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고도를 기다리며」 : 내용 없는 기다림의 공허함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고통과 고립을 겪으면서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끔찍한 파괴를 가져온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항상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18세기,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신론(Deism)이 대두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 인간과 자연법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관이다. 정교한 시계공으로서의 신은 우주라는 완벽한 시계를 만든 후, 태엽을 감은 뒤 더 이상 시계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신론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인간 보편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유물론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조차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어버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계몽주의가 덮어버린 신화와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의미 없는 기다림 속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상징 하느님의 침묵 계속된다 해도 유혹과 허상 떨쳐내고 참된 부활 구원에 이르러야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부재와 침묵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과 응답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와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현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암시한다.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막과 2막은 상황 설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길가, 두 남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전날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시간에 다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이어간다. 막이 내릴 때쯤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소식을 전한다. 극에서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도착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는 언제나 곧 도착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각 막에서 소년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약속을 전한다. 두 주인공이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막은 내린다. 비록 고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현존한다. 그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의 도착에 대해서 논의되고, 기다림의 대상이며, 소년을 통해 그의 약속이 전달된다. 그의 부재는 언어 전반에 배어든다. 대화 대부분은 결국 고도로 귀결된다. 그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 고도의 부재는 언어적 현존을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적인 행위만 되풀이한다. “만일 안 온다면?” / “내일 다시 와야지.” / “그리고 또 모레도.” / “그래야겠지.” / “그 뒤에도 쭉.” 고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재 ‘ 때문에’ 그들은 행동한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림을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고 이어간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기다리는 행위는 끝날 것이고, 연극도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고도의 도착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의미 생성의 중심 동력으로 전환한다.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도착하지 않음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에, 고도의 부재는 욕망 그 자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닻이 되고, 기다림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된다. 동시에 고도의 부재는 그냥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조건이 된다. 기다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진다. 디디와 고고는 그의 부재에 대한 언어들을 함께 공유하고,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확인한다. 고고는 디디에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고 부탁한다. 디디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정체성, 도착 여부, 이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공동체적 확실성을 확인한다. 부재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공동체의 핵심 요소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절대자 혹은 신으로 해석되지만,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주인공의 기다리는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일상 안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으신다. 개인의 고통 앞에서,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그러나 부재와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그 말씀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재의 언어와 드라마에서 부재의 언어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과 육화 신비를 통하여, 기다림이 의미가 있음을 보증하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극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언어에서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소식만 반복될 뿐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기다리는 신앙적 행위만 있다. 내용이 없는 기다림은 부재 언어의 취약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고도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그에 관한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소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속 바뀐다. 언어로 표현되는 고도의 정체성도 명확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의 현존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고도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현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부재는 독특한 시간의 역동성을 형성한다. 그의 도착은 계속해서 연기되기 때문에, 진전 없이 반복만 있을 뿐이다. 도착 없는 기다림은 서사를 정지 상태로 가두어 버린다. 두 인물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경험한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다림과,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두 주인공은 바로 성토요일의 경험 안에서 맴돌고 있다. 성토요일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절규, 즉 하느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며 세상이 멈춘 성토요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토요일은 일시적이며, 결국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부활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부재와 침묵의 상태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는 이 극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혹은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절대자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인간 조건을 강조한다. 문제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육화 신비가 일어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합리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 문명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육화 신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미 부활이 왔음에도, 여전히 성토요일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틴턴 수도원(Tintern Abbey)>: 자연을 통한 인간 조건의 초월

도널드 위니컷의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유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돌보는 대상과의 관계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방식을 내면화한다. 살아가면서 대상은 바뀌지만, 대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형성한다. 즉,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대상(사람, 돈, 취미생활, 학문, 종교, 자연, 직업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내적 충만함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불안한 존재로 인식한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마음이 안달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이라는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결코 완벽한 내적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콜리지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던 워즈워스 시인은 <틴턴 애비>(Tintern Abbey, 틴턴 수도원)라는 시에서 내적 갈망의 여정을 자연과의 관계를 통하여 매우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시인에게 자연은 단지 아름다운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온전한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16세기에 영국국교회를 확립한 헨리 8세는 수많은 가톨릭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폐쇄하는 ‘수도원 해체’를 단행하였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수도원들은 18세기 들어서면서 여행지나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웨일스 남동쪽에 있는 틴턴 마을의 시토회 수도원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워즈워스는 5년 만에 다시 찾은 틴턴에서 자연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자연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된 현재의 자신을 확인하고, 변화될 타인의 미래를 희망한다. 