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도 지쳐서 언젠가 가요

사람살이가 묘하다 싶어요. 지난가을에는 모든 일이 다 상승곡선을 탔어요. 매일 만 보씩 걸었고 아침저녁 출근길은 싱그러웠고 한동안 떨어졌던 집중력이 다시 회복되어 글도 쑥쑥 써졌어요. 골치 아픈 논문도 어째 뚝딱 썼고요. 아버지 드시던 약도 약효가 좋아서 염려했던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고요. “와, 우리 아부지 정말 대단하셔”, 마음으로는 호들갑에 가까운 감사가 무럭무럭 자랐고요. 겨울에 아버지께서 하늘나라 가시고는 모든 게 어려워졌어요. 처음엔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사람들 속에서 그럭저럭 장례식을 치른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걷는 일, 웃는 일, 잠자는 일까지 다 어려워졌어요. 엄마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요. 그러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에 금이 가면, 금 간 것을 생각하면, 계속 아파요. 그러니까 옛말에 ‘시간이 약이다’ 그러잖아요. 그 말 틀림없어요. 가장 좋은 용서는 잊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상처를 잊는 것도 좋지만 상처가 나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어요. 상처가 계속 나를 자극하고 괴롭힐 때가 있지만 상처도 지쳐서 언젠가 가요. 그것만 믿으면 돼요.” 음유 시인 같은 가수 김창완 님이 느린 말로 전해주는 메시지.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는 상처들, 그걸 다 끌어안고 살아가는 미욱한 우리. ‘상처도 미움도 다 지나게 마련’이라는 말을 들으며, ‘상처도’ 대신에 주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어도 보았어요. 슬픔도 지쳐서 언젠가 가겠지. 지쳐서 가는 것이 감정과 마음뿐이랴, 사람도 지쳐서 가고, 모든 것이 지쳐서 다 가겠지. 지쳐서 가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 사람, 일, 대상, 이 세상 만물에 다 연민이 생깁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듯이 자라며 이우는 것이 모두 세상의 이치겠지요. 다 때가 있겠지요. 그러니 슬픔도 너무 빨리 벗으려 하지 말고 천천히 갈무리해야겠지요. 사랑할 때, 미워할 때, 싸울 때, 화해할 때, 찾을 때, 잃을 때, 침묵할 때, 말할 때, 나설 때, 물러설 때, 간직할 때, 버릴 때, 아낄 때, 베풀 때, 안을 때, 내줄 때, 그때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알 수 있을까요? 알고자 하는 의지보다 고요히 기다리는 마음, 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용히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할까요? 떠나시던 아버지는 자신의 때를 아셨을까요? 작별의 순간을 알지 못하고 무심코 손을 흔드는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시간 속의 연약한 존재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의 작은 기쁨도 소중하게 보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도 잘 기다릴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상처도 지쳐서 간다면, 슬픔도 지쳐서 간다면, 그렇다면 그리움도 지쳐서 가겠지요? 기억을 잊는 망각이 두렵기도 한 저는 오늘도 기다림 안에서 ‘그때’를 생각합니다. ‘그때’는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제게 오는 것일 터이니, 다가오면 잘 받아들이게 해주십사 소망하면서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22면

