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인간은 누구나 믿으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 커피를 마신다. 만약 그 커피에 독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면,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믿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만약에 ‘이스라엘에 가는 비행기에 어떤 테러범이 시한폭탄을 그 비행기에 장착해 놓았다’라고 믿는다면, 그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서 살아간다. 약이나 의사를 불신하면 할수록 약의 효과나 치유는 더뎌지지만, 약이나 의사를 신뢰하면 할수록 약의 효과나 치유의 속도는 빨라진다. 우리가 사람이나 인간에 대해 믿으면 믿을수록 점차 그 대상에게 가까워지지만, 불신하면 할수록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이렇게 믿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의 삶에 깊숙한 바탕을 이루며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의 기본행위이며(W.카스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참조), 사람은 누구나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이 말에 어떤 이들은 ‘실제로 세상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존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믿음 없이도 살 수 있다’라며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삶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의 지평을 넓혀서 잘 살펴보면 비신자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실제로는 저마다의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비신자들은 ‘믿음이란 허황된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행위’라는 점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비신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결국은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믿음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결국 그들의 강한 신앙 거부가 그들도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비신자가 존재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니체의 ‘신의 죽음’ 선언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점차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우리 신앙인들이 깊이 각성하고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삶의 행동과 실천으로 세상에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이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믿는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믿게 되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말만의 신앙에서 벗어나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삶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증거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의존한다

신앙(Fides)이란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특별한 인식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록」에서 “님”이라고 불렀던 분, 그리고 우리가 항상 기도와 전례 중에 부르는 그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아는 인간의 특별한 인식이 바로 신앙이다. 이성(Ratio)이란 사물과 사물의 이치, 사건과 사건의 의미와 맥락을 받아들이고 알고 인식하는 인간의 개념적 사유 능력이자, 지성 활동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이성은 ‘하느님’이라는 신비(Mysterium)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 정신 속에는 신앙과 이성이 있다. 이 둘은 인간 인식의 두 영역이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인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과 사물의 이치를 인식한다.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신앙은 이성을 강화하고 순수하게 해주며, 이성은 신앙이 헛된 믿음과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을 보호해 준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신비 주변에 서성이는 사람은 철학자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도 모르고 거룩함도 모르는 사람은 이방인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의존한다. 신앙은 이성을 완전하게 해주며, 이성은 신앙을 받아들여 완전하게 된다. “이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고, 초자연적 진리를 역사적 조건 속에서 수용해야 하는 신앙은 이성의 날카로운 분석과 해명을 필요로 한다.”(이재룡 「회칙 ‘신앙과 이성’의 역사적 의미」 참조) 이렇게 이성은 신앙의 조명과 인도를 필요로 하고, 신앙은 이성의 검증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대이교도대전」 참조) 따라서 교회는 신앙만을 고집하는 신앙주의(fideismus)도, 이성의 자율성과 절대성을 내세우는 이성주의(rationalismus)도 반대한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한다. 끝으로 신앙 행위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믿어야 할 것이라고 선포된 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한 것임을 명백히 한다. 둘째, 신앙에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존재자는 바로 신 자체임을 명백히 한다. 이것은 곧 ‘신앙의 동기’에 대한 완전한 확실성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셋째,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에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곧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넷째, 계시된 신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이끌어 준다.”(김정호 「신을 아는가 믿는가?」 참조)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지식이 없으면 신앙은 그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첫째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는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느님께 내 삶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확증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때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살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실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막연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고통과 죄를 친히 짊어지신, 우리와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사랑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교리를 맹목적으로 외우기보다 깊이 이해할 때 신앙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 ‘사랑’이며, 그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이 하나를 이루신다는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때, 이 교리는 비로소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된다. 이처럼 신앙의 신비를 교리적 지식으로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정서적 위안을 넘어 흔들리지 않는 깊은 확신으로 나아간다. 