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그리움과 목마름

영적인 목마름도 육신의 목마름도 있습니다. 유다 지방을 떠나 갈릴래아로 향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시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십니다. 햇빛이 강한 정오 무렵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그곳으로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여인은 매일 육신의 목마름을 달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여인은 깜짝 놀라 아룁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요한 복음사가는 짧게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한 4,9) 당시 유다인들은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인들을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보고 그들과의 접촉을 매우 꺼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마태 10,5)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여인이 생수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아리송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예수님 계시의 말씀을 듣던 여인은 아룁니다.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요한 4,25)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명백히 선포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고대 그리스어 ego eimi, ‘내가 그 사람이다’ 또는 ‘내가 존재한다’).”(요한 4,26) 여기서 예수님 계시의 말씀이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신 계시 양식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놓아둔 채 마을로 달려가서 외칩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한 4,29) 날마다 붙들고 있던 생존의 무게보다 더 큰 기쁨, 곧 주님을 만난 기쁨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외침 덕분에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요한 4,39) 됩니다. 시카르가 복음화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복음 선포자가 되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뵙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전적으로 새롭게 됩니다. 영원성에 대한 그리움, 세상의 모든 아쉬움과 그리움을 삽시간에 다 채워주는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영혼은 천상 주님으로부터 나와 주님께로 향하여 그분 안에서 완성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세상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 말씀을 듣다 보면, 결국 우리 내면의 가시지 않는 그리움과 목마름까지도 다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 그동안 ‘말씀의 우물’을 연재해 주신 신교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8면

[말씀의 우물] 메시아(그리스도)는?

신약성경에서 메시아(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쉽고 짧게 알려주는 구절로 다음을 꼽겠습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묵시 5,6) 본디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일곱은 충만함과 구원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뿔이 일곱이니까, 수난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으로 충만하신 분 곧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앎을 뜻하는 눈이 일곱 개라는 말은 앎으로 충만하신 분을 상징합니다. 종합하면 요한 묵시록 5장 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과 앎으로 충만하신 곧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고 계시하는 구절인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그리스도론)를 누가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힘과 앎으로 충만한 승리자로서의 어린양은 유다교 메시아상에 상응합니다. 유다교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을 성취하는, 곧 모든 악을 물리치는 궁극적 승리자로서의 모습을 담은 메시아상은 성서 어디에 나올까요? 다음 두 구절이 그 답을 줍니다.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그리스어로 구원의 뿔)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9)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일곱 뿔과 일곱 눈을 들어서 메시아가 누구신지를 그림을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입체적으로 그려주는 요한 묵시록 5장 6절 말씀은 4장부터 5장에 걸쳐 드러나는 ‘천상 예루살렘 예배’에 나옵니다. 천상 예루살렘 예배의 절정, 곧 예배 끝부분에서 하느님과 어린양께 대한 찬미 노래가 다음과 같이 울려 퍼집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묵시 5,13-14) 이 천상 예루살렘 예배 장면 안에 요한 묵시록의 핵심 신학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실 묵시록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혀주는 책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곧 수난당한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기다려오던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밝히기 위하여, 당시 통용되던 온갖 상징과 숫자 등을 동원해 보다 쉽고 입체적으로 그 신비를 묘사합니다. 기원후 97년경 묵시록 저술 당시에는 천사와 황제 숭배(신격화)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Gnosis)들은 육신은 경시하고 영적인 측면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순수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을 평가절상하는 반면, 우리 인간처럼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평가절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즈음에 묵시록 저자 요한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천사의 위치를 바로잡아 줍니다.(묵시 1,1 참조) 천사는 신이 아니라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고백합니다. “나(요한)는 …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너의 형제 예언자들과 … 같은 (하느님의) 종일 따름이다.’”(묵시 22,8-9 참조)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8면