마음 안에는 숫자가 없다

글을 쓰거나 이야기할 때, 형용사보다 명사를 더 많이 쓰면 똑똑하고 정확해 보입니다. 형용사보다 동사를 더 많이 쓰면 뭔가 추진력이 있어 보이고요.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숫자와 통계입니다. 대화 중에 숫자를 잘 활용하는 상대를 만나면 괜히 움츠러들지 않던가요? 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요. 그러니 논의나 토론에서 숫자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되지요. 어린 날부터 사람 이름이나 고유명사를 잘 잊어버리곤 하던 저는 선배들이 “은귀 넌 고유명사 치매가 있는 거 아니냐?” 놀리곤 했어요. 하지만 제가 강한 부분이 있으니, 저는 형용사는 남들보다 더 다채롭게 알고 잘 기억해요. 명사보다는 동사, 동사보다는 형용사. 형용사를 동원하면 대상을 더 세심하게 묘사할 수 있지요. 세상이 더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려면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숫자나 셈에는 약해서 업무상 필요한 보고를 할 때는 일부러 숫자를 달달 외워야 하는데, 돌아서면 금방 까먹어요. 형용사나 동사, 속담이나 문장은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데요. 모든 게 숫자로 매겨지고 통계로 재단되는 세상. 기술정보 시대의 풍경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는 오직 숫자, 숫자만이 유일한 승자 같아요. 눈이 빨개지도록 문서의 숫자를 들여다본 지친 오후에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런 구절을 읽었어요. “대상을 고요한 존재로 만드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마음 안에는 숫자가 없다. 언제나 하나, 그리고 하나, 그리고 하나일 뿐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분명 셈하는 법을 모를 것이다.”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글을 쓰는 프랑스의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세상의 빛」에서 만난 아름다운 구절! 아, 맞아요. 저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노릿하게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에 숫자가 없어요.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에도 숫자는 없네요. 이젠 볼 수 없는 그리운 아버지, 슬픔에 부쩍 수척해진 엄마, 내일 항암 주사를 맞으시는 삼촌, 먼 땅에서 억압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 굶주려 우는 아이, 죽음 직전까지 신성하고 맑은 마음으로 공무를 행한 어른. 이런 생각을 하는 이 순간의 기도에도, 이 마음에도 숫자는 없네요. 아, 맞아요. 하느님은 오직 하나이시고,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맑아질 때 그 안에는 숫자가 없네요. 숫자는 눈에 보이는 것, 눈앞에 증명되는 것.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은 믿을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 오늘, 숫자 없는 세상을 그려봅니다. ‘그게 천국이 아닐지’ 생각하며. 숫자에서 해방된 저녁, 하늘에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 있고, 제가 좋아하는 은행나무는 벌거벗은 채 의연합니다. 건물을 나서며 겨울 어둠 속 싸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저는 어쩐지 투명해집니다. 이 순간, 저는 알 수 없는 사랑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신은 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염없이 돕고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이 강퍅한 세상에 그런 성자들이 머물다 떠났겠지요. 때로 선(善)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그 빛을 만나 다른 빛을 다시 밝힙니다. 숫자를 잊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오늘의 구원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2면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어요. 겨울에 하는 기도는 어떤 말이어야 할까. 추운 이들이 춥지 않게, 외로운 이들이 외롭지 않게, 고통받는 이들이 아프지 않게, 슬퍼하는 이들이 슬프지 않게 해주십사 청하다가 생각을 바꾸어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울어야 할 즐거움, 기뻐해야 할 슬픔”(10권 28절)이 겨루고 있는 삶의 나날을 묵상하면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끝없는 시련 속에 놓이는 일’이라고 했는데요. 즐거움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울어야 할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슬픔이 나쁜 것은 아니어서 기뻐해야 할 슬픔도 있다는 깨달음은 아마 삶의 시련이 주는 지혜겠지요. 그러니 추위도, 외로움도, 아픔도, 슬픔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다른 은총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겨울날 저는 정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아버지를 여읜 큰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쓰신 시와 묵상들을 정리하고 있고요. 학교에서는 2년 동안 해 온 보직이 끝나는 시기라서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연구실에 앉아 책으로 빈틈없이 빼곡한 책장을 바라봅니다. 