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한비야가 본명이에요?” “네, 세례명을 개명해서 본명으로 쓰고 있어요.” “비야라는 세례명도 있어요? 비야(飛野)라는 한자까지 있고요?”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때마다 듣는 질문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은 비아로 표기가 통일됐지만, 내가 세례받은 1970년대에는 삐아, 삐야, 비아, 비야를 함께 썼다. 교리 담당 수녀님은 비야로 골라주셨고, 영세 후 나는 세례명을 ‘새로운 삶의 증표’라 여기며 성당 밖에서도 될수록 한비야라는 이름을 썼다. 개명이 쉬웠던 어느 해, 아예 이를 본명으로 개명했고 공적 이름에는 한자가 필수여서 날 비(飛), 들 야(野)를 붙여 한비야(韓飛野)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한 씨라서 다행이다. 김비야, 박비야는 좀 어색하고, 변비야, 공비야라면 놀림감이 되었을 거다. 나비야, 왕비야도 괜찮지만, 어감상 한비야가 제일 예쁜 것 같다. 이름의 뜻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인도에선 내 사랑(Priya), 이란에선 이리 와(Biyā), 스페인어권에서는 길(Via)이고 베트남에서는 맥주(Bia)를 뜻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동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선 한은 물이고 비야는 큰항아리라는 의미란다. 극심한 가뭄이 든 에티오피아 마을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말하자, 일제히 어깨를 들썩이며 환성을 질렀다. 큰 물항아리가 왔다면서. 놀랍게도 그날 밤, 몇 년 만에 땅이 흥건할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름값 하기 버거운 이름도 많을 거다. 개신교인들이 대부분인 남수단에서 우리 긴급 식량 지원팀은 모세, 솔로몬, 마리아, 바울 등 신구약 인물들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한 팀원 이름은 예수였다! 발음도 우리말 그대로 ‘예수’여서 그를 부를 때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르는 사람도 이런데, 평생 예수로 불리는 그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울까? 생각해 보면 내 이름 비아(pia)도 절대 가볍지 않다. 비아는 라틴어 덕목에서 온 세례명으로 경건하고 신앙심 깊으며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고백하건대 오랫동안 나는 예쁜 세례명을 가졌다는 사실만 감사하며 살았다. 그런데 작년 봄, 피정 중에 각자의 세례명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에 비로소 깨달았다.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 이름을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라는 것을! 따라서 이름값을 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담긴 뜻대로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개인 묵상 후 나눔 시간에 피정 담당 노수녀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비아는 단순히 신앙심이 깊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무엇을 맡기시든 끝까지 충실하게 해 내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답니다. 지금까지 자매님이 걸어온 구호 활동의 삶과 딱 맞는 세례명이네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그동안 세례명을 마음에 쏙 드는 이름으로만 여겼을 뿐, 그 뜻과 소명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겠지? 50년 전에 하느님은 내게 새 이름을 내려주셨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그 이름값 하며 살고 싶다. 정신 바싹 차리고 살아야겠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이제 저는 조금만 돌봐주세요

“신입 요원을요? 절대 안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전후 복구 본부장에게 단호한 답장이 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입사 몇 달 차, 현장 경험 전혀 없는 햇병아리에게 그런 중차대한 현장 파견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월드비전 한국은 나를 보내야 했다. 한국 정부의 첫 긴급구호 자금이 투입되는 곳이고 여행가에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변신한 내 첫 파견에 언론의 관심도 커서, 현장을 알리고 국민적 모금을 이끌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48시간 이내에 꾸려지는 선발대에 반드시 합류해야 한다. “한비야 팀장을 위해 집중기도 부탁합니다.” 거절 메일을 받자마자 월드비전 회장은 전 직원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이어 이례적으로 국제 월드비전 총재에게 직접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재검토를 부탁했다. 나 역시, 개신교 신자가 대부분인 월드비전에서 우려와 반발에도 가톨릭 신자인 나를 발탁한 회장님의 선택이 옳았음을 이번 파견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두려웠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새내기 소방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심정이었다. 급하면 기도밖에 없다던가? 파견 논의가 오가던 며칠간 내 평생 가장 뜨겁게 기도했다. 시간만 나면 화살기도를 쏘아 올렸다. “하느님, 저를 보내주세요. 꼭이요.” 밤이면 고상 앞에 촛불을 켜고 무릎 꿇고는 떼쓰듯 기도하는 ‘떼쟁이 기도’를 드렸다. “보내만 주세요. 젖 먹던 힘까지 다하겠습니다.” 가까운 분들에게 부지런히 기도 부탁도 했다. 이웃 교우에게도 알렸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5살 지영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하느님께 기도할게요. 이제 저는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세요.” 앗살라무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2002년 2월, 마침내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았다. 놀랍게도 파견지는 난민촌 여자아이가 빵을 건넸던 헤라트였다. 약식 안전교육 후 식량 지원팀에 배치되어 처음 찾은 산악 마을은 참혹했다. 전쟁과 가뭄으로 7년째 농사를 짓지 못해 주민들은 풀로 연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즉각 2000가구에 식량을 배분하는 한편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20여 명의 아이들을 데려와 두 시간마다 치료용 죽을 먹였다. 2주쯤 지나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아이들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눈이 마주치면 웃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먹은 죽을 번번이 토하는 압둘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헤라트 본부로 돌아가는 날 아침, 압둘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바르르 떠는 손은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게 그럴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발 직전, 압둘을 안고 마지막 죽을 떠먹이며 말했다. “압둘, 넌 살 수 있어. 아니, 꼭 살아야 해.” 그러자 아이는 내 엄지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더니 작은 앞니로 힘껏 깨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 이렇게 힘세요. 꼭 살아날게요”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 하느님은 옆집 꼬마 천사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저는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간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세요!”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2면