[말씀의 우물]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 다들 아실 테죠. 유명한 이 비유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 여러 이름이 붙여집니다. 잃었던 양을 되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인(루카 15,6 참조),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부인(루카 15,9 참조)에 이어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쁨에 젖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루카 15,24 참조)의 비유가 나란히 나옵니다. 세 비유는 100분의 1(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 10분의 1(잃었던 은전 열 닢 중에 한 닢), 2분의 1(두 아들 중에 한 아들)로 긴박함이 급상승하며, 한결같이 우리 독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비유를 들려주시는 동기가 다음에 나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탕자의 귀환’을 통하여, 우리는 작은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회개한 동생을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아버지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인류 구원 의지를 봅니다. 회개한 친동생을 보고 ‘저 아들(그리스어 본문: 당신의 저 아들은)’이라 부르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친형에게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는’이라고 부르시면서 큰아들의 빗나간 자세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는 죄를 짓기 전에든 후에든 형과 아우, 곧 형제자매 관계는 전과 다름없이 또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200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초청 강연을 마치고, 이튿날 몇몇 자매님과 함께 부근에 있는 발달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오전 9시경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침 식사를 하던 이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낯선 우리를!’ … 천사들이 운영하는 천상 공동체에 들어선 느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 신부(Henri J. M. Nouwen, 1932~1996)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지내던 중, 자신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큰아들’이라면서 교수직을 접고 토론토의 이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분은 저서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A Story of Homecoming)」에서 말합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 가득한 축복을 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언제나 기다려주십니다. 실망 속에서도 두 팔을 내리지 않고, 언제나 당신 자녀들이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사랑 가득한 이야기를 건네시며 그들의 어깨 위에 당신의 팔을 올려 놓아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죄인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96페이지) 나우웬 신부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106페이지)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령의 열매는?

사도 바오로는 육의 행실(부도덕)을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갈라 5,19-20) 등 열다섯 가지나 나열합니다. 이어서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여기 나오는 부도덕(악덕)을 네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불륜, 더러움, 방탕 등은 우리의 사랑을 빗나가게 합니다. 둘째, 우상 숭배와 마술은 하느님 예배(경신례)를 빗나가게 합니다. 셋째, 분열과 분파 등은 사랑의 끈을 풀어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넷째,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 등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인간성을 타락시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사랑은 뒤따르는 여덟 가지 덕목의 으뜸 개념입니다. ‘육(肉)의 행실’을 나타내는 그리스말 본문은 본디 ‘육의 행실들(ta erga te-s sarkos)’로 복수로 쓰인 데 반해, 성령의 열매 ‘사랑(agape-)’은 단수로 쓰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다양하지만, 그 모든 열매는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짧게 설명해 주는 구절을 대라면 다음 둘을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24) 요한의 첫째 서간 저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한마디로 서술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요한의 첫째 서간 주해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 ‘신비의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한마디로 요한의 첫째 서간은 ‘사랑(agape-)’이시라고 서술해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라면 둘째가는 계명은 이웃 사랑입니다.(마르 12,29-31 참조)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쭈그러들 때는 소화력도 떨어지고 기쁨도 줄어들지만, 거꾸로 사랑이 충만해질 적에는 의욕도 생기고 기쁨도 솟아남을 느낍니다. 지난해 무더운 여름 7월과 8월을, 산골짜기 작은 농장에서 작물도 가꾸고 닭과 개 두 마리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1~2m씩 거리를 두던 닭들에게 3주 정도 지나면서, 기본 먹이 외에 씀바귀, 참비름, 상추 등 즐기는 것을 뜯어다 주었더니, 닭들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리로 손등이나 신발을 장난치듯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을 주면 식물도 동물도 친근해지고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보답하는구나.’ 아울러 시편 노래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 함께 시편으로 기도드리시겠습니까?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시편 85,11-13)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의 우물] 다니엘 안에 있는 거룩한 영