「틴턴 애비」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청춘기’에 감각적 대상을 갈망하였다. 오 년 전 “처음으로, 이 작은 산들에 와서,” 그는 한 마리 “노루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산과 속이 깊이 팬 음침한 나무들의 색과 모양들은 젊은 시인에게 일종의 욕구였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 시인은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다. 자연으로부터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자극을 추구하였다. 워즈워스는 자연이라는 대상과 관계를 맺은 이러한 과거의 모습을 “생각 없는 청춘기”였다고 고백한다. 자연 안에서 경험한 느낌은 성찰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체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 평정이나 균형 없이, 마음은 쉽게 동요된다. 시인의 갈망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감각적 만남에 의존하기에, 자연과 떨어지게 되면 내적 충만함을 유지할 힘이 없다. 그래서 비록 자연을 통하여 기쁨을 맛보지만, 그 기쁨은 “서글픈 기쁨”이며, 환희도 “어질어질하던 환희”였다. 자연 안에서 무언가 강한 느낌을 체험하지만, 아직 그러한 감정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내면화에 이르지 못했다. 나이를 먹어간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섯 번의 여름과 그 길이만큼 다섯 번의 긴 겨울”을 보내면서, 시인은 젊은 시절의 서글픈 기쁨에 대한 상실을 겪는다. 과거의 “그 시절은 지나갔다.” “생각 없던” 젊은 날의 시인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세상의 열병과 약간은 슬프고 당혹스러운 수많은 인지를 맛보게 된다. 육체적 감각에 묻혀 있던 내면의 마음은 고통, 죽음, 그리고 인간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면서 깨어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더욱 깊게 만들고 과거의 갈망과 서글픈 기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폐허로 남은 수도원 돌아보며 자신의 과거·현재·미래 성찰 감각적 자극과 만족 추구했던 젊은 시절의 미성숙함 고백 자연과 일치해 평화 회복하며 영적으로도 충만한 삶 염원 그래서 이제는 “억제하고 억누르는 / 넉넉한 힘을 간직한 채, 거칠거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 인간의 고요하고도 슬픈 음악을 / 종종 들으면서, 자연을 관조하는 법을 / 배웠다”라고 노래한다. 이 음악은 물리적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한계, 삶의 복잡성에 대한 고요한 자각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 조건의 메아리로서, 삶의 버거움으로부터 도피하여 즉각적인 감각적 위로를 얻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그 버거움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공감 능력과 인간 조건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된 시인의 깨달음은 영적인 차원에까지 이른다. 그는 “고양된 사고의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우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의인화된 대상이 아니라, 내재적 신성의 한 형태이다. 이 존재의 형태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어떤 존재는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햇살과, 둥근 대양과, 생생한 공기와, 푸른 하늘과,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 더욱이 이 “어떤 존재”를 인식하였을 때 느끼는 기쁨은 “숭고한 감각, 훨씬 더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인간의 마음과 자연과 다양한 관계들 안에 머물고 있다. 워즈워스가 자연 안에서 경험하는 신적 체험은 자연 신비주의로 분류된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것을 범신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신은 자연과 세상과 인간 삶에 현존하고 있다. 절대적 존재로서 세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 현존의 형태로 스며들어 있다. 여러 사상가는 자연을 제2의 성경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은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과 자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땅과 바다와 심연과 산들바람에게 “저의 하느님”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모두, “우리는 너의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내셨다!”, “우리 위에서 찾아라”라고 답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깃들어 계신다. 5년 전에 바라보았던 자연과 현재 바라보고 있는 자연은 같은 자연이다. 변화된 것은 시인 자신이다. 과거엔 감각적 만족을 갈망하였다면, 현재는 “인간의 슬픈 음악”을 들으며 관조와 성찰의 태도로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의 자연은 단순한 감각적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절대자가 머무는 거룩한 곳이다. 그리고 시인은 마침내 자연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그리고 더욱더 성숙한 관계 형성을 통하여, 삶의 충만함을 살아간다. 동시에 시인에게 기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보존하고 다시 활성화한다. 그는 “외로운 방안이나, 읍과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자연에 대한 기억에 의지했다. 지칠 때마다 자연에 대한 경험의 기억을 “핏속에서 느끼고, 가슴으로 느낌”으로써, 평화를 회복하였다. 바로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자연과 일치를 이룬다. 흥미롭게도 워즈워스는 자신의 누이 도로시와의 관계를 통하여 현재의 깨달음을 미래로 확장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열광적인 눈이 발하는 빛 속에서 자신이 지녔던 감각적 열정과 서글픈 기쁨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녀 또한 지금 자신이 도달한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 야생의 황홀한 경험들이 무르익어 / 차분한 기쁨이 될 때, 너의 마음이 / 사랑스런 모든 형상들을 위한 저택이 될 때…. 오! 그때가 되면, / 고독이나, 공포나, 고통이니, 슬픔이 / 너의 일부가 되더라도, 네가 다정한 기쁨의 / 온갖 치유하는 생각들과 더불어 / 나와, 나의 이 충고들을 떠올리게 되리라!”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성장으로 나아간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걸리버 여행기」 - 약자에 대한 공감

현대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이언 매큐언은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9·11 테러범들이 치명적인 ‘상상력의 실패’를 겪었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만약 그들이 피해자들의 마음과 감정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폭력으로 인해 겪을 고통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그토록 잔혹한 행위를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감내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은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마음 혹은 공감 능력이다. 성경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내적·외적 상황을 깊이 살피도록 초대한다. 마태오복음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황금률을 선포한다. 1726년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완판되었을 정도로 당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소인국, 거인국, 날아다니는 섬 등의 놀라운 상상력은 독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아동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 본성과 문명의 어두운 면들 그리고 18세기 영국 사회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대표 풍자소설이다. 제2부에서 유럽의 정치 제도, 전쟁, 화약과 총기의 사용에 대한 걸리버의 이야기를 들은 거인국 브롭딩낵의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다니게 한 벌레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특히 인간의 이기적 오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일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선원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의사였던 걸리버는 어느 날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어, 우연히 소인국에 표류하게 된다. 지극히 평범했던 주인공은 소인국에서 자아와 우월감이 극대화되는 오만함을 경험한다. 개미 같은 소인국 사람들과의 압도적인 신체 차이로 인해 주인공은 보통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가 된다. 그의 우월성은 신체적 감각을 통해 느껴진다. 그들이 쏘아대는 수많은 화살은 그에게 거의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수백 명분의 식사를 한 번에 먹어 치운다. 걸리버는 아무리 많은 군인이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인국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자각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릴리퍼트인들을 짓밟을 수 있는 절대적 지배의 가능성을 통해 우월감이 내면에 자리 잡는다. 걸리버는 블레푸스쿠 제국의 군함 50척을 밧줄로 엮어 릴리퍼트 왕국의 항구로 모두 끌고 와 적의 침략을 막아낸다. 뭍에 상륙한 그를 황제는 온갖 찬사로 반겼고, 즉석에서 그 나라 최고의 호칭인 나르닥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걸리버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은 내면에서뿐만 아니라, 외적인 인정으로 한층 부풀어 오른다. 소인국에서 우월했던 주인공…거인들 앞에서는 미약한 존재 식민 지배 횡행했던18세기…오만한 권력을 향한 신랄한 비판 복음적인 가치 강조하면서도…실천하기 힘든 현실 드러내 그러나 제2부 거인국에서 주인공은 소인국 사람들의 처지가 되어 굴욕과 무력감을 겪게 된다. 소인국에서 부풀어 오른 자만심에 주변 사람들의 상황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그는, 홀로 남은 땅에서 거인들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소인국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릴리푸트 사람 하나가 영국인들 속에 있다면 아주 우습게 보일 것처럼, 내가 현재 이 나라에서 앞으로 얼마나 가소롭게 보일 것인지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소인국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던 그 신체는, 이제 거인들 앞에서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가 된다. 