난민 아이가 건네준 빵 한 조각

1초, 2초, 3초. 아이 한 명이 죽었다. 1초, 2초, 3초. 또 한 명이 죽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배부르게 먹지 못한 5세 미만의 아이들은 설사, 말라리아, 홍역 같은 병에 걸리면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다. 이들을 살리는 건 복잡한 수술이나 비싼 약이 아니다. 설사에는 링거 한 병, 말라리아에는 키니네 한 통, 홍역은 백신 한 병이면 된다. 약값은 1달러. 약 1500원이면 한 아이를 살려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나도 아프리카 오지 여행 중 처음 알았다. 지독한 길치인 나는 그날도 길을 잘못 들어 오지마을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영양실조로 바싹 말랐거나 배가 부어 있었지만, 처음 보는 동양인이 신기한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사진을 찍으려면 10여 명이 일제히 분홍색 혓바닥을 내미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나는 아이들을 ‘핑크 보이 1, 2, 3’이라고 부르며 삼색 볼펜으로 손목에는 시계를, 손가락에는 꽃반지를 그려주며 놀아주었다. 겨우 하룻밤 머물렀을 뿐인데 여행 내내 이 아이들이 생각났다. 결국 여행 경로를 바꿔 다시 그 마을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어른이 말없이 작은 무덤 두 개를 가리켰다. 내가 다녀간 직후 마을에 급성(수양성)설사가 돌아 핑크 보이 두 명이 죽었다고 했다. 너무나 가엾고 미안했다. 이 아이들은 1달러짜리 링거 한 병이면 살 수 있었는데, 내 주머니에는 천 달러도 넘게 있었는데. 그날 밤, 여행 후 홍보회사에 복귀해 세계적인 홍보인이 되겠다는 계획은 어디 가고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느님, 이 아이들을 살려주고 싶어요. 벼랑 끝에 매달린 아이들을 끌어올려 주고 싶어요. 세계 일주 끝나면 저를 이런 일 하는데 써주세요. 꼭이요!” 띄엄띄엄하던 이 기도를 매일 하게 된 건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아이 덕분이었다. 이란 국경도시 헤라트의 자생 난민촌 아이들은 감히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배낭을 멘 여자를 경계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나라에도 태권도가 인기라는 말을 들어서 기본동작 몇 개를 해 보이자, 아이들은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한참을 놀다 돌아가려는데 한 여자아이가 수줍게 다가왔다. 지뢰를 밟았는지 오른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은 아이가 내민 건 빵 한 조각! 난민촌에서 이 빵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헤일리 맘눈(고마워)” 하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와아!” 더 크게 환호하며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그날 저녁, 아프리카에서 했던 그 기도가 다시 튀어나왔고 그 후 매일 밤,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 난민촌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있는 힘을 다할게요. 꼭 시켜주세요. 꼭이요!” 그분이 길을 열어주신 게 분명하다. 6년간의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오자마자 국제 구호 개발 NGO 월드비전에서 특별 채용 제안이 들어왔고 입사 석 달 후, 긴급구호 팀장으로 첫 번째 파견된 곳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였으니 말이다.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지난 25년간 구호 현장마다 언제나 나와 함께 계셨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재난과 분쟁지역의 이웃을 도왔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국제구호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바람의 딸’로 불리며 세계 오지 여행과 구호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그건, 사랑이었네」,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아!」 등 11권의 책을 펴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