다니엘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본문까지 모두 세 가지 언어로 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다니엘서 1장부터 14장까지 전체가 다 쓰여서 최종 편집된 시기는 기원전 164년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의 그리스화 정책 아래 억압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할 무렵 부활 희망이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우리 개인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 명시적으로 나오는 구절은 다니엘서가 처음입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 12,2)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유다교 말살 정책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니엘이 그의 하느님께 기도와 간청을 올리는 것을 발견하였다.”(다니 6,12) 그 즉시 다니엘은 임금에게 고발당해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오히려 그를 악의로 고발한 이들이 사자 굴에 던져져 죽게 됩니다.(다니 6,15-29 참조) 그즈음 바빌론 어느 곳에 수산나라는 미모의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다니 13,1-64 참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다니 13,2-3) 그 무렵 유다 원로 둘이 부정한 마음을 품고서 수산나와 정을 통할 기회를 엿보다가, 수산나가 혼자 정원에서 목욕할 때를 알아채고, 다가가 불륜을 저지르려 합니다. 수산나가 거절하자, 원로들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수산나가 어떤 젊은이와 정을 통하려 했다고 오히려 수산나에게 자기들의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게 된 수산나는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다니 13,42-43) 주님께서는 수산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다니 13,45) 혜성처럼 등장한 다니엘, 성령의 인도를 받은 다니엘은 사형 집행을 멈추라고 소리 지릅니다.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다니 13,48) 다니엘은 타락한 두 원로 재판관을 갈라놓고서 ‘어떤 나무 아래에서 수산나가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따로따로 묻습니다. 한 원로는 ‘유향나무 아래’라고 대답하고, 다른 원로는 ‘떡갈나무 아래’라고 다른 대답을 하는 바람에 그들의 거짓이 들통납니다. 그 결과 수산나는 무죄로 풀려나고, 두 원로는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의롭게 살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주변을 정화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말씀의 우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독일어 christsein)’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독일어 christwerde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표현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본당 교적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된 우리는 모두 완성된 신자일까요? ‘신자인가? 비신자인가?’라는 물음, 곧 존재론적인 물음에는 ‘예, 신자입니다!’라고 마땅히 응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한 신자, 곧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참신자가 되어 ‘이제는 회개도 발전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신자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하고 응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존적 차원에서는 아직 더 배우고 더 회개하고 매일 조금씩 더 노력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보다 더 나은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 곧 나그네 살이 중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도록(christwerden) 힘껏 노력해야 할 터입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나의 성화뿐 아니라 이웃의 회개와 성화에도 기여하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뵙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 품 안에서 그분을 뵙고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지복직관이라 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하느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4) 이마에 이름을 적어 놓는다는 이야기는 “인장 반지를 새기듯, 그(아론, 훗날 대사제) 위에 ‘주님께 성별된 이’라고 새겨라”(탈출 28,36)라는 전통에서 유래하죠. 베드로의 첫째 서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멈춰있지 말고 성장하여 보다 나은 신앙인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의 첫째 서간 속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 곧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받으면 그때부터 온 힘을 다해 ‘참신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이제(오늘)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의 우물] 마르타의 선택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가 집으로 모십니다.(루카 10,38-42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분 말씀을 듣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 발치(발 앞)에 앉는다’는 말은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먹은 사람, 곧 그분 제자로서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루카 8,35) 마르타가 한마디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루카 10,41-42) 의문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곁에서 말씀 경청에 몰입하는 마리아의 몫만 좋다는 말일까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모시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르타의 몫은 별 가치가 없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선택이나 시중드는 일을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시중드는 일에만 몰두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선택한 일 즉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몫이니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잡아 주실 뿐이죠. 그날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시며 축복을 가득히 내려주고 떠나가셨을 겁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바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도, 그분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것도 다 그분 말씀을 듣고 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 말씀이 이미 강복이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당에서 구역이나 가정방문 때, 함께 나눌 대화나 필요한 성사와 미사 집전에보다는, 상대에게 무엇을 대접할까에 더욱 마음을 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마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말씀을 경청하고 나누며 그분과 하나 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참조) 바로 앞에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루카 10,25-28 참조)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가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믿음에 따른 행동이 강조됩니다. ‘행동주의(Activism)’라고 일컬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동 중심의 신앙생활도 결국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처럼 그분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경건주의(Pietism)’에서 꽃을 피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개화(開花)의 절정은 바로 미사성제 안에서 영원하신 분을 모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뤄지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들(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하늘나라’가 공간적 개념만 나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는 진정 ‘우리 마음 안에’ 또는 ‘마음속에만’ 들어 있을까요? 이 물음에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 마음에’ 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니라 ‘너희에게(고대 그리스어로 너희 위에 또는 너희 둘레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시간이나 장소적 의미만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주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움터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0-11) 마귀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이들이 해방되고 치유되어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활동 경과를 보고하자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마귀(사탄)의 시대는 사그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마태 10,1) 신약성경에서 ‘더러운 영’은 악마, 마귀, 악령 등과 맞바꾸어 놓을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악령 퇴치 권한뿐 아니라, 갖가지 병자와 허약한 이들에 대한 치유 권한까지도 부여받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 6,12-13)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마태 12,28) 대신에, 루카는 병행 구(句)에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루카 11,20)이라고 전해줍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기적들을 부정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 하느님의 위력을 체험한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탈출 8,15) 그와 같이 놀라운 기적들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바로 그분 손가락이, 곧 그분께서 친히 이루신 그분의 작품이라고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입니다.…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7-19)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경에서 찾는 불면·우울증의 치유

