는 가톨릭신문사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가 준비한 ‘주 5일제’ 관련 학술 포럼이 한국과 스페인 간의 8강 경기 시간과 겹쳐 부득이하게 연기된다고 밝혔다. 전국 각 교구·본당·수도회 응원 현장의 열기를 취재하기도 했다. 기사에서는 “몇몇 수녀들은 경기를 관람하지 않고 성당에서 승리의 기도를 바쳤고, 대부분은 끝날 때까지 묵주기도로 한국의 선전을 기원했다”고 묘사했다. 7월 7일자(제2306호)는 수원교구가 ‘월드컵을 화해와 평화의 운동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북한 어린이들에게 축구공 2002개를 선물한 소식도 전했다.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5) 교회가 바라본 불교

5월 24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한국교회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에 자리 잡은 불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불교의 경축일을 맞아 매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가톨릭신문이 보도한 부처님 오신 날 축하 메시지와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첫 축하 메시지는 1987년 5월 10일자(제1554호)에 보도된 하느님의 종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축전으로 추정된다. 기사는 김 추기경이 “조계종 성철 종정에게 ‘석존탄신의 뜻깊은 날을 맞아 자비의 가르치심이 겨레와 온 누리를 화평의 길로 이끌어 주기를 마음으로 축원하며, 종교인 모두가 나눔과 섬김으로써 인류의 참 생명에 헌신할 다짐을 하는 날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고 밝혔다. 또한 1997년 5월 18일자(제2053호)는 종교 간 일치를 위한 김 추기경의 노력이 매년 지속돼 왔음을 알리고 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 평의회(현 종교간대화부)는 1995년부터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은 1996년 5월 19일자(제2003호)에서 당시 평의회 의장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이 사랑의 문화를 만들기 위한 종교 간 상호협력을 제의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간대화부는 올해 5월 1일에도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위한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제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부는 올해 5월 1일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위한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제목의 메시지를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제이콥 쿠바카드 추기경 명의로 발표했다. 한국교회는 2000년 첫 공식 메시지를 발표했다. 2000년 4월 30일자(제2198호)는 당시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장이던 고(故) 최기산(보니파시오) 주교가 불교계에 축하 메시지를 전했음을 보도했다. 아울러 기사는 “교황 또는 주교 개인 명의로 메시지를 발표한 일은 있으나 한국교회가 주교회의 차원에서 경축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새천년을 맞아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종교 간 대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가톨릭신문은 이처럼 타 종교와 친교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이 있다고 풀이한다. 고(故) 한스 큉 신부의 기고로 공의회의 성과를 논한 1966년 4월 10일자(제514호)는 “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고 해도 타 종교의 영성·윤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증진해야 한다”며 “교회는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를 존중한다”고 평했다. 또한 공의회 문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를 바탕으로 1968년부터 1969년까지 8회에 걸쳐 ‘대화를 위한 시리즈 - 자비에 관하여’를 연재했다. 가톨릭신문은 2024년부터 ‘이웃종교 만남’ 지면을 통해 불교계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와 종교인들의 활동상과 종교 간 친교를 위한 노력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4) 가톨릭신문이 전한 성모 신심

5월은 성모 성월이다. 1622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제정된 이후 교회는 이 시기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고 특별한 은총을 청하며 공경을 표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삼고 있는 한국교회는 태동기부터 특별한 성모 신심을 간직해 왔다. 가톨릭신문이 전한 한국교회의 성모 신심을 돌아보자. 가톨릭신문의 첫 성모 신심 보도는 1928년 8월 1일자(제17호)로 추정된다. 당시 기사는 “세상에는 천주교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기보다 성모 마리아를 존경한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성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느님의 어머님, 둘째는 영원한 동정, 셋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부터 올바른 성모 신심에 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해 온 가톨릭신문은 한국교회 성모 신심이 박해 시기인 19세기부터 형성돼 있었음을 밝힌다. 1996년 5월 5일자(제2001호)와 2004년 8월 15일자(제2411호) 등에서는 박해 당시 순교자들이 묵주 기도에 의지했으며, 압수된 물품 중에는 묵주, 성모 상본 등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성모 신심 단체의 활동도 여러 차례 소개했다. 1953년 발행된 지면들에서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운동을 안내하고, 도입 소식을 알렸다. 