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오만과 편견」: 사랑의 학교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조사하였는데,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다아시가 단연 1등으로 뽑혔다. 차갑고 불친절해 보이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가족을 남몰래 보호하는,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행위는 많은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두 연인은 사랑을 단순히 받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변화되어 가며 사랑을 배우게 된다. 갓난아이가 무수한 반복과 실수를 통해 모국어를 습득하는 것처럼, 사랑도 단숨에, 한 번에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랑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증가하며 성숙해질 수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째 서간에서, ‘주님께서’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여 우리는 ‘흠 없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1테살 3,12-13 참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간다. 흥미롭게도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갈수록 사랑의 깊이는 더해간다. 사랑의 깊이와 인간 성숙함의 깊이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이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서로에 대한 첫인상이 모든 갈등의 시작이다. 다아시는 무도회장에서 엘리자베스와 춤을 추라는 주변의 권유를 거절하면서 그녀의 외모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그럭저럭 괜찮지만, 내가 관심 가질 만큼 예쁘지는 않아.” 이런 모욕적인 말을 우연히 들은 그녀는 무도회 직후, “그는 몹시 불쾌하고 끔찍한 사람이며, 비위를 맞출 가치조차 없어”라며, 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다아시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부정적 판단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내 자존심을 짓밟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자만쯤은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허영심을 상하게 한 그 모욕으로 인한 개인적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아시 집안 집사의 아들인 위컴이 다아시에 관하여 헐뜯는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다아시가 그런 나쁜 사람이라고 바로 평가해 버린다.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그녀는 일방적인 한쪽만의 의견을 듣고, 그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고집하며, 다아시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한편, 다아시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편견은 계급적 우월감과 피상적인 판단에서 시작된다. 첫 만남에서 그녀의 외모와 사회적 지위를 무시하는 태도는 첫 번째 청혼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청혼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보다는, 청혼을 결정하기까지 자신이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과 희생들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나의 더 나은 판단, 가족의 기대, 그대의 열등한 출생, 나의 신분과 처지에 맞서 싸워”야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기중심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마치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결혼의 승낙을 당연히 기대하는 태도에 “좌절하고 격분한다.” 다아사와 엘리자베스의 첫 만남 서로 참모습 보지 못하고 충돌 시간 지나며 성숙해진 두 사람 이기심 버리고 헌신적인 삶 선택 자기 중심 아닌 ‘타인 중심’ 될 때 진정한 사랑에 도달 할 수 있어 그러나 청혼을 거절당한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자기 성찰의 편지는 그녀가 바라본 자기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후, 엘리자베스의 막내 여동생 리디아 사건을 그녀가 모르게 해결한다. 영웅적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마침내 두 번째 청혼에서 그는 사회적 계급과 우월감을 모두 버리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한다고 말하며,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의 사랑으로 변화된다. 오만한 아집에서 겸허한 자기 인식으로의 성장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도 자기 성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청혼을 거절한 후, 그녀는 다아시가 보낸 편지를 여러 번 읽게 된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강한 편견을 가지고” 읽으려 하지만, 여러 번 들여다볼수록 위컴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속았는지, 다아시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얼마나 눈멀게 했는지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통찰력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능력을 지녔다고 자신 높이 평가’해 왔지만, 그것들이 ‘이성이라기보다 허영’이었음을 깨닫는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강도 높은 자기 성찰의 과정은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 보다 더 객관적인 지식을 얻게 한다. 신분 사회의 우월감이나 편견에 얼룩진 사랑이 아니라, 상호 간의 성숙한 사랑은 바로 서로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확장으로 가능하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도록 기도한다.(필리 1,9) 당시 필리피는 작은 로마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로마의 문화적 영향 아래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사는 로마 식민지였다. 로마 문화에서 관계는 계급과 명예, 후원, 의무 등의 가치관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위계보다 상호 섬김을, 명예보다 겸손을, 상호 의무가 아닌 자기 헌신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권고한다.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에 대항하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참된 가르침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잘못 적용되거나 오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인식함으로써 사랑에 도달한 것처럼, 필리피 신자들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참된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욱더 풍부해진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십자가를 ‘사랑의 학교’라고 표현하였다. 진실한 사랑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적인 삶을 묵상하고 깨닫고 배워간다는 의미이다. 이 ‘학교’에서 사랑은 위로를 주는 감정이나 영적 감미로움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섯 쌍의 부부는 오스틴이 살았던 영국 섭정 시대(1811~1820)의 결혼과 사랑의 여러 문제를 잘 보여준다. 낭만적 사랑은, 참된 사랑 보다는, 주로 돈, 명예, 사회적 지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러한 가치들에 기뻐하고 행복해하였다. 엘리자베스의 똑똑한 친구 루카스가 진실로 사랑을 할 수 없지만, 경제적 안정을 위해 콜리즈를 남편으로 선택한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오스틴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가장 이상적인 부부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섭정 시대의 가치관에 도전하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치열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사랑을 배워야 했던 것처럼, 독자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배워간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사랑의 학교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7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돈키호테」 :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

