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란?

숲을 바라볼 때 숲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부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신앙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인 신앙의 나무들을 바라보다 보면 신앙이라는 전체 숲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신앙(Fides)이 있기 전에 먼저 무엇이 있었을까? 계시(Revelatio)가 있었다. 계시가 없었다면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계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이 생겨났다. 가장 넓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이 신앙’이다.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보여주시는 하느님께(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통교, 자기 증여) 그분을 받아들여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하느님께서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계시의 원천(Fons revelationis)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하시는 하느님(Deus Revelans)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침묵만 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 역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셨기에 신앙이 생겨났고 이 신앙으로 인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생겨났다. 세 번째, 그렇다면 계시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계시의 전달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성경(Biblia Sacra)과,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전(Traditio Sacra)을 통해서 전달된다. 네 번째,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전달되는 계시를 현실화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의(Dogma)이다. 그리고 계시의 이해를 현실화 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학(Theologia)이다. 신학이란 ‘학문적 방법에 의한 계시와 신앙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결국 신학이라는 것도 거창한 것 같지만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신학보다는 교의가, 교의보다는 계시와 신앙이, 계시와 신앙보다는 하느님이 더 큰 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한다

예수님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꿈이나 환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살과 피를 지닌 인간,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따라서 신학은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에 토대를 둔다. 모세는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양을 치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좌선을 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제자들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다. 모세가 만난 그 하느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난 그 하느님을 신학은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인간 이성을 초월한 그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순도 있지만 돌파구도 있는 것이다. 이성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안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함을 통해 믿으려 하는 것이다. 이해할 때 더 큰 믿음이 생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생긴다. 모르고 믿으면 맹목적이 되지만 알고 믿으면 확실성을 얻게 되고 더욱 순종하게 되고 더욱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신학은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 신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움직인다.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은 다르다. 모르고 믿는 사람은 인생 안에서 시련과 고통이 닥칠 때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이런 분이 아닌데’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에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되고 더 크게 성숙하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앎의 세계, 신학의 세계로 들어왔으니 제대로 알면 제대로 믿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신학을 하는 이유이다. 신학을 통해 사도들의 하느님 체험, 교부들의 하느님 체험,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 성직자 수도자들의 하느님 체험, 하느님 백성의 하느님 체험을 알게 된다. 이 앎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되고 신앙의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진다

유명한 의사가 강의하던 중에 “이것을 먹으면 가장 오래 사는데 무엇일까요?” 하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밥을 잘 먹어야 오래 산다”, “욕을 먹어야 오래 산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깔깔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의사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이것을 먹으면 죽는데 무엇일까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이요”하고 대답했다. 의사는 “정답”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어 오래 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죽게 된다. 나이라는 것은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도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죽음을 모든 것이 끝장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하느님과 만나는 날로 생각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신앙의 민족인 유다 민족이 바빌론 유배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했는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의 유다 민족은 이웃 나라 강대국 바빌론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다. 그 고난의 유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멸망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다른 민족들이라면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강한 바빌론이 쳐들어와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맞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민족이었던 유다 민족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웃 나라가 강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부패해서도 아니다. 그러면 왜 멸망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늘날 유다교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건을 해석하고 난 뒤에 그 해석에 따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신앙이 달라지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고마운 돌’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은 그의 <고마운 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는데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물살이 무척이나 센 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건넌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강을 건너면서 어쩌면 그것이 거친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 줄 고마운 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은 한마디로 고마운 돌이다. 신앙은 돌처럼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위기의 순간에 생명을 주는 고마운 돌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거친 물살들,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닥쳐온다. 이때 신앙이라는 고마운 돌은 우리가 그 물살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굳건하게 붙들어 주는 닻이 되어 준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고통과 위기의 순간에 그 죽음을 편안하게 넘어가게 해 준다. 신앙은 삶 안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고마운 돌이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귀한 선물이다. 세례식 때 주례 사제는 세례받는 예비 신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앙을 청합니다.” 교회에 돈이나 부귀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말한다. 육체와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최고의 것, 가장 귀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이어 주례사제가 묻는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돈과 부귀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권력과 명예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인간을 참 진리와 참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따라서 신앙만큼 좋은 것이 없다. 신앙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 없으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 중 하나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에 이미 이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 입문할 때 첫 번째로 청한 것이고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신앙은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말하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깊고 정확하게 알아 기쁘고 올바른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 때 행복하고 죽을 때 웃으면서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일반 가톨릭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라는 신앙 시리즈를 연재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전공하고 대전교구 유성본당 주임, 대전 가톨릭대 교수, 정하상교육회관 관장, 법동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제주도에 있는 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의 연수원장으로 소임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