둘째로, 신앙은 삶 속에서 그 참됨이 증명됨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때, 정말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는 삶을 통해 계속해서 합리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들이 일상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기쁘게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도 부활을 더 잘 믿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고통인 죽음 앞에서도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평화롭게 눈을 감는 모습을 볼 때, 신앙의 진실함은 더욱 강력하게 증명된다. 셋째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은총이 자연을 전제하고, 완전함이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두고 “신앙은 자연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은총이 자연을, 완성이 완성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신학대전」 참조)고 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적 지식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들, 이를테면 성황당의 고목나무, 호랑이 혹은 토정비결 같은 것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여 그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신뢰’이다. 즉, 이성과 지식이 밑받침되고 이를 통과한 신앙이지, 결코 허무맹랑한 신앙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과학자와 석학들도 하느님을 고백하고 믿었던 것이다. 넷째로, 믿음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한 역사적 사건, 곧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의 역사가 지닌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깊게 인식한 사람이 계속된 믿음의 결단을 통해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역사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으면 신앙은 그 완성에 이를 수 없으며, 그 신앙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앎은 믿음을 요구한다

근대의 학문 이론은 앎과 믿음이 서로 보완하고 의존한다는 통찰에 이른다. 앎과 믿음은 고유한 영역을 지니면서도, 서로 필요로 한다. 믿음 없는 앎은 오만이요, 앎을 포기한 믿음은 맹신이다. 앎이 믿음을 요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이성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이성의 인식 능력과 용어 파악 능력을 신뢰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 근본적인 믿음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성립할 수 없다. 둘째, 학문은 주로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통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며, 단지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가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하며 ‘중력 법칙’을 배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시공간에서 물체가 반드시 동일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100%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력의 보편성을 믿는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지식조차 실제로는 세계의 질서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자연의 일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어떤 학자도 자기의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고, 동료 학자들의 정보에 기댄다. 이는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은 이성의 실험 정신만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협력과 신뢰, 앞선 세대와 현세대의 협력과 신뢰가 바탕이 된 것이다. 넷째, 지식은 실재의 이해에 방향을 맞추고, 원인 중의 원인이자, 개별 실재를 초월하는 존재의 마지막 원천을 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은 경험적으로 체험될 수 없고, 오직 신뢰에 기초한 인격적 관심을 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종교관이 달라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실재를 ‘무(無)’, ‘제일원인(第一原因)’, ‘궁극적 실재’라고 객관적으로 부르고 여기서 멈추면, 존재의 신비 앞에서 서성이는 철학자나 지식인이 된다. 그러나 이 실재에 대하여 ‘신(神)’,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신앙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신학자나 신앙인이 되며, 지식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결국 인간의 지식과 존재 추구가 그 마지막 정점에 다다르면, 이제는 증명을 넘어선 인격적 응답과 신뢰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동의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 인격적 투신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가르멜의 성녀 대데레사(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바로 이 지점에서 큰 믿음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이라는 처절한 자기 비움을 지나, 큰 믿음을 가지고 존재의 궁극적 원천인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들의 삶과 체험은 앎의 끝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결코 허황된 집착이 아니라, 실재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증명해 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앎’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1+1=2이다’라는 수학적 진리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나, ‘인간이 사후 심판을 통해 천국, 연옥, 지옥에 간다’라는 교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렇듯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믿음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는 것이 사물, 식물, 동물, 인간, 자연, 우주와 같은 가시적 대상을 향한다면, 믿는 것은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 영혼, 내세, 천사와 같은 비가시적 실재를 향한다. 지식의 종착지에 다다르면 이 모든 가시적 세계가 보이지 않는 분, 즉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다. 결국 믿음의 세계는 지식보다 고차원적이며 깊은 실재를 다룬다. 우리는 하느님을 왜 믿는가? 보이지 않고,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우리의 시야와 지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시야 밖에 있는 분이다. 우리의 시야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현미경이든 천체 망원경이든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 되어도 볼 수 없는, 과학 기술 너머에 계신 그런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세계이며 오히려 현실이라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생각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이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근원적인 실재이며, 보이지 않는 분이 가시적인 모든 존재를 지탱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인간의 정신 안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계시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언급했듯이,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서 기인하지만, 지식은 경험에서 기인한다. 신앙은 교회의 공동체적 믿음에 뿌리를 두지만, 지식은 인류가 쌓아온 학문적 토대에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지식은 대상과의 ‘사물적 관계’라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복음과 믿음