같은 해 5월 15일자(제125호)는 “성모님의 ‘죄인들의 회개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응답하는 운동이 곧 푸른 군대”라며 “회원은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고 희생하며, 죄를 멀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1974년 5월 19일 파주 자유의 다리에서 개최된 ‘제1회 통일 기원 기도회’ 소식도 지면에 실었다. 1962년 12월 16일자(제355호)에서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 10주년을 기념해 1953년 7월 28일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첫 쁘레시디움이 조직된 사실과 이는 기도와 활동으로써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채로운 성모 성월 행사도 보도했다. 1949년 6월 1일자(제76호)에는 대구대교구 계산동 주교좌본당 학생들이 성모상 행렬에 참여한 소식이 담겨있다. 기사는 “성모 성월을 기념해 성모님께 꽃다발을 봉헌하고, 성가 제창과 공동 기도를 드린 후 행렬에 들어갔다”며 “이날은 북한의 종교 박해 속에서 고통받는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교우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뜻깊은 행사”였다고 전했다. 또한 2010년 5월 23일자(제2698호)에서는 부산교구 양산 물금본당이 5월 한 달간 ‘성모 성월 축제’를 지내며 ‘파티마의 성모님 가정 순례’, ‘성모님과 함께하는 어린이날·어버이날’ 등의 활동으로 성가정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명시했다. 올바른 성모 신심을 촉구하는 역할도 해 왔다. ‘파티마 제3의 비밀’ 공개 전 유언비어와 나주 윤 율리아 관련 문제 등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했다. 1996년 5월 5일 자(제2001호) 사설에서는 “성모 신심이 그 열성만큼 삶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마리아를 닮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성모 신심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3) 가톨릭신문 속 신학교 역사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시기에는 그중에서도 사제, 수도자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한다. 신학교는 사제 성소 식별과 계발을 도우며, 사제를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 가톨릭신문이 담아온 ‘성소의 요람’, 신학교 기사들을 살펴본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는 프랑스 출신 메스트르 신부가 1855년 충청북도 배론에 세운 ‘성 요셉 신학교’로 추정된다. 병인박해 시기인 1866년까지 운영됐으며, 박해가 끝난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로 재건됐다. 이후 1945년 ‘경성천주공교신학교’를 거쳐 1959년 가톨릭대학교까지, 가톨릭신문은 신학교 역사에 관한 자료를 취합해 종합 정리하는 기사를 1970년대부터 다뤄왔다. 또한 1931년 촬영된 성 요셉 신학교와 이후 촬영된 예수성심신학교 터 사진을 보유하고 있어 초기 신학교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은 1962년 문을 연 대건 대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학교)의 설립 배경과 개교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1960년 11월 6일자(제253호)에서는 공사가 곧 시작된다는 소식과 함께 당시 제5대 광주대교구장이었던 고(故) 현 하롤드 대주교의 노력 덕분에 설립이 결정됐음을 알렸다. 새로운 신학교의 필요성과 ‘대건’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설명했다. 1961년 6월 18일자(제283호)에서는 “교회 발전의 토대인 사제를 늘리는 일은 신자와 본당 수 증가에 따라 시급해졌다”며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만으로는 필요를 충족할 수 없어 1959년 1월 21일 로마 성청(현 교황청)이 설립을 허가했다”고 전했다. 이어 “타국에서 얻은 성직으로 전교하고, 푸른 충절을 선혈로 새기며 한국교회에 빛을 남긴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이름을 ‘대건 대신학교’로 정했다”고 덧붙였다. 1914년 개교했다가 일제에 의해 폐교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1982년 개교한 선목신학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설립 소식도 다루고 있다. 1982년 6월 6일자(제1308호)에서는 개교기념식을 보도하며 초대 총장 고(故) 이종흥(크리산도) 몬시뇰의 말을 인용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해 현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활달하고 창의적인 목자 양성에 노력할 방침”이라고 설립 목표를 밝혔다. 신학교 설립 기사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984년 3월 4일자(제1395호)에서 수원가톨릭대학교가 1984년 3월 2일 입학식, 4월 초 개교기념식과 본관 건물 축성식을 열 계획임을 밝혔다. 특히 1984년 5월 6일자(제1404호)에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해 수원가톨릭대학교 본관 머릿돌을 축성한 소식을 호외로 발행했다. 이 외에도 부산·인천·대전가톨릭대학교 설립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올해 1월 4일자(제3473호)에서는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대성당이 재건축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장면과 2025년 12월 21일 이곳에서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사실을 기록했다. 가톨릭신문은 앞으로도 신학교의 모습을 담아내며, 교회의 미래를 이끌 사제 양성의 현장을 계속 보도할 예정이다.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2) 가톨릭신문 속 ‘부활’