평소 상대조차 되지 않았던 대상들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쩔쩔매야 한다. 농부의 어린 아들은 그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공중에 매달아 올린다. 갓난아기는 걸리버를 꽉 움켜쥐고 그의 머리를 입에 넣으려 하다, 그의 비명을 듣고 놓아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걸리버가 여성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면이다. 당시 여성들은 독립적 주체로서 인격과 존엄성을 보장받기보다는, 신체를 타인의 사용이나 쾌락을 위한 대상 혹은 상품으로 취급받으며,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주인공도 어른이지만 항상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채로 옮겨 다니고 보호받아야 하는, 즉 강요된 의존 상태를 경험한다. 농부의 딸인 글럼달클리치는 인형 침대를 개조해 걸리버를 재우며,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벗겨주기도 했다. 옷도 여러 벌 만들어 주었다. 18세기 여성 패션의 확산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패션 인형처럼, 걸리버의 몸은 상품화된다. 상품화된 여성의 몸은 응시(gaze)의 대상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농부의 아홉 살 된 딸에게 종속되어 인형처럼 다뤄지는 걸리버도 응시의 대상이 된다. 그의 작은 몸은 호기심 혹은 신기함의 대상으로 관찰되고 전시되며, 구경거리로 돈벌이가 되었다. 심지어 왕비의 시녀들은 그를 ‘구경도 하고’, ‘완전히 발가벗겨서는 품에 껴안’기도 하는 등, ‘아주 역겨’운 행동을 했다. 18세기 영국은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종교 차별을 받았으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아일랜드 성공회 신부였던 스위프트는 누구보다도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뿐만 아니라, 다른 저서들에서도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 제1부와는 대조적으로 제2부에서 주인공이 겪는 굴욕과 무력함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배하는 자들의 자기중심적 오만함에서 벗어나,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려보도록 초대한다. 미약한 존재가 된 걸리버는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강조하는 소외된 존재들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다. 예수님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고 가르침으로써, 작은 이들이 예수님만큼 중요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신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히브 13,3) 비록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습고 골치 아픈 일을’ 당해야 했지만, 그 이후 나머지 이야기에서 도덕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 저자의 중요한 통찰이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걷다 믿음이 흔들려 물에 빠져버리거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복음사가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베드로 사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햄릿」: 불확실성과 섭리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를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가 그의 나약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복수의 윤리적 측면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찾지 못한 햄릿은 복수를 계속 지연시킨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불확실성은 비극의 중요한 역동성이다. 드라마는 햄릿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은 동생인 클로디어스에게 암살당했다고 알려주면서 시작된다. 당시 영국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개신교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연옥의 불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유령은 가톨릭 신앙을 암시한다. 마틴 루터가 공부하였던 위텐버그로 유학을 다녀온 햄릿은 신교도 시각에서 이 유령의 진실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놀랍게도 개신교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반응도 보인다. “그대가 그렇게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대를 햄릿으로, 왕으로, 아버지로, 덴마크 왕으로 부르겠다.” 마침내 유령과의 대화를 마치고, 호레이쇼가 왔을 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학문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있다네.” 아버지의 죽음과 유령에 대하여 주인공은 구교의 가르침과 신교의 가르침 사이에서 불확실성을 겪게 된다. 선왕의 죽음에 뭔가 수상쩍은 면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유령의 존재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분석하고, 의심할수록 불확실성의 고통은 더해간다. 그 유명한 ‘죽느냐 사느냐’의 독백이 주인공의 자살에 대한 충동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이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영역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도 죽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겪을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어떤 나그네도 돌아오지 못한 곳, 그 미지의 나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복수의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불확실성 앞에서 주저하던 햄릿 또한 주인공은 복수 자체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의 불확실성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경당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는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칼을 거둔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동안 죽게 되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문화의 전통적이며 정당한 복수와 자비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윤리적 모호성은 복수를 지연시킨다. 중세 시대 전통적 복수극은 안정되게 확립된 도덕 질서가 있었다. 복수의 명분과 정의는 명확하였다. 가족의 복수라는 상황에서, 질문과 의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러한 명확성을 붕괴시키고 있다. 제5막 1장에서 햄릿은 묘지를 거닐다가 무덤을 파고 있던 인부들이 던진 해골 하나를 발견한다. 해골의 주인은 그가 어릴 때 궁정에서 일하던 광대 요릭이다. 자신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키스했던 그 입술이 달렸었던’ 자리를 쳐다보며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천 번도 넘게’ 자신을 ‘등에 태워주었던’ 요릭의 해골 앞에서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는다. “호레이쇼, 아는가? 알렉산더 대왕도 무덤 속에선 이 꼴일까? 우리가 죽어 흙이 되면 무슨 천한 용도에 쓰일지 상상 좀 해봐!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흙을 추적해 보면 술통 마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은 죽어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여러 작가가 언급한 “죽음은 위대한 평등자다”라는 말처럼, 아름다움도, 지식도, 권력도, 재산도, 모두 궁극적으로 동일한 물질적 종말을 맞이한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한스 홀바인의 명작 <대사들>이라는 그림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묘사한다. 과학기술, 음악, 화려한 의상, 다양한 학문을 지닌, 유학을 다녀온 르네상스 인물인 햄릿도 인간의 “이성은 고결하고 그 능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 한구석에는 굴절된 해골의 이미지가 숨겨져 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필연적 죽음의 진리 깨달은 뒤 자기 삶의 주도권을 신에게 의탁 중세 시대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를 추구했던 르네상스의 또 다른 정신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성찰이었다. 재의 수요일에 드리는 기도처럼, 결국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싸우며, 요릭의 해골을 보며 죽음의 냉엄한 진리를 대면한 주인공은 허무주의나 체념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의 섭리에 의탁한다. 죽음의 통찰이 자신을 괴롭히던 불확실성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인공을 사로잡고 있다. 그 유령(가톨릭 신앙)이 진실일까? 복수는 정당화(그리스도교의 자비) 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나 자신이 지옥 불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계속되는 질문과 의심은 햄릿의 행동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흔한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10,29 참조)는 성경 말씀처럼, 햄릿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라고 엄숙히 말한다.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삶의 통제권을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햄릿이 불확실성으로 고통받았던 핵심적인 이유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유령을 만난 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다. 비록 여전히 불확실성은 남아있지만, 주도권을 신에게 넘김으로써, 불확실성이라는 불안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며,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한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갖는다는 말인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가족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다. 하느님께 순명했던 마리아처럼 적극적인 용기와 헌신의 길 걸어 천사의 설명이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명예가 위태로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Let it be)를 바랍니다”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불확실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 뜻대로 될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는 체념적 수동의 삶이 아니다. 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신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위험할 수 있으니 피하라’는 호레이쇼의 충고에 햄릿은 멈추지 않는다. 확실성이 없이는 행동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불확실성의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의 행위에 나선다. 이제 햄릿에게 ‘순리를 따르는’ 것은 바로 때가 왔을 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마리아도 천사의 소식에 순명한 후, 그냥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제일 먼저 ‘서둘러’ 산악 지방으로 올라가 엘리사벳을 만난다.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예수의 탄생,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 카나의 혼인잔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등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고, 적극적인 헌신, 식별, 용기의 삶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노인과 바다」: 일상의 고통과 성사적 은총