불면증과 우울증은 전문의를 찾아 상담과 진료로 치유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오늘은 성경에 뚜렷이 등장하는 경우를 통해 그 극복의 길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저지른 권력 남용 사례를 지난 주간에 들려드렸습니다.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부하 장수들이 잇따라 패배하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다는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1마카 6,11)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찾아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1마카 6,12) 안티오코스는 다시는 유다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절망에 이릅니다. 그는 친지들을 불러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1마카 6,10)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는 불면증 호소이며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는 우울증 호소입니다. 다른 원인에서 오는 불면증과 우울증에는 치료 방법이 따로 있겠지만, 전쟁광 안티오코스의 치료제는 ‘회개’뿐일 테죠. 그 회개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2001년 여름 전국 신학부 교수 모임 때, 통풍으로 양쪽 발이 퉁퉁 붓고 아파서, 거실에서 불과 70여m 떨어진 모임 장소조차 걸어가지를 못해 암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저는 2003년부터 십일조 정신으로 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도, 또 우울감이 짙어 올 때도 자꾸만 은혜로운 일을 떠올립니다. 안경을 개발한 분들, 신발을 만들어 준 분들, 농어민, 자동차나 옷을 만들어 주는 분들, 의료진, 도로 건설, 건축가, 그리고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는 분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고마운 분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면 이웃과 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부족했던 사랑과 배려에 죄송한 마음, 이제라도 아껴 주고 덮어 주고 감싸 주고 갚아드리고 싶은 마음도 차오릅니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축복을 빌어드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더군요. 이같이 은혜로운 마음이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 꿀잠도 자게 되고 행복한 마음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입니다. 희년의 기본 정신이 다음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참된 회개는 자기 책망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찾을 줄 아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설령 어둠 속을 걷고 있어도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지 묵상해 봅시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힘에 귀 기울이며 점점 익숙해져 봅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 갈 터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누카의 유래

고대 유다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임금을 대라면, 흔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를 꼽을 터입니다. 도대체 재위 12년 동안 안티오코스의 업적이 어땠길래 그럴까요? 업적이라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겠죠. 안티오코스는 세계화(그리스화) 정책을 펼쳤고, 모든 나라 곧 그가 지배한 주변 나라는 하나같이 그리스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야훼 하느님’ 신앙을 버리고 이교도들의 풍습과 종교까지 그대로 따르도록 강요당했죠. 그리스 잡신들을 공경해야 했던 겁니다. “임금(안티오코스)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안티오코스는 유다교 탄압에 열을 올리며, 특히 리시아스를 시켜 유다인 말살 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의 병력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을 없애버리고…”(1마카 3,35)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영토에 외국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땅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1마카 3,36) 그즈음에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인들의 용기를 북돋웁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고 몰살시키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고는, 서로 ‘우리 백성을 폐허에서 일으키고 우리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싸우자’ 하고 말하였다.”(1마카 3,42-43) 그때 유다 군중은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싸울 준비를 하며 주님께 기도 올립니다.(1마카 3,44 참조) 기도에 힘입어 전투는 유다의 대승으로 끝납니다.(1마카 4,28-35 참조) 이와 같이 유다 마카베오는 안티오코스의 오른팔 격인 리시아스 군대를 물리치고 나서, 안티오코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물리쳤으니 올라가서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이어 흠 없이 율법에 충실한 사제들로 하여금 성소를 정화하고 더럽혀진 돌들도 치워버리며 더럽혀진 제단까지도 헐어버립니다.(1마카 4,42-45 참조) 유다인들은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아침에 더럽혀진 성전을 새로 봉헌합니다.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1마카 4,53-54)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하던 그날은 에피파네스 임금이 성전 제단 위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2마카 6,2) 히브리어로 하누카(봉헌)라고 부르는 이 봉헌 축일은 요한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오늘날의 우리도 삶에서 우리의 믿음을 꺾어놓는 시련과 적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누카를 기억하며 의지를 다지면 좋겠습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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