신학적으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양심에 따르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 혹은 스스로의 깨달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던 이들, 즉 죄인과 세리, 창녀와 강도들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이다. 인생의 꼴찌들, 밑바닥 인생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교 이전에는 죄인, 세리, 창녀, 강도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 곧 구원에서 제외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엘리트나 학자, 귀족이나 부유한 이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 소외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못 배운 어부들인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로부터, 죄인이자 세리였던 마태오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혁명주의자 시몬으로부터,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얼마나 위대한 삶을, 얼마나 참된 진리와 행복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 준 역사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역사이다. 아무리 꼴찌 인생이라도, 아무리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인간은 완전히 선할 수 없다. 인간은 온전한 의인일 수 없다. 그러나 ‘선’ 자체인 하느님을 지향하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인간은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은 가슴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운동을 계속하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 사랑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상처를 받아 사랑의 문을 닫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 십자가 위에서의 지극한 사랑, 나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준 그 완전한 사랑을 기억하면서, 다시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흠이 없는 의인이어야, 성인들처럼 완전한 사랑을 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죄인임을, 나 자신이 연약함과 상처를 지닌 인간임을 예수님 앞에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인간은 구원받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나 자신이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임을, 구세주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성화주 성령님 앞에서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임을 고백할 때 구원받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셨다. 창조를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현세에서 필요한 은총 주심을 통하여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어 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졌다. 죄를 지어 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 주셨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믿음을 통해 구원은 시작되고, 사랑을 통해 구원은 완성된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온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아무런 공로도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인 것이다. 결국 믿음을 통해 구원은 시작되고 사랑을 통해 구원은 완성된다. 따라서 정의로운 삶과 사랑의 삶 없이는 구원은 완성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 속에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살아 계신 하느님이, 나를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셨다는 믿음 속에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존재’이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인간 그리고 교회를 통해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믿음 속에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믿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절이나 암자에서 ‘도 닦으며 앉아 있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불신 지옥, 믿음 천국” 한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나의 믿음을 통해 시작되었으니, 나의 정의로운 삶과 사랑의 삶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이다. 혼자 어려우니까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완성하는 것이 신앙이다. 말로만 하는 신앙은 반쪽짜리며, 교회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이 믿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사제와 수도자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원은 완성되고 더 큰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고 정욕을 지닌 인간이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사랑의 길을 걸을 때 구원받음을 믿는 것이다. 내 의지를 통해 율법을 지키고 깨달음을 얻을 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도, 깨달음을 다 얻지 못해도 나의 연약함을, 나의 ‘죄성’을 거룩한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사랑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사랑의 길을 가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이 사랑의 길을 걸음으로써 나의 죄까지도 씻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이고 이 길을 가는 자는, 사랑의 길을 가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 진리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사랑의 길을 가는 자, 누구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인간의 의지 동원한 자력 구원의 한계와 믿음

원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켰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믿어 십계명뿐 아니라 613개의 율법 조항을 지켰다. 예수님 시대에는 1만633개의 율법 세칙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백성들 대부분은 그런 조항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조항을 알았던 율법학자들도 사람들 앞에서는 율법을 지켰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어김으로써 위선자가 되었다. 따라서 유다인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성직자라 하더라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유혹에 쉽게 빠지는 존재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철학)를 찾았고 불교 스님들은 깨달음을 추구했다. 불교 스님들처럼 깨달음을 얻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을 얻는 사람은 1000만 명 중 한두 명 있을까 말까 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스님이 많다. 조계종만 대략 2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 스님들에게 가서 물어보길 바란다. “스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고기도 안 먹고 홀로 독수공방하며, 30년, 40년의 세월을 수도생활하셨는데 과연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스님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못 얻었어. 수도하다 병만 났지 뭐야.” 