첫날은 벽에 붙은 수많은 그림과 사진들을 떼어냈고, 둘째 날은 버려야 할 서류들을 솎아 냈습니다. 사무실 컴퓨터를 정리하며 많은 파일을 지웠고, 연구실 컴퓨터를 새로 포맷했고요. 청소와 정리가 이처럼 유쾌한 일이었나 생각하며 빠른 속도로, 후련하게, 버려야 할 것들에 집중합니다. 버리는 일에 늘 좀 주저했기에 쌓아두는 게 많았는데, ‘버리고 정리하고 매듭을 짓는 이 겨울은 또 다른 선물이구나, 하느님은 때맞춰 많은 것들을 예비해 주시는구나’ 싶습니다. 마침 들고 있는 시집 「그 나라 하늘빛」에서 마종기 시인이 청하는 겨울 기도를 마주합니다. 겨울날,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를 듣게 해 달라는 말,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시인이 말할 때 그 편안함은 따뜻하고 여유롭고 풍족하게 채워지는 데서 오는 편안함이 아니라, 비우고 벗고 가난해짐으로써 가능한 편안함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벌판에서 혼자 떨고 있는 나무를 보고서도 괜찮다고 합니다. 시인에게 기도는 슬픔 속의 노래입니다. ‘내가 눈물을 닦으면 / 당신은 웃고 있다’고 할 때, 시인은 인간의 눈물에서 기쁨을 여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일은 우리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징표일 것이니, 슬픔 속의 노래는 그런 공감과 연민과 연대입니다. 이 겨울에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우고 내려놓는 일이 결국에는 다른 열림을 가능하게 함을 아는 시인의 예지 덕분이겠지요? 늘 그렇듯 바삐 움직인 하루 끝에서 저는 이 말 한마디에 그만 “아멘” 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어디 계시나요? 목메어 매달리는 애통한 기도도, 간절한 애원도, 이 말 한마디에 수굿해집니다. 편안한 하느님의 너른 품 안에서 산 자도 죽은 자도 다 함께 착한 얼굴 나직이 마주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22면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선생님, 희망을 이야기하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해요? 선생님 글은 가끔 너무 착해서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욕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이 질문을 학생이 했을 때, 저는 좀 뜨끔했습니다. 학생이 정말로 하고픈 말은 조금 달랐을 것 같아요. 절망보다 희망을, 슬픔보다 기쁨을, 비판보다 격려를,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견지하는 태도가 젊은이들에겐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감수성이 면도날처럼 예리한 학생들은 가끔 날 것의 절규를 내지르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솔직한 소감을 말해주는 학생이 그래서 저는 고마웠습니다. 제가 말했어요. “글이나 말은 어느 정도 상대적이어서 듣는 이를 생각해야 하거든. 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시간의 시험을 거치며 남는 글은 좀 다르게 쓰고 싶어. 그리고 착함은 얼핏 힘없어 보여도 결국에는 이기는 굳센 힘이 돼.” 그 이후 저는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에 대해 더 곰곰 오래 머물러 생각하곤 합니다. 눈물보다는 웃음, 절망보다는 희망, 죽음보다는 삶, 더 바람직하다고들 말하는 삶의 태도들이 정말로 늘 답인가 질문하면서요. 큰 슬픔을 지나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삶다워질 수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눈물이 있기에 웃음이 있고,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다고. 그래서 가늠할 길 없는 슬픔에 더 보탤 말이 없으니 다만 기도한다는 말씀이나, 슬플 때는 빨리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충분히 슬퍼하라는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상실을 극복하려는 마음도 버리라고, 아버지를 여의는 일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당면해야 하는 슬픔이기에 그를 부정할 수 없다고, 본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에 앞서 그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저보다 먼저 겪은 경험을 통해 건네주시는 위로의 말들 속에서 저 또한 깊이도 너비도 모를 이 별리의 터널을 잘 지나고 있습니다. 폴 엘뤼아르의 시 <그리고 미소를>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슬픔을 나누는 일은 곡진한 감정의 골을 함께 지나는 일, 그래서 슬픔의 끝을 맞잡은 이들은 결국 열린 창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 슬픔의 끝은 그러므로 다른 세계,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열림으로 이어진다는 것, 열린 그 창에 불이 하나씩 켜질 때 우리는 더 깊은 연대와 공감을 나누는 존재들이 된다는 이야기. “선생님, 저는 아직 그 슬픔을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나야 하는 마지막 시험인 이상, 그 시험을 몸소 지나는 일도 그걸 지켜보는 일도 쉽지 않음을 희미하게 알 것 같아요. 그러니 더 힘들어하시고 슬퍼하셔도 됩니다.” 어린 학생이 건네는 조심스러운 위로를 통해서도 슬픔이 열어주는 불 켜진 창을 마주하네요. 그렇게 저는 또다시 말에 기대어 함께 나누는 삶 안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그런 힘으로 이 혹독한 시간을 지나오셨겠지요. 연약한 인간은 이로써 더 단단해지고, 관대하고 너른 인간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게 삶이겠지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2면