미사의 마침 예식은 성체성사의 거룩함과 세속과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의 은총을 일상 삶으로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미사의 라틴어 어원인 ‘missa’는 ‘파견하다’ 혹은 ‘보내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는 미사를 통한 성사적 체험을 일상 안에서 살아가도록 파견받는다. 가정, 혹은 일터는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면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인과 바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겪었던 인간 존재 의미의 위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1950년대 지배적인 정서는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피로감과 도덕적 모호성이었다. 작가는 역사나 이념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일상 안에서 겪는 시련의 과정과 태도를 통하여 인간과 삶을 긍정한다. 이 소설은 고기잡이하며 살아가는 노인 산티아고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허무함과 좌절감에 빠질 수 있는 배경으로 시작한다. 노인은 지난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과 함께 일했던 어린 조수 마놀린의 부모는 노인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해, 아들을 다른 어부의 배에 타도록 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자신을 ‘놀리는 어부들’의 시선이나, 계속 허탕 치고 있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오늘도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바다에서 고기 잡는 준비와 행위는 생계를 위한 단순한 노동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례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 바다로 나가야 하는지, 물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미끼를 꿰는 방법, 낚싯줄을 당길 때 힘의 조절 등의 규격화된 반복적인 동작은 기계적인 습관이 아니라, 한평생의 고기잡이를 통해 응축된 몸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노인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일종의 몸에 각인된 의례이다. 종교의 의례적 행위가 정형성과 반복성을 통해 속세 한가운데에서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듯, 노인의 몸에 새겨진 고기잡이 행위는 바다에서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창출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차를 마시게 될 때, 이 차 한잔을 마시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의 부대끼는 시끄러움 속에서 가장 거룩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돈을 제법 많이 벌어들인 젊은 어부들은 전통적인 ‘찌’ 대신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며 부표를 사용하여 고기를 잡는다. 그들은 바다를 남성인 ‘엘 마르 (el mar)’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바다는 ‘경쟁자나 투쟁 장소, 심지어 적’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바다에서 거룩한 창조 질서의 흐름과 관계를 거스르지 않고, 온전히 살아간다. 비록 바다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야 하지만, 주인공은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만’(「찬미받으소서」 82항) 여기지 않고, 존중, 친밀감, 연민 등을 바탕으로 깊은 인격적 관계를 형성한다. 창조는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만남의 역동성이다. 매일 고기잡이 허탕 치는 현실…굴하지 않고 바다로 나간 노인 물고기 잡기 위해 처절한 사투…결국 빈 손이지만 ‘존엄’ 지켜내 시련 딛고 사명 지키는 삶 사는…진정한 신앙인의 가치 보여줘 젊은 어부들과 달리,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라 마르 (la mar)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다를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스페인어였다.” 또한 날치를 ‘좋은 친구’라고 부른다. 밤사이 배 가까이 다가온 돌고래 두 마리의 물을 뿜어내는 소리만 듣고도 누가 수놈인지 혹은 암놈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친밀감을 보여준다. 또한 외적으로 내적으로 고통받는 대상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늘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지만, 허탕 치기 일쑤인 작고 가냘프고 까만 제비갈매기’가 인간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살고 있다고 가여워한다. 노인은 과거에 청새치 한 쌍 가운데 암놈을 잡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수놈이 항상 암놈에게 먹이를 양보하기에, 암놈이 낚싯바늘에 걸려들었다. 마지막까지 암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수놈을 보며, 마음 아파했던 노인은 ‘암놈에게 용서를 빌고 도살 작업을 신속하게’ 마쳤다. 바다에서 경험한 ‘가장 슬픈 광경’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84일간의 허탕을 뒤로하고, 자신의 작은 낚싯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잡는다. 그러나 배 옆에 매달려 있던 고기를 상어들이 다 먹어 치워버리고, 뼈만 남은 채 항구로 돌아온다. 바로 이 부분이 헤밍웨이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이다. 여러 날 동안 몸을 망치며 어렵게 잡은 물고기가 결국 다른 포식자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주인공의 위대함은 물고기를 잡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겪게 된 극도의 고통과 피로감과 심리적 압박을 견디어 냈다는 점에 있다. 한밤중에 상어들이 다시 달려들면 끝장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노인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라며 굽히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노인은 ‘패배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노인은 패배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한다. “나를 패배시킨 것은 없어,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저 집을 향해 배를 몰고 간다. 항구에 정박한 노인의 배에 묶인 뼈를 보며, 사람들은 “그런 물고기는 정말 한 번도 본적이 없어”라며 경외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세상의 칭찬과 인정이 노인의 인간 존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물질적 혹은 경제적 보상이 없더라도, 어부로서 노인이 보여준 의례적 행위, 친밀감, 용기, 충실함, 끝까지 버틴 인내심이 그의 가치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물고기를 성공적으로 잡는 것보다는, 고통과 피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떻게 인간 존엄을 보존할 것인가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흥미롭게도 비평가들은 노인이 바다에서 겪은 고통과 인내의 경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닮았음을 언급한다. 여러 날 동안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손은 경련을 일으키며 굳어지고 상처를 입는다. 기력은 소진된다. 그의 몸은 탈진되고 부서진다. 3일 동안의 바다 여정을 마치고 항구에 도착한 후, ‘돛대’를 빼서 ‘어깨에 메고 기슭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부서진 몸은 무거운 돛대의 무게로 인해 여러 번 넘어지고 주저앉아야 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엎드려 얼굴을 신문지에 대고, 양팔을 밖으로 쭉 뻗어 내밀고 손바닥은 위로 향한 채 잠이 들었다.” 미사의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친밀감과 고통을 동시에 수반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상처받아야 했다. 그 상처에 대한 순명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운다. 사람들은 이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친밀감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바다와 깊은 친밀감을 형성한 노인은 동시에 바다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게 된다. 공동체의 도움이 닿기 힘들어 홀로 서야 하는 ’먼 바다’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체력, 잠, 땀과 피, 심리적 힘 그리고 정신적 힘까지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다시 빈손으로 돌아온다. 십자가의 역설은 외적으로 패배하였지만, 진정한 내면의 더 깊은 승리라는 것이다. 3일 동안의 사투 끝에 또다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노인의 상처 난 빈손은 물질적으로 실패였지만, 한 어부로서 인간 존엄을 지켜냈다. 바오로 사도는 긴 선교여행과 박해 속에서도 사명을 완수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산티아고의 상처난 빈손도 말한다. “나는 부끄럽지 않게 싸웠고 견딜 것을 다 견디었으며, 어부로서 소명을 지켰습니다.” 헤밍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보다, 일상 안에서 거룩한 창조 질서의 회복을 바라며, 인간 존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를 초대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부활」: 양심의 부끄러움과 은총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함의 척도는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공동체나 죄스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죄스러움에 대한 태도가 그 공동체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법적인 판단과 처벌에 따른 처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양심에 기초한 부끄러움의 감정이다. 1899년 71세의 나이에 톨스토이는 10년의 작업을 거쳐 「부활」을 출판한다. 