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죽음 후에는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이가 묻습니다. “죽은 육신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부활한 사람 모습은 어떠한가? 흔히 말하는 연옥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이들은, 마치 윤회설을 믿는 듯, 다음 생은 좀 다르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이 세상에 다시 오는 다음 생은 실상 없습니다. 영원한 행복(구원) 아니면 어둠이 뒤따를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주 선명한 답을 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죽은 후 부활한 사람의 모습을 세상 언어로 상세히 표현해 내기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서 ‘부활한 사람’ 모습을 찾아보는 일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는 구절을 꼽으라면 다음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사도는 죽은 이들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4) 사도는 설명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첫 인간)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이제 창조의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지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 새로운 창조(creatio nova) 등입니다. 지속적인 창조는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피조물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을 이릅니다. 새로운 창조란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신비의 영역을 일컫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한(새로 창조된) 육체, 곧 주님의 자녀들이 도달하여 누리게 될 천상 신비의 모습을 이 세상의 육체와 대조시킵니다. 물질적이라 늙어가고 병드는 생로병사의 테두리에 갇혀 살아가는 가련한 육체가 있듯이, 천상 신비의 세계에 속해 영적이고 영광스러운 육체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늘에 속한 몸체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체들도 있습니다.”(1코린 15,40) 묵시록 저자 요한은 구원받은 성인들이 천상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명쾌하게 전해줍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3-4)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흔히 사람들은 죽은 후에 겪게 될 연옥을 시·공간의 틀에서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마치고 죽은 다음 맞이하게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6면

[말씀의 우물] 룻은 누구입니까?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를 담은 룻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나의 하느님은 임금님)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나의 사랑스러움)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마흘론(질병)과 킬욘(허약)이었는데…”(룻 1,1-2) 모압 땅에 정착한 후 얼마 안 되어 남편 엘리멜렉과 사별한 나오미는 두 아들을 혼인시킵니다.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애정, 원기회복)이었다.”(룻 1,4) 10여 년이 지나자 두 아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차례로 세상을 떠나서, 결국 세 여인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서글픈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쓰라린 여인)라고 부르셔요. …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주셨답니다.”(룻 1,20-21)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는 1장에서 끝나고, 나머지 2장부터는 평화와 사랑과 축복이 넘쳐흐릅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펼쳐지는 보리와 밀 이삭줍기 이야기는 옛날 우리나라 논밭에서 펼쳐지던 이삭줍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나아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사이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면서 불행이 덮쳤다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는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룻기는 판관기 끝에 배치돼 역사서로 분류되지만, 내용을 보면 주님의 섭리를 깨우쳐주는 교훈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엿보게 해주는 장면을 봅니다. “주님께서 네가 행한 바를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룻 2,12) 룻기는 기원후 아가,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와 함께 유다인들의 다섯 주요 ‘축제 두루마리(축제오경)’ 중 하나로 오순절이나 수확절에 봉독되기도 했습니다.(레위 23,15-21; 신명 16,9-11; 사도 2,1 참조) 룻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세사의 한 획을 보게 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마태 1,5-6) 모압 여인 룻이 다윗 임금의 증조모가 되었기에 마태오복음 1장은 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길이는 짧지만 그 내용이 더없이 따뜻하고, 풍요롭고, 평화가 넘칩니다. 그 덕에, 언제부터인가 저는 룻기를 읽거나 떠올릴 적마다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솟아나는 행복함과 치유의 힘을 느낍니다. 세대 차이로 인한 갈등과 가족 간의 어려움을 겪는 분이 요즘 참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룻기를 천천히 읽어 보시기를 곧잘 권하곤 한답니다. 제가 느끼는 행복과 치유의 힘이 여러분께도 전해진다면 좋겠습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8면

[말씀의 우물] 예수님의 희년 선포

예수님의 희년 선포 내용은 신약성경에는 루카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 회당 예배 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은혜로운 해(희년)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 해로 지정됩니다.(레위 25,8-55 참조) 그러나 실제로 희년이 실행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만큼은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다음 구절이 희년의 기본 정신을 잘 설명해 줍니다. “땅은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우리의 모든 소유는 영원토록 우리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돌볼 뿐입니다. “너희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너희 곁에서 허덕이면, 너희는 거들어 주어야 한다.”(레위 25,35) 예수님께서는 희년 선포에 이어서 곧바로 그 희년의 성취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궁극적 희년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의 성취(완성)는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까? 예수님의 희년 선포에 뒤따른 루카복음 전체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희년의 성취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희년 선포의 첫 번째 성취는 회당에서 더러운 영(마귀)을 쫓아내시는 단락에서 잘 나타납니다.(루카 4,31-37 참조) 여러분은 희년이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저는 여러 교우분으로부터 희년을 맞이하여 ‘전대사’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 뜻깊은 은사도 좋지만, 희년의 참뜻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더욱 큰 축복이라고 봅니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먼저 매 일곱째 날이 안식일,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 그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이어지는 오십 번째 해를 희년으로 지내게 됩니다. 엿새에 걸쳐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일곱째 날은 쉬십니다. 그날은 거룩한 날로 주님을 기억하며 일손을 멈추고 쉬면서 그분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까지도 쉬도록 하고, 희년이 되면 땅도 되찾고 모두가 주님 축복 속에 새로 출발하도록 묶인 데서 풀려나는 거룩한 해방의 해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1코린 6,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궁극적 희년을 어떻게 맛볼 수 있습니까? 먼저 치유의 말씀 안에서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루카 17,21 참조; 마태 12,28 참조)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8면