또는 “깨달음을 얻기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것이 솔직한 대답이고 이것이 수도를 한 수많은 스님의 경험일 것이다. 수도를 한 수도승이 이러하다면 수도하지 않은, 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돌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이라는 수도승이 있었다. 그는 히에이산에 들어가 20년 동안 여러 가지 고행을 했으나 정욕이 줄어들지 않았다. 수도할수록 정욕은 더욱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단념하고 하산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이란 이것이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는 자기가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죄인인 그대로, 아직 정욕이 있는 그대로, 아미타불을 믿기만 하면, 귀의만 하면(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구원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역사도 소승 불교에서 대승 불교로 그 역사가 넘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온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하느님의 구원 경륜 3단계와 믿음

우리는 마음속에 ‘인간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큰 질문을 지니고 있다. 이 큰 질문에 대하여 가톨릭 신학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첫 번째, 양심대로 살면 구원받는다. 두 번째,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 세 번째,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바라신다.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구원의 방법을 달리하셨다.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던 기원전 2000년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양심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기원전 1500년 모세의 시대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약 2000년 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아브라함의 시대, 율법도 모르던 시대에는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모세의 시대, 율법이 주어진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시대에는 믿음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결국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과정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3단계로 이루어졌다. 즉 양심의 단계에서 율법의 단계로, 율법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과정이 역사와 더불어 진화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은 양심과 율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양심과 율법을 포함하면서 초월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 속에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믿음이고, 죽어 있으면 죽어 있는 믿음이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홀론(Holon)’ 이론과 같다. 홀론이란, 그리스어로 전체를 뜻하는 ὅλος(holos)와 개체 혹은 부분인 ὀν(on)의 합성어다. 실재는 전체(whole)이면서 부분(part)인 홀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는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홀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온전한 원자는 한 온전한 분자의 부분이며, 그 온전한 분자는 한 온전한 세포의 부분이고, 그 온전한 세포는 온전한 한 유기체의 부분이다. 현실적 존재들의 각각은 단순한 하나의 전체도 아니고, 하나의 부분도 아니며, 다만 한 전체이자 부분인 하나의 홀론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포는 아원자, 원자, 분자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초월하고 있다. 믿음 역시도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결여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이 많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신자들은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갖춘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초자연 신학은 신앙을 다룬다

초자연 신학 또는 고유한 의미의 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전통적 분류 방법에 따르면 네 가지 있다. 성서 신학, 역사 신학, 조직 신학, 실천 신학이다. 첫 번째, 성서 신학은 ‘신앙의 원천성’을 다룬다. 확실한 신앙의 증서로서의 문헌의 발생 그리고 원래의 의미와 현재를 위한 의미를 다룬다. 성서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성서학, 구약학, 신약학, 구약 입문, 신약 입문 등이 있다. 두 번째, 역사 신학은 ‘신앙의 전통성’을 다룬다. 세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는 신앙의 전달 과정 안에서 다양한 신학들과 교회들의 역사를 다룬다. 역사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고대 교회사, 중세 교회사, 근세 교회사, 현대 교회사, 한국 교회사, 교부학, 신학사 등이 있다. 세 번째, 조직 신학은 ‘신앙의 합리성’을 다룬다. 신앙의 합리성이란, 첫째로 신앙이 정서적 경험을 넘어서 논리적·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로는 신앙의 교리와 고백이 현대인의 이해 가능성 안에서 철학·역사·사회학적 근거들에 의해 설명·구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앙 내용의 논리적 진술, 표현 방식의 형성 그리고 그 전달 방식을 포함하는 포괄적 작업이다. 따라서 조직 신학은 교회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그리고 구조 안에서의 신앙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의 해명 가능성을 다룬다. 조직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기초 신학, 신학 입문, 교의 신학, 윤리 신학, 그리스도교적 사회학, 교회일치 신학 등이 있다. 네 번째 실천 신학은 ‘신앙의 실천 가능성’을 다룬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같은 시대를 살면서, 오늘날 하느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다룬다. 실천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사목 신학(설교학, 교리 교수법, 사목 심리학, 사목 사회학 등), 교회법, 전례학, 종교교육학, 선교학, 영성 신학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초자연 신학은 ‘신앙의 원천성’, ‘신앙의 전통성’, ‘신앙의 합리성’, ‘신앙의 실천 가능성’을 다룬다. 즉, 신앙을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진리를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 시대의 놀라운 신학의 발달로 이루어진 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읽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 중 하나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기초 신학은 단어가 의미하듯 신학의 영역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의 기초는 무엇인가? 바로 계시와 신앙이다. 따라서 이를 전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기초 신학이다. 신학의 방법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증적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변적 방법이다. 실증적 방법은 ‘신앙의 들음(Auditus fidei)’에 해당하고 사변적 방법은 ‘신앙을 이해함(Intellectus fidei)’에 해당한다. 실증적 방법은 신앙에 대한 사실의 문제를 다루고 사변적 방법은 신앙에 대한 본질의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은 따로 분리될 수 없고 서로를 도와 신앙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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