로맹 롤랑이 ‘예술적 성서’라고 극찬한 작가의 마지막 장편 소설은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내적으로 부활하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출간 2년 후인 1901년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교회와 사회의 무디어진 양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동시에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다시 깨어나는 양심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바오로 사도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주된 이유에 대해, 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한다.(사도 24,16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덕적 감각과 관련하여 외적인 법정보다는, 내적인 법정을 강조한다.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한 것처럼, 내적 양심은 단지 고귀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를 만나는 성스러운 곳이다. 네흘류도프는 살인 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는데, 절도와 살인 혐의로 피고석에 앉아 있는 매춘부가 과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쫓겨난 카츄샤임을 알아본다. ‘그 같은 죄를 양심에 파묻은 채 편히 살았던’ 그는 자신의 ‘냉혹함과 잔인함, 비열함을 인정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만, 혹시라도 그녀와 변호사에 의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당할까 두려워한다. 또한 주인공은 과거의 죄스러운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특히 동물적 욕망을 채우고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쥐여주고 달아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비열했는지‘ 자책한다. 소리 내어 자신을 ‘그런 무뢰배, 그런 악한‘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악행으로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실한 성찰엔 부끄러움이 따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면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끄럽고 역겹다. 역겹고 부끄럽다’라는 감정을 경험한다. 남들 앞에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외적 창피함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적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선 내적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고, 내면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세상의 심판을 대면해야 하는 진퇴양난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의 대립이다. 외적 창피함은 남의 평가나 시선을 중요시한다. 의도적으로 내면의 상태를 감추는 외적 이미지를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위선과 자기기만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적 부끄러움은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 혹은 진리에 기초한다. 두 개의 가치관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어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 개의 가치관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활」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여성의 삶 파괴했던 과거 악행에 부끄러움 느끼며 진실하게 반성…이타적인 삶 결심하고 사랑 실천 부활은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하느님의 가치관 지켜내는 여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대립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지상의 도성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가치관을 따르지만, 하느님의 도성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관이 우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지상의 도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상의 가치관을 경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 결국 이러한 대립 사이에서, 네흘류도프는 진리의 목소리를 선택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마음대로 판단하라지. 그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라고 깨닫는다. 지상의 도성에서 창피함보다, 하느님의 도성에서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초월하여 내면의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책임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가슴속에는 고통스럽기는 하나 평안을 주는 뭔가가 있었다.” “정말 좋다! 정말 좋다. 아, 정말 좋다!”라고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카츄샤를 버린 이후 ‘그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신적 존재가 깨어난 것을 기뻐하는 눈물‘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의 중요성을 여러 강론에서 언급한다.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반드시 ‘양심 성찰‘을 한다. 고해소에서의 진정한 고백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단순히 ‘죄의 목록‘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바로 도덕적 판단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것이다.”(2020년 9월 3일 강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은총이다”(2025년 10월 13일 강론)라고도 한 바 있다. 왜냐하면 죄스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은 나약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절망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 악행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카츄샤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참회하고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양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은 더 이상 내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나를 얽매고 있는 이 허위를 부숴버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며 진실만을 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카츄샤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간다. 감옥에 있는 그녀를 방문해 용서를 구하고, 자기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녀의 유배지인 시베리아까지 따라간다. 그러면서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불의를 목격한 후에, 카츄샤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전히 이타적 삶을 결심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에게 구원의 문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물리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양심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양심을 흔들어 깨울 때, 발생하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이 감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다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삶 안에서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며 부끄러워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다.(루카 5,8 참조) 그래서 부활한 양심은 내면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간다. 부활은 한 순간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의한 사회 안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도성의 가치관인 이타적 사랑을 살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어린 왕자」: 불완전한 대상과 온전한 사랑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이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근본적 경험인 사랑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관계를 통해서 용서와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신처럼 흠 없는 인간은 없기에, 완벽한 관계의 대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 대상이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는 그 대상을 온전히 품을 수는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방황과 회귀의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행성인 B612를 떠나 여러 행성을 여행하며 마침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떠남, 여행, 귀향에 대한 여정은 모두 관계에 대한 선택의 문제와 연결된다.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도 여행과 귀환의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 여정을 시작한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예수님은 소외당한 죄인들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 다시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스승을 만나고 복음 전파를 시작한다. 어느 날 어디에선가 날아 온 씨앗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되었다. 어린 왕자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지만, 동시에 장미의 여러 가지 요구들과 태도에 묻어나는 ‘교만함‘과 ‘허영심‘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더 이상 장미를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자신의 행성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비록 그 꽃이 ‘자신을 향기롭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지만, 주인공은 꽃의 완벽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여섯 개의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여섯 명의 어른을 만난다. 