밀란 쿤데라가 “모든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든지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라고 극찬한 것처럼, 유럽 문학사에서 최초의 소설로 여겨지는 「돈키호테」는 그 어떤 작품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 위치에 있다. 특히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그려내는 주옥같은 우정은 400년이 넘은 세월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16세기를 거치면서 우정의 시학은 다양한 장르에서 중요한 문학적 서사 구조였다. 정치적, 문학적 측면에서 황금 시기였던 당시의 스페인은, 동시에 여러 위기에 직면하면서 상업화, 도시화, 계층 이동에 따른 불안의 변혁기를 겪고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우정이라는 가치를 통하여 흔들리는 사회의 토대를 다시 세우려 한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문학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망상에 사로잡힌 방랑 기사이다. 산초는 소박한 농민으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사회 신분은 희극적이면서도 진지한 갈등을 만들어낸다. 현실주의자인 산초가 주인의 이상적 환상에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반복적인 말다툼이 일어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종자가 믿음이 부족하다며 화를 내고 비난하게 된다. 서로 다름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은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정 안에서, 사회 안에서 혹은 국가 간의 싸움은 대부분 서로 다름에서 시작하였다.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서로 다름은 누군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창조의 핵심적인 원리이다. 하느님은 6일 동안 매일 다양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는 그의 저서 「창조의 6일 강론」에서, 다양한 자연 세계는 하느님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책”과 같다고 하였다. 제2의 성경인 피조물의 각각 고유한 창조 목적은 반목과 경쟁, 혼돈과 상대주의,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창조주의 선함과 질서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서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창조주의 질서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 다툼과 갈등을 일으킨 돈키호테와 산초의 서로 다름은 길 위의 여정에서 우정의 가치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 망상에 사로잡힌 기사 돈키호테·현실적이며 소박한 농민 산초 모험 속 다툼과 갈등 많았지만 서로의 생각 받아들이고 존중 솔직한 대화로 장벽 넘어서면 진정한 마음의 일치 이룰 수 있어 16세기 유럽 귀족들은 자신의 인품과 상관없이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도덕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 하층계급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귀족인 돈키호테와 농민인 산초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라는 틀 안에 있었지만, 산초는 종종 주인의 명령에 반하는 현명한 조언을 한다. 돈키호테는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며 산초의 평민적 지혜를 무시하며 갈등이 발생한다. 속담을 사용하는 산초에 돈키호테는 “속담은 시대의 지혜를 응축해 놓은 것이지만, 너는 종종 그것들을 억지로 끌어다 써서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처럼 보이게 한다”라고 질책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산초의 조언을 무시할 때마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 망신과 육체적 처벌을 겪게 된다. 모험을 거듭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계층적 구분이 흐려진다. 마침내 돈키호테는 산초를 동등한 대화 상대이자 조언자로 대한다: “산초, 네 말이 옳다. 둘시네아를 만나러 가기 전에 공주를 동행하라는 네 조언을 따르겠노라.” 그러면서 그를 “친구,” “아들,” 심지어 “친구이며 안내자”라고 호칭한다. 진정한 우정이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초월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초기 교회도 민족, 계층, 성별, 사회적 지위에 의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부자와 가난한 자, 남성과 여성 등의 불평등으로 인한 다툼과 분열은 낙원에서 타락한 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비판한다. 성 유스티노 순교자는 「제1변증서」에서 우리가 “이전에는 서로를 미워하고 해치며, 풍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족의 사람들과는 함께 살기를 거부하던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 서로 친밀하게” 지낸다고 언급하며, 그리스도교가 인종적, 민족적 갈등의 장벽을 허물었다고 강조한다. 유다인과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겪고 있었던 갈라티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3,28)라고 권고한다. 역할의 구분을 상대화하면서, 근본적인 평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회사에도 “천한 백정을 점잖게 대해 주니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다”라고 고백한 황일광 시몬 성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우정이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정의하였다. 서로 간의 차이는 그대로이지만, 동일한 가치를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동등한 친구가 된다. 제2부 도입부에서 산초가 자신의 주인에게 한 시골 소녀를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 공주라고 우기는 유명한 장면에서, 이제는 종이 주인의 이상적인 기사도 세계관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자기 상상력으로 마법을 만들어 내는 변화를 보게 된다. 또한 가족들의 계략에 속아 현실로 돌아와서 삶의 활력을 잃고 죽어가는 돈키호테에게, 산초는 다시 모험을 떠나자고 간절히 애원한다. “죽지 마세요, 주인님. 이 세상에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어리석음은 더 이상 해볼 것도 없이 스스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산초는 이제 주인의 이상적 비전을 자신의 경험적 현실보다 우선시하며, 주인의 가치관을 내면화시켰다. 친구가 되어가는 여정에서 산초는 점차 이상주의를 받아들여 “돈키호테화”되고, 돈키호테는 현실 감각에 눈을 뜨며 “산초화”되어 마침내 둘은 같은 정신으로 연결된다. 산초는 처음에 돈키호테가 약속한 물질적인 보상을 기대하며 따라갔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보살피고, 존중하며, 역경 속에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 마음의 일치를 이룬 동등한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멈추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화였다. 비록 산초의 어설픈 속담, 불평, 주인의 망상을 노골적으로 의문시하는 항의, 그리고 돈키호테의 얼토당토않은 일장 연설과 꾸지람 등으로,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는 솔직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친구가 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 (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일리아드」 : 아킬레스의 눈물