[말씀의 우물] ‘나’(Adam, 사람)는 누구인가

‘사람의 아들아’(히브리어 Ben-Adam, 벤 아담)라는 표현은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만 100여 번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생로병사, 곧 생성 소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에 비해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아람어 Bar-Enash)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사람의 아들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가 섬기게 될 ‘영원한 임금님’을 뜻합니다. 이미 전기 유다교 전통에서부터,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이분이 바로 다윗 집안에서 나올 구세주(메시아)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네 복음서에서도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본디 사람(Adam, 아담)은 영원하신 분을 닮아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이어서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자손이 번성하도록 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잘 가꾸고 다스리도록 축복해 주십니다.(창세 1,28 참조)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첫 인간은 그분을 피해 숲속에 숨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 아담(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히브리어 Ayekah)”(창세 3,9) 이 물음은 그분께서 어제도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실존 전체를 꿰뚫어 보시며 던지시는 그분의 물음은 실은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축복의 주인공들입니다. 나아가 첫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의 늪에서,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를 입은 새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바오로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세상에서, 온 우주를 통틀어 ‘나(我)’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잘 가꾸어 가도록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이제 우리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결법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먼저 ‘나’의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깨달음과 함께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세 율법의 초석으로 가르치십니다.(마태 22,37-39 참조) 우리의 생각과 능력만으로 무슨 일을 하기보다는, 다음 말씀으로 기도드리며 일을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8면

[말씀의 우물] 혜성처럼 나타난 여인

유딧은 어떤 기적이나 외부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지혜와 기도와 덕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 속에 유다 왕국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원로 우찌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 13,18) 이 유딧 칭송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천사 가브리엘의 성모 마리아 찬송과 맥을 같이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루카 1,41-42) 일찍이 성 예로니모는 유딧을 훗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우리 신앙인들은 유딧처럼 악마와 죄(폭력과 전쟁)의 ‘머리를 잘라 내야’(유딧 13,7-8 참조) 한다고 했습니다. 유딧은 미인계를 쓰지 않고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품위 있게 행동하며, 매사에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 속에 자신과 민족의 정당방위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입니다. 고통과 재난은 어디서 올까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고통과 재난을, 흔히 율법을 어기거나 ‘잡신 공경’(에제 36,18 참조) 등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데 대한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유딧기와 욥기에서는 고통과 재난이 우리 자신이나 민족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도 시험하고 계십니다. … 주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운 이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유딧 8,25-27) 유딧기는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 이를 재해석해서 교훈을 주고자 하는 해설서 「미드라쉬」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그 핵심 줄거리는 실제 사건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유딧기의 주요 신학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우선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지고의 하느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인간에게, 곧 개인 또는 민족에게 허락하신 시련의 기간이나 범위를 그 누구도 예측하거나 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분의 섭리와 우리 미래는 작은 요인들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유딧기 안에는 위로부터 오는 기적이나 아무런 사건도 보이지 않습니다. 베툴리아 주민 모두가 벌벌떨 때 원로 우찌아는 제안합니다. “만일 닷새가 지나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응답)이 오지 않으면”(유딧 7,31) 적군에게 항복하고 성을 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유딧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또한 유딧기에서는 율법 준수의 테두리에 얽매이거나 선민 이스라엘 보호에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율법이 금하는 암몬족 아키오르(신명 23,4 참조)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받아들입니다.(유딧 14,10 참조)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유딧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말씀의 우물] 누구를 위한 성모송?