모든 것을 통제하며 권력에 집착하는 왕, 남들의 칭찬만을 갈망하는 허영쟁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술에 중독된 술꾼, 자신이 소유한 별들의 숫자만을 세고 있는 탐욕스러운 사업가, 기계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로등 켜는 사람, 실제 경험을 무시하고, 책으로만 탐구하는 지리학자. 이들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갇혀 있다.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몰두한 나머지, 삶의 더욱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한다. 겉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뭔가를 이루어 가며 스스로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지만, 내면은 공허할 뿐이다. 삶의 참된 충만함을 채울 수 있는 관계의 역동성을 놓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껍데기만을 추구하는 어른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어린 왕자는 매번 “어른들은 정말 아주, 아주 이상해”라며 다른 행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황하던 어린 왕자 ‘길들임’으로 소중한 존재 만들며 관계 속 ‘선택’ 의미 깨달아 예수님이 죄인들 회심 시키셨듯 윤리적 책임감 갖고 관계에 끝가지 충실해야 마침내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에 도착하여 여우를 만난다. 주인공이 여우와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슬픈‘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아서‘ 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길들이기는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두 존재가 서로에 대한 의미를 천천히 가꾸어 가는 과정이다. 갑작스럽게 처음부터 뜨거운 열정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좀 떨어져서‘ 앉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서‘,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라‘고 요청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 길들여지게 된다. 여우의 길들이기는 관계를 맺는 상대방에게 물리적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는 것이다. 한 존재에 대한 지식을 밤새워 달달 외워서, 그 존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함께 보낸 평범한 일상 시간의 양만큼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제 뭘 알려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 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는 거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길들임의 관계를 통해 평범한 것은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가 된다. 길들이기 전에는 각 존재가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주인공이 길들이기 전 여우는 다른 여우로 대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이 여우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내재적으로 타고난 속성이 아니라, 주인공이 들인 시간과 정성이다.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함께 물리적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기적들과 죄인들의 용서를 말씀으로 행하신다. 세관장인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 즉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한다. 사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회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캐오는 죄인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한 존재가 된다. 어린 왕자는 깨닫는다. 자신의 행성에서 돌보던 장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도망쳐 나온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비록 장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장미를 돌보며 보낸 시간이 이미 장미를 소중하게 했다는 것. 그래서 그 장미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매우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길들임은 인식의 변화를 불러온다. 마지막에 여우는 주인공에게 “본질적인 건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고 일깨워준다.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장미는 교만하고 허영심으로 가득했지만, 비로소 마음으로 바라본 장미는 모든 장미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유한 존재가 된다. 시간을 통한 길들임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장미는 어린 왕자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목사인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싸우다 죽은 작은아들의 장례식에서, “이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루카복음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변명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들로서 안아주고 잔치를 베푼다. 또한, 이 관계는 단순한 정서적 친밀감을 넘어서, 윤리적 책임감을 수반한다. 여우는 주인공에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라고 알려준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면, 그 관계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 동물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도 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위대한 개츠비」: 물질주의의 허상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미국은 유럽과 달리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금주법, 방황하는 젊은 세대, 광란의 20년대, 재즈시대라는 특징들이 암시하듯 불확실성과 혼란, 불만과 허무함 등이 동시에 공존하는 시기였다. 1925년 출판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당시 아메리칸드림과 그 이면의 모순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개츠비는 상류층 출신의 데이지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과 부의 차이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나중에 막대한 부를 축적해서 돌아온 주인공은 이미 결혼해 버린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메리칸드림이 제시하는 물질적 가치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교회도 성경과 다양한 교회 문헌을 통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꾸준히 제시한다. 구약시대 아모스, 이사야, 미카 예언자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비판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부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문헌과 강론에서 현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한 심각한 폐해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물질 자체가 악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인간 태도의 문제이다. 데이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개츠비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며 그녀를 경제적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꾸며진 자아의 경험은 공허함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달콤하였다. 그러나 헤어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부유한 집과 부유하고 충만한 삶 속으로 사라졌고, 개츠비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진실한 자신이 아닌, 꾸며진 자신이 한 경험은 아침 이슬처럼 해가 떠오르면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가면 쓴 자기 모습이 언제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의 현재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청년이고, 군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림막은 언제 벗겨질지 몰랐다.” 육군 장교로서 입고 있는 군복이 감추고 있는 가난을 그녀가 발견할까 두려워한다. 꾸며진 자아는 결코 안정감을 줄 수 없다. 사랑 얻으려 재물에 집착했지만…자신의 정체성 잃어버린 개츠비 잠깐의 욕망 채우는 물질적 성공…진정한 삶의 행복 이룰 수 없어 결국 데이지와의 사랑에서 개츠비는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나중에 부자가 된 주인공은 그녀의 남편 톰에게 “당신과 결혼한 건 오직 내가 가난하고 기다리기 힘들어서였어”라고 소리친다. 자신을 버리고 같은 상류층에 속한 톰을 선택한 그녀의 판단은 남성으로서 개츠비의 존재 가치를 가난과 연결한 것이다.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서 그는 가난한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주인공의 자존감은 전적으로 돈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마침내 막대한 부를 이루고 돌아온 개츠비는 잃어버린 자존감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어도, 자존감을 내적 가치나 도덕적 온전성에 두지 않고, 물질주의에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자아를 형성한다. 그는 데이지와 다른 사람들의 존중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부를 과시해야 한다. 고급스러운 저택을 자랑하거나, 화려한 파티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인정받아야 한다. 자존감은 끊임없는 자랑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랑이 멈춘 순간 자존감도 멈추어 버리는 약함이 있다. 심지어 주인공은 “사랑하는 데이지의 눈이 보이는 반응에 따라 자기 집의 모든 것을 재평가한다.” 즉, 자신이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 데이지가 감동을 받으면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것이라도 의미가 없다. 주인공의 자존감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그녀의 반응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라캉의 모방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여 자신의 욕망으로 만든다. 