“축 예수 부활. 그리스도는 죽음과 구속으로 인류를 구하셨다. 우리는 이에 감사하여야 하며,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하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이를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 가톨릭신문은 창간 1주년이 되는 1928년 4월 1일자(제13호)에서 부활을 맞아 위와 같은 글을 실었다. 그리스도 부활의 본질적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톨릭신문은 창간 이후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활을 둘러싼 여러 변화와 교회의 상황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부활 날짜에 관한 보도가 대표적이다. 1960년 1월 3일자(제210호)에서는 “최근 새로운 달력 개정 운동이 일어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고정하자는 등의 논의가 있으나, 교황청에서는 공익상 필요성이 분명하다면 이 문제를 공의회에서 논의하겠다고 알려져 있다”고 전하고, 이후 기사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해당 안건이 다뤄졌음을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날짜 고정은 무산됐지만,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날짜 산정 방식, 유래 등을 설명하는 기사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부활 제2주일에 지내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정 당시의 배경과 의미도 상세히 다뤘다. 2002년 4월 30일자(제2198호)에서는 제정 계기가 된 ‘자비의 사도’ 성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시성과 성인의 자비 신심을 전했다. 2001년 4월 22일자(제2246호)에서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첫 시행을 기념해 당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조규만 주교(바실리오·원주교구장)의 기고를 통해 하느님 자비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고찰했다. 대면 미사가 중단됐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상황도 담았다. 2020년 4월 12일자(제3190호)에서는 대부분의 교구가 TV와 인터넷 등에서 성주간·주님 부활 대축일 전례와 미사를 생중계하기로 한 내용을 실었다. 2020년 4월 19일자(제3191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텅 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파스카 성야 미사를 주례했다”며 “코로나19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오랜 격리 생활로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했다”고 전했다. 2022년 4월 24일자(3221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약 5만 명의 신자들과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소식을 전달했다. 이처럼 가톨릭신문은 부활을 시대의 맥락 안에서 조명해 왔다. 올해 4월 5일자(제3485호) 사설에서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를 선택하고, 무관심과 혐오를 넘어 이웃의 아픔에 마음을 여는 자리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했다. 가톨릭신문은 앞으로도 시대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도록 그 여정을 함께 기록해 나갈 것이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 한국 가톨릭 언론의 100년 완성할 ‘마지막 퍼즐’

1927년 4월 1일 대구의 남방 천주공교 청년회는 한국 가톨릭 언론의 효시인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창간했다. 5명의 젊은 평신도들이 펴낸 천주교회보는 이후 ‘가톨릭신문’으로 불리며 올해로 창간 99주년을 맞이했다. 가톨릭신문은 100년 역사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창간 100주년을 준비하며 가톨릭신문이 담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재조명한다. 소식보도(消息報道), 의견교환(意見交換), 보조일치(步調一致). 천주교회보는 창간사에서 이와 같은 창간 이념을 밝혔다. 일제강점기 시절 창간돼 한국전쟁, 민주화시기 등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지나면서도 가톨릭신문은 사시를 충실히 지키며 그 임무를 수행했다. 교회 안의 소식을 가장 충실히 전하는 한국교회 역사의 산증인이자, 신자 대중의 신앙과 교회 생활을 전하는 교회 언론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가톨릭신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다. 창간 이후 현재까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삶을 기록해 왔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생활과 실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가톨릭 액션 활동과 복음 선포 활동,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과 한국 최초의 공의회, 일제의 교회 탄압 등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지면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료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당시 지식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 여러 수도회의 진출과 창설, 각 교구와 본당들의 설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들, 교계 제도의 설정 등 다른 매체에서는 온전히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적 가치가 높은 가톨릭신문의 창간호가 사라졌다. 분실 사유를 명확히 단정할 수 없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1933년 전국주교회의 결의에 따라 자진 휴간했을 당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혼란했던 시기 등이 거론된다. 다만 천주교회보 1951년 12월 1일자(제100호)에 창간호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미뤄볼 때 1950년대 이후 유실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1955년 9월 14일 자유당 정권에 의해 대구 매일신문사가 테러를 당하고 주필이 구속된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 이후, 1955년 5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발행된 호수가 다수 소실된 전례가 있다. 본지는 창간호를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2년 8월 15일자 제1317호에서 영인본 제작을 위해 창간호를 비롯한 결호를 찾는다는 광고를 실었으며, 2017년 6월 11일자 제3048호에서도 기증을 요청했다. 창간 100주년을 1년 남기고, 사라진 신문들의 행방을 다시 한번 수소문한다. 창간호(1927년 4월 1일자)를 포함해 제45호, 제154호, 제155호, 제158호, 제159호, 제160호, 제169호, 제181호가 그 대상이다. 가톨릭신문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리며, 메일( jebo@catimes.kr)로 제보를 기다린다.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