“분노.”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몇 주간을 묘사하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는 이 단어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맹장 아킬레스의 분노이다. 기원전 1200년경 발발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는 500년 후인 기원전 8세기경 대서사시로 승화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는 두 번 분노한다.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아킬레스가 선물로 받은 트로이 여인을 빼앗아 버린다. 전쟁의 영웅에게 주어진 선물은 단순히 전리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명예와 영광을 상징한다. 아킬레스는 빼앗긴 소유물이 아니라, 짓밟힌 명예에 대해 분노한다. 단 한 번도 숙여보지 않은 자존심에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여기에 대한 분노로 아킬레스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군에게 차마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던 그는, 간접적 침묵의 폭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그가 전장에서 철수하게 되자, 그동안 전쟁에 거의 이겨왔던 그리스 군대는 궤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투에 뛰어들며, 다시 아킬레스가 전장에 돌아온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의 왕자이면서 최고의 명장인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형제와 같았던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스는 두 번째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킬레스가 트로이 적군들에게 직접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른다. 특히 제21권 강변에서의 전투는 피에 굶주린 아킬레스의 잔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아킬레스의 인간성 파괴에 이르는 분노의 표출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주검을 돌려주지 않고 갖은 모욕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한 모습이 조각된다. 아킬레스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안에 품었던 분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결과는 인간성 파괴까지 이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어쩌면 작가는 트로이전쟁보다, 인간 본성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싸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인 G. K. 체스터턴은 “모든 삶이 전쟁이기 때문에, 일리아드는 위대하다”라고 극찬하였다. 아는 선배가 가족들과 자동차로 유럽 여행을 하였다. 형수님과 자존심 대결하느라, 2시간 넘게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운전하였다. 결과는 어린 두 아이의 몸과 마음의 탈진으로 하루를 까먹었다고 한다.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적개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4,26)라고 권고한다. 내면의 분노는 우리의 눈빛, 말, 행동을 통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비인간적인 폭력 극에 달하며 아킬레스에 죽임 당한 헥토르 적장 앞에 엎드린 헥토르의 부친 함께 눈물 흘리며 인간성 회복 호머는 동정심이라는 감정으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킬레스는 당시 관행을 어기고, 적장 헥토르의 주검을 모욕하고 트로이 진영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늦은 밤 아킬레스를 찾아가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암 왕은 인간성의 회복을 보여준다. 노구를 이끌고 홀연 단신으로 적진을 찾은 프리암의 모습에 아킬레스와 그리스 장군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더욱이 자기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욕을 자행한 그 두 손에 입맞춤하는 프리암의 행동은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식의 주검을 찾기 위해,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다. 그러면서 아킬레스에게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받아 마땅하오”라고 호소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간청하는 프리암의 호소에 분노로 가득 찼던 아킬레스의 마음은 누그러진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분노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은 강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한 아버지의 용서하는 연민이다. 프리암은 “아킬레스의 발 앞에 쓰러져” 헥토르를 위하여,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위하여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온 집 안에 가득 찼다.” 학자들은 이 장면을 감정의 정점으로 여기며, 주제의 흐름이 아킬레스의 분노에서 연민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해석한다. 아킬레스의 눈물은 프리암에게 느끼는 연민과 화해의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회심과 용서의 표시로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다윗 임금,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한 여인, 밖으로 나가서 몹시 많이 울었던 베드로 사도 등 다양한 눈물을 만날 수 있다. 초대 교부들도 눈물의 은사를 두 번째 세례라고 여기며, 신앙생활에서 눈물을 강조하였다.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인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며 울 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자 잘못에 대해 울도록 권고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막의 철학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는 “무엇보다도 눈물을 구하라. 울음이 당신 영혼의 거친 완고함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라고 초대한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측은지심의 눈물이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프리암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흘린 눈물을 통하여, 완고하였던 분노의 마음을 마침내 무너트렸다. 진정한 승자가 되었다. 호머의 작품들은 로마제국 귀족 자녀들의 필독서였다. 철인 황제라 불리는 제16대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의 평정심을 기초로 하는 스토아 철학의 정수인 「명상록」에서 “범법자들도 나와 같은 혈통이나 집안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 연관이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과 나는 신성을 지닌 동일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프리암이 아킬레스를 찾아갔던 이유는, 분노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아킬레스조차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략 180명의 인물을 다루면서, 24권의 책과 1만 5000행 이상의 운문으로 쓰인 「일리아드」는 서양 문학의 초석이다. 동시에 다양하게 갈라져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정체성의 뿌리였다. 더 나아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묘사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는 측은지심을 깨닫도록 빛을 밝힌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9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관계