부에 대한 개츠비의 욕망은 바로 데이지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자신의 부에 대해서 데이지가 만족할 때, 자신도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그 만족은 데이지의 만족인 것이다. 욕망은 개츠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지로부터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데이지의 욕망을 모방한 개츠비의 욕망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채울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 받은 칭찬은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이지,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인들이 자존감과 행복을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서 찾으려는 태도에 대해서 비판한다. 「찬미받으소서」에서 그는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라고 언급한다.(204항) 소비주의는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하고 더 단단한 내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물질적인 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중요하지만,” 결코 “삶에 충만함을 주지 못한다.”(2022년 9월 18일 삼종기도 훈화) 루카복음 12장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저장된 재물이 안정되고 지속적인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물질적 성공이 자존감과 동일시될 때, 도덕적 양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소비 만능주의가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은, 하찮은 쾌락을 열병처럼 추구하는 태도, 그리고 무뎌진 양심이다.”(「복음의 기쁨」 2항) 물질과 소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경제적 성공만이 자신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주인공은 약국에서의 불법 주류 사업을 통하여 부를 획득하였다. 또한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며 자신의 과거까지 위조한다. 데이지는 뺑소니로 남편의 애인을 죽였지만, 자신이 “저지른 엉망진창을 개츠비가 치우도록 만들고,” 자신과 남편은 “자기들의 돈과 그 거대한 무책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결국 데이지는 개츠비라는 고유한 한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물질적 화려함에 이끌렸다. 그가 자신의 셔츠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자 그녀는 울먹이며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셔츠들이에요. 슬퍼져요,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찼다.” 주인공의 파티에 왔던 수많은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장례식에는 “경찰과 사진사들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인간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물건처럼, 더 이상 화려한 파티를 열어줄 수 없는 개츠비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찬미받으소서」 중 ‘버리는 문화’(20~22항) 참조)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만 가면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서 자행되는 폭력들을 보면서, 1920년대 아메리칸드림이 경제적 풍요로움 뿐만 아니라, 왜 혼란과 불확실성, 불만과 허무함을 동시에 가져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3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파우스트」: 욕망의 정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주인공이 악마와 계약을 맺는 장면은 익히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지식과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팔아 버리는 상상력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치명적인 매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우스트 유형의 인물은 괴테의 고유한 창작은 아니다. 이미 중세 시대부터 전설 속의 인물 혹은 실존 인물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했다. 전통적으로 파우스트는 결말에서 구원받지 못하지만, 괴테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미국 예수회 어느 관구장 신부가 임기를 마치면서,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질문받았다. ‘하고 싶은 사도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예수회원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욕망은 어떤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생물학적, 심리적, 정신적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 원동력이기도 하다. 살고자 하는 욕구와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멈춰버릴 것이다. 파우스트 사건의 시작은 욕망이었다. 인간의 지식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 결국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적인 절대적 만족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을 실행한다. 계약에 따르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지상에서 지식, 경험, 쾌락을 파우스트에게 제공하며, 대가로 파우스트는 죽은 뒤 악마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계약에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 있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어야 계약이 성립된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절대적 만족을 경험한 순간, 파우스트는 죽어 악마의 소유가 된다.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현세에서 온전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있다. 절대적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악마와 계약맺은 파우스트 자기중심적 욕망 채우려다…주변 사람들 희생시키고 파괴 제1부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다룬다. 악마의 힘으로 20대 청년으로 변신한 주인공은 15세 소녀 그레트헨을 사랑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갈망은 에로틱한 형태로 굴절된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사랑 안에서 유한함을 초월할 수 있는 영원성의 한 단면을 찾으며, 절대적 실재가 형상화될 가능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다. 그레트헨과의 밀회를 위해 그녀의 어머니에게 건넨 과도한 수면제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동생의 타락에 분노한 오빠는 파우스트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파우스트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그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는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파우스트의 욕망은 자기중심적이다. 사랑하는 대상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희생시킨다. 그의 욕망은 절대적 실재의 숭고함을 향하였지만 자기 자신에 집중되어 있고, 영원성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추구하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보지 못한다. 1부에서 파우스트의 욕망은 파괴적이고 지극히 자기 소유적이다.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욕망을 보여준다. 1부에서 그는 그레트헨을 중심으로 감각적, 정서적, 지적 차원의 충만함을 추구하였지만, 2부에서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 지폐 발행, 고전적 아름다움의 회복, 대규모 공학적 토목 사업 등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성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자신이 기획한 사업들의 결과가 초래한 타인들의 삶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인식하게 된다. 파우스트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노 부부가 소유한 작은 오두막, 경당, 라임 나무들을 자신의 개발 사업에 포함하기 위해,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심의 찔림을 느낀다: “그대들처럼 영리한 이들에게 말하건대, / 내 마음은 찔리고 또 찔려 / 더는 견디기조차 어렵소.” 이주 과정에서 그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그는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폭력적이었구나!”라고 후회한다. 그는 처음으로 진실한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프로젝트로 인한 파괴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깨닫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봉사하는 삶으로 회심했을 때 비로소 완전한 만족감 얻어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늙고 장님이 된 파우스트는 바다로부터 획득한 땅에서 모든 사람이 충만하게 번성할 이상적 미래 공동체를 상상한다: “자유로운 민족이 자유롭게 서 있는 / 자유의 토지.” 그 순간 메피스토펠레스와 맺었던 계약의 치명적 조건인,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최고의 충만함을 표현한다. 진정한 만족 속에서 머물기를 원하는 순간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파우스트는 계약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경험한 이 ‘순간’은 욕망의 절대적 충족이라기보다는, 욕망이 온전히 정화된 순간이다. 주인공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유적이고 파괴적인 갈망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인류의 자유와 번영을 건설하기 위한 욕망에 이르렀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욕망의 힘은 그대로이지만, 욕망의 대상이 변화되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전쟁에서 다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회심하였다. 과거엔 귀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면,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투신하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 개인의 고유한 열정과 욕망의 힘은 그대로이지만, 욕망의 목표가 바뀌었다. 회개의 핵심 내용은 방향의 전환이다. 로마 군인들이 행진하며 방향을 바꿀 때, ‘메타노이아’라고 외쳤던 것처럼, 파우스트도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에서, 타인에 대한 봉사의 욕망으로 변화되었다. 