뭐가 중요한데?

오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작은 체구에서 어떤 힘이 나오는지, 또렷또렷, 빠릿빠릿, 당찬 오뚝이 같습니다. 오랜 시간 간호사로 일하며 환자들을 돌봐온 친구는 지금 어느 큰 병원의 연구 간호사로 있으면서 췌장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만난 환자들이 그동안 몇 명이나 될지 가늠해 보기도 어려운데, 환자들에게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제 친구지만 경이롭다 싶습니다. 병원에서 간호사의 역할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많지요. 제게 이 친구는 건강에 관한 한 최고의 조언자로서 적극적인 태도를 항상 강조합니다. 생각이 많아서 머뭇거리는 제게 빠른 실행을 강조하는 친구를 보면,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이 오가는 사선(死線)에서 열렬히 싸워온 어떤 전사(戰士)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전사는 그러나 모든 일이 심각하지만은 않습니다. 저녁에는 취미로 춤을 추고 여름에는 주말농장을 일구며 일과 휴식의 균형을 잘 맞춰 나가는데요. 이 친구가 제게 자주 하는 말이 “머가 중요해?”입니다. ‘대체 뭐가 중요한데?’라는 질문을 할 때 친구는 주저하고 망설이는 제게 큰 도움 되는 삶의 자세를 알려줍니다. 본질만 보라고, 그러면 간명하게 간추릴 수 있다고. 군더더기는 빼고 핵심만 생각해 보라고. 의료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친구가 언젠가 종로 거리를 걸으며 무심코 던진 이 말. “내 말 아니고, 영화 대사야.” 친구는 웃어넘기지만 제게 이 말은 그때 그 시간 저를 살린 말로, 생각에서 행동으로 건너가는 시간차를 줄여준 효과 만점의 단방약(單方藥)이었지요. 고민되는 문제가 있으면 이 말을 떠올리며 가끔 심호흡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복잡한 일이 간추려지고 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코헬렛의 이 구절이 생각납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코헬 12,12-13) 늘 분주하게 이것저것 재고 고민하는 우리. 하지만 그토록 복잡하게 늘어놓은 우리의 목록들이 실은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니 ‘뭐가 제일 중요한데?!’를 생각하면,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 평생, 삶의 기준점으로 삼는 가치가 또렷해집니다. 친구는 ‘머가 중요해?’에 이어서 “아니면 말고” 툭 덧붙입니다. “이것도 영화대사야, 호호.” 하면서. ‘아니면 말고’는 무책임하고 손쉬운 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삶에서 본질과 핵심만 남기고 생각하되 사람이기에 하기 마련인 실수가 있어도 움츠러들지 말라는 것, 시행착오를 겁내지 말라는 것. 그리 생각하니 더 큰 용기가 생깁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네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핵심으로 삶의 방향을 세우면 된다고. 그러면 일의 우선순위가 잡힌다고. 새로운 날, 또 어떤 생각도 못 한 일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무섭지 않다고, 차근차근 걷겠다고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2면