성모송은 성경 어디에 나올까요? 또 누구를 위한 기도문일까요? 우리가 미사를 비롯하여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때 바치는 가장 짧은 기도문인 십자성호가 마태오복음 28장 19절에서 나왔듯이, 성모송 앞부분도 루카복음 첫 장에서 나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인사합니다. 뒤이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께 찬미가를 읊어 올립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성모송 전반부는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가 합쳐져 이루어집니다. 성모송 후반부는 성모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며 주님께 올리는 기도와는 모양새가 다릅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는 “베푸소서!”라는 형식으로 직접 청원 양식인 반면, 성모님께는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대신’ 또는 ‘우리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전해달라는, 빌어달라는 전구기도입니다. 아울러 루카복음 첫 장에 나오는 두 여인의 만남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그때 태중에서는 선구자 요한 세례자와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 만나십니다. 엘리사벳은 외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요한 세례자)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그렇다면 성모송은 누구를 위한 기도문인가요? 전반부가 성모님 찬가라면 후반부는 청원기도입니다.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성모송을 봉헌하는 나 자신과, 믿는 이들과,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기도입니다. “저희 죽을 때에”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쉴 새 없이 매 순간 한 발짝씩 다가오는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도록 주 하느님께 전구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는 2001년 안식년 어느 날 성모송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아, 성모송은 우리 믿는 이들과 온 인류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빌어달라는 기도구나”라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뜻을 깨닫는 축복을 누리게 됐죠. 특히 ‘이제(nunc)’와 ‘우리 죽을 때에(et in hora mortis nostrae)’라는 표현 안에서 그저 쉼 없이 주님께 전구해 달라는 뜻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제(지금)’를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모송을 봉헌하는 우리는 성모님께 실로 엄청난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나와 우리 모두의 참 행복을 주님께 끊임없이 빌어달라는 기도니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말씀의 우물] 그분 이름을 거룩하게

구약과 유다 문헌에 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첫째, 율법학자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를 때 이스라엘 백성(믿는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레위 22,32; 신명 32,51; 이사 8,13 참조) “너희는 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나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드러나도록, 너희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레위 22,31-32) 둘째,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완성될 인류 구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뭇 민족이 보는 가운데 주 하느님께서 의로운 판관이며 구원의 완성자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스위스교회의 주보 성인 브루더 클라우스(1417~1487)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아인지델른 베네딕도 수도원 성지까지 약 50km를 성지순례 하는 동안 주님의 기도만 봉헌했답니다. 몇 번이나 바쳤을까요? 단 한 번도 못 바쳤다고 합니다. 놀랍지만 당연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다 보면, 그 첫 소절 안에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될 듯합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야고 4,14)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느님께 감히 직접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클라우스 성인은 이런 물음을 놓고 아마도 10시간 묵상으로도 그 오묘한 신비를 한껏 깨닫기에는 결코 흡족할 수 없었을 듯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실상 지상 최고의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온 우주 안에 둘도 없이 단 하나뿐인 나를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를 어찌 몇 시간 안에 단 10%라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고해성사 보속으로 가끔 “주님의 기도를, 뜻을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한 번 바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시겠습니까?”라고 교우분들께 제안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런 기도 매일 합니다”라면서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를 마치 대단치 않은 기도로 여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분들께서는 주님의 기도 봉헌 때마다 에제키엘서 36장에 나오는 구원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분의 축복이 이미 우리 안에서 활짝 피어오르리라 믿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해주는 날, 성읍들에는 다시 사람이 살고 폐허는 재건되게 하겠다. … 그래서 사람들이, ‘황폐하였던 이 땅이 에덴 정원처럼 되었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에제 36,33-35)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8면

[말씀의 우물]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님의 기도(마태 6,9-13)에는 일곱 청원 기도가 나옵니다. (참조: 루카 복음서 11장 2-4에는 다섯 청원만 나옵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를 각 나라말로 옮겨서 봉헌합니다. 그중 첫 번째 청원 “아버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빚나시며”는 무슨 뜻일까요? 그 뿌리를 우리는 에제키엘서 36장에서 찾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의 거룩함이 선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와 같은 표현이 에제키엘서 안에서만 25번이나 나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스라엘)을 민족들 사이로 쫓아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버렸다. 그들의 길과 행실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였다.”(에제 36,19) 주님 말씀과 뜻대로 살지 않은 대가로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제국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뭇 민족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 “이자들은 주님의 백성인데 그분 땅에서 나와야만 했지.”(에제 36,20) 이는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남의 나라 땅에서 헤매는 이스라엘의 운명, 그들이 받고 있는 징벌적 상황을 타민족들이 고발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들을 선택하신 주 하느님의 무능을 폭로하며 빈정거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 이제는 이스라엘을 뽑으신 주님께서도 지치셔서 손수 뽑아 세우신 백성을 더 이상 지켜줄 힘이 없으시구나” 하면서 뭇 민족이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할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조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내가 뽑아 세운 백성은)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에제 36,20) 이제 주님께서 당신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안이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이름을 걱정하게 되었다.”(에제 36,21) 주님께서 다짐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에제 36,22) 주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그분의 인격과 속성과 그분의 존재를 보다 품위 있게 드러내는 전통적 표현 양식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을, 그분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유다교 전통과 구약 안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 표현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1979년 인천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독일 튜빙엔대학교와 스위스 루체른대학교에서 성서주석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과 총무,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인천교구 역곡2동본당 주임을 마지막으로 본당 사목 여정을 마치고 2025년 1월 6일부터는 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사제로 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