마지막에 파우스트가 절대적 만족감을 표현하기 때문에 악마와의 계약이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약을 맺을 때의 절대적 만족과 마지막에 경험한 절대적 만족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계약서에 있는 만족은 개인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지만, 끝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줌으로써 경험되는 만족이었다. 개인의 사적인 욕구를 비우고, 타인의 욕구를 채워줄 때,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절대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요한 15,13 참조)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파우스트는 자신의 개인적 욕구들을 내려놓고, 타인에 대한 봉사의 삶을 꿈꾼 순간 가장 완전한 만족감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과 일맥상통한다. 기존의 파우스트와는 다르게 괴테의 파우스트는 죽는 순간 천사들의 도움으로 구원받는다. 비록 정화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잘못을 하였지만, 끝까지 갈구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18~19세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정신 안에서 괴테는 유한한 인간이 이성과 감정의 능력으로 무한한 절대적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이상화하였다.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를 ‘순례자’로 인식한 것처럼, 괴테의 파우스트는 “분투하는 한, 끊임없이 오류에 빠진다.” 18세기 영국의 대표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는 “실수는 인간의 몫이요, 용서는 신의 덕목이다”라고 말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폭풍의 언덕」 : 사랑과 폭력

사랑의 가치는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순수성, 진실성, 열정, 헌신, 자유 등.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열정적인 사랑의 대명사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의 강렬함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1847년 출판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당시 고딕 소설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명확한 도덕적 시각이 없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흔하지 않은 깊은 사랑이 복수와 폭력을 감싸고 있어서, 빛과 어둠이 혼재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교회사 안에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었던 경우들이 있다. “신이 원하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간 비극적 폭력을 낳았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 믿었다. 또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 등의 사건들이 있다. 교회는 과거 그리스도교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규범과 예의를 강조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남녀의 사랑은 절제되고 예의범절에 맞는 형식 안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규범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그리고 죽음도 멈출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의 힘 자체였다. 캐서린의 “나는 히스클리프이다”라는 말과,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영혼(캐서린)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서로를 자기 존재 그 자체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규범적이고 문명화된 사랑은 이들의 결합을 담아낼 수 없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을 “영원한 바위층과 같다”는 유명한 표현을 한다. 자신의 사랑이 달콤하고 낭만적이기보다, 거칠며 변하지 않는, 뭔가 근원적임을 보여준다. 이 사랑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거친 들판과 격렬한 날씨, 즉 폭풍의 언덕 같은 것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길들지 않는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캐서린의 죽음 앞에서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미치게 만들어도’ 좋으니, ‘어떤 모습’이라도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유령이 되어서 자신을 괴롭혀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심연에 홀로 사는 것보다, 유령에게 시달리기를 스스로 자청하며, 사랑이 무덤의 문턱을 넘어선다. 고통과 죽음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랑의 열정을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캐서린의 신체적, 심리적 무너짐과 히스클리프의 평생에 걸친 고뇌와 잔혹한 복수의 주된 원인으로서 파괴적이며 광적인 집착이다.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해 버리자, 사랑은 복수로 변한다. 3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사법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담보, 부채, 결혼 계약을 이용해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해 버린다. 결국 힌들리는 과거에 어린 히스클리프가 그랬던 것처럼, 하인처럼 전락해서 완전히 파멸한 채 절망 속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연인에 향한 히스클리프의 집착…복수를 ‘사랑’으로 정당화해 절망·파멸 자초 평화로 충만한 사랑 이루려면 폭력 멈추고 끊임없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복수를 폭력이나 죄로 생각하지 않고, 근원적 질서를 바로 잡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와 캐서린은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 엮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캐서린이 에드거를 선택한 일은 사회의 계급과 재산 구조가 강요한 부당함으로 느끼기 때문에, 복수의 폭력과 잔혹함은 캐서린의 결혼이 무너뜨린 존재론적 사랑의 질서와 균형을 회복하는 정의로 포장된다. 히스클리프에게 사랑과 복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복수는 사랑의 연장선이다. 복수는 상대방에게 고통 자체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받은 고통을 드러내고 알리기 위함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심장을 부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를 버림으로써 그녀의 심장을 부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심장도 부서졌다”고 말한다. 즉 복수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파괴는 바로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다. 캐서린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복수에 의해 겪는 고통을 통해, 그의 고통을 깨닫도록 기대된다. 복수는 과거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말한다,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어. 내가 그녀에게 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있을 거야.”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길이 결국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복수를 사랑의 행위로 정당화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히스클리프는 계획했던 복수를 거의 다 이루었음에도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소진되어 버리고, 만족과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제 그는 ‘기와 한 장 들어 올릴’ 힘도 없고, “그들을 파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털어놓는다. 복수가 그의 존재를 충만케 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집어삼켜 버렸다.” 자기 기만적이며 파괴적 집착으로 포장된 그의 사랑은 결국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렸다.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태복수법이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구약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심지어 이런 형태의 복수는 부모들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과거에 힌들리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헤어튼의 교육을 박탈해 버리고, 캐시에게 자신의 병약한 아들과 결혼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히스클리프가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끝 무렵 캐시와 헤어튼에게서 캐서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이 관계를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복수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용서와 치유를 향해 나아간다. 두 사람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태도 변화는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점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열정적인 사랑의 깊이는 예의범절과 사회계급이 중요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분명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동시에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히스클리프의 폭력은, 19세기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잔인함과 폭력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자기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 신분과 물질적 욕망 때문에 에드거와 결혼해 버린 캐서린을 용서하지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이다. 죽음조차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이었지만, 그 안에 용서가 없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결국 집착과 복수와 자기파괴의 결과를 낳았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의 사랑은 실망과 상처를 피해 갈 수 없다.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적인 관계의 지속이 아니라, 평화와 충만감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단어가 지겨워지지 않아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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