신비주의의 영어 단어인 ‘mysticism’에 대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유명한 유머가 있다. 이 단어는 안개를 의미하는 ‘mist’와 분열을 뜻하는 ‘schism’으로 이루어졌는데, 신비주의란 안개 속에서 시작해 분열로 끝난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명확하지 않은 개인의 영적 체험이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고립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신학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르침이라면, 영성은 각 개인의 실질적 경험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영성에 대해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과 영성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신학이 하느님에 대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이해와 그리스도교 진리를 다룬다면, 영성은 그러한 이해와 진리를 각 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하고 살아가는 영역이다. 영성은 신학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공간이다. 또한 신학은 역사를 단일하며 보편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성은 구체적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개인의 살아 있는 경험이다. 영성은 신학의 보편적 역사성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따라서 신학의 보편성과 영성의 개별성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신학의 보편성을 통해 영성의 개별성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빛 안에 머물게 되고, 동시에 신학의 보편적 가르침은 영성의 다양한 개별적 체험을 통해 확장되고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 문학과 신학의 관계도 영성과 신학의 관계와 비슷하다. 문학의 기원을 종교적 신화와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길가메시 서사시」는 최초의 서양 문학작품이면서 최초의 종교적 신화로 여겨진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언어와 신화, 의례를 연구하면서, 언어가 시작되었을 때, 의례와 언어는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초기의 언어적 예술은 의례적 행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 작가들에게 문학은 신앙을 확인하고 증언하는 중요한 방식의 역할을 했다. 물론 종교에 적대적인 작가들은 문학을 통해 신앙에 도전하였다. 동시에 하느님의 계시인 성경도 문학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은 성경이 문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명시하고 있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12항) 즉 문학의 요소들이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T. S. 엘리엇은 문학이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신학은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다룬다고 이야기한다. 불완전하고 이기적 존재인 인간의 삶은 뭔가 결점과 어두운 면이 있다. 반면 신학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선한 빛을 제시한다.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그냥 성찰에서 멈춘다면 인간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진리의 빛이 현실의 인간 삶을 품지 못하고, 이상화된 모습만을 비춘다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문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 보완적 관계 형성이 요청된다.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개인 삶의 경험이다. 색칠되고 꾸며진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날 것으로서의 경험. 왜냐하면 하느님은 흠 없이 가공된 모습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의 본질이 교리나 제도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행동 등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계시는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완결되었다는 전통적 명제보다는,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영향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드러낸다. 계시가 끊임없이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길 위의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서 개인의 경험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문학과 차별화된다. 하지만 문학에서 묘사되는 개인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드러나는 경험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신앙인의 인간 본성과 비신앙인의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교도였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선한 빛의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였던 칼 라너는 ‘근본적인 인간의 경험들(foundational human experiences)’ 안에서 초월성을 제시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거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초월적 경험이 가능하다. 서양의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다양한 문학작품들에 관한 연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폭과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한층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비록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언어를 직접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적인 가치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호머의 「일리아드」는 용서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우정을,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순명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사랑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캣츠비」는 자존감을 흥미롭게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오늘날 현대 사회는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 공동체 의식의 약화, 노인 문제, 인구 소멸,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대면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직결된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양한 문학작품들의 세계가 의미 충만한 새로운 문을 열어 주길 희망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1996년 예수회에 입회해 2007년 사제품을 받았다. 영국 런던대학교 히쓰롭 칼리지에서 영성신학 석사 학위, 워릭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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