나는 내 몫을, 너는 네 몫을

새벽에 샛별을 보았습니다. 엄마랑 나란히 누운 침대에서 마주 보이는 커다란 통창 너머로 까맣게 시린 겨울 밤하늘이 펼쳐져 있는데 거기 별 하나가 깜박입니다.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엄마는 남편을 여읜 아내 1일 차로, 저는 아버지를 여읜 딸 1일 차로, 둘은 그 별을 함께 바라봅니다. 엄마가 제게 물으십니다. “은귀야 저 별은 무슨 별일까? 내가 여기서 여러 날 자도 저 별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엄마, 아마 샛별 같지요? 새벽에 뜨니까 엄마 주무시느라 못 보셨을 수도 있는데, 오늘 신기하네요. 우리 둘이서 저 별을 보다니. 꼭 아버지가 우리한테 힘내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요.” 준비되지 않은 작별을 갑자기 해야 할 때,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떠나는 사람은 떠날 준비가 안 되었고, 남는 사람은 보낼 준비가 안 되었는데, 죽음은 그런 상황을 일일이 헤아리지 않고 선명한 마침표를 찍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리움에 아파 울지만, 떠나는 이의 심정을 생각하면 다른 답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 낯설고 아득한 새벽, 아버지는 정말로 별이 되어 오신 것 같습니다. 저에겐 ‘울지마라, 이 별처럼 내가 깜박깜박 신호를 보낼 터이니 아버지 없다 생각하지 말고 힘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60년을 함께 산 엄마에겐 ‘여보, 내가 없어도 무서워하지 말고 아이들 효도 받으며 잘 지내다 천천히 와.’ 이런 전언(傳言)을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엄마가 나직이 말씀하십니다. “은귀야. 잘 들어라. 너무 슬퍼 마라. 나는 여기서 내 몫을 하면 되고, 너는 서울 가서 네 생활을 하면서 너의 몫을 하면 된다. 아버지 병원에서 고통 길게 겪지 않고 가신 것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애통해하지 마라. 내 걱정도 하지 말고.” 갑작스레 닥친 이별의 황망을 잘 견디며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선산에 잘 모셨습니다. 마침 겨울비도 촉촉하게 내렸고요. 돌아오니 곧바로 아기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성탄절이었고 뒤이어 스테파노 축일이었지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마태오복음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받는 미움과 고통을 끝까지 견딜 때 이르는 구원을 뜻하는데, 저는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에 맞닥뜨린 고통과 견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 의지와 지혜를 키워 어른이 된 어떤 목숨 하나. 그 끝에 이르러 마주한 고통은 온전히 견딤의 시간이었겠지요. 회복을 바라는 가족들의 염원과 달리 아버지는 하늘의 부르심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몫으로 견디셨다는 것. 그러니 남은 가족들은 각자의 몫으로 견뎌야 한다는 것.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의 몫을 이어 갑니다. 엄마는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밥은 먹었나. 학교에 가나. 그래. 그러면 된다. 추운데 따습게 입고. 내 걱정은 마라.” 저는 이렇게 또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감사히 살아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견디면 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2면

아부지 앞에서 실컷 울어라

‘최근에 울어본 적 있어요?’ 얼마 전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물었지요. ‘주말에 전시회 같은 데 가서 혼자 눈물 좀 흘려보세요.’ 좀 재미있는 처방을 받고 나오며 눈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는 눈물이 많은 편인데, 사람들 앞에서는 잘 울지 않으려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교적 교육 때문일까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감정 표현을 절제하셨어요. 예뻐도 예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최고의 칭찬은 ‘수고했다’가 전부. 박사 논문이 통과된 후 미국에서 전화를 드렸을 때도 ‘수고했다’고 하셨는데, 전화를 끊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걸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들었지요. 어릴 때 제가 울면 아버지는 ‘울지 말라’고 야단을 치셨고요. 그 말씀에 눈물은 뚝 그쳤지만 서운함은 마음에 고였지요. 엄격한 아버지와 저 사이에 고여 있던 감정의 강이 기적처럼 풀린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는데 그날은 허허 웃으시더니, ‘울어라, 실컷 울어라. 아부지 앞에서 실컷 울고 가라’ 하시는 거예요. 그날 제가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의 그 말씀에 오래 고여 있던 서운함이 확 풀렸던 기억은 선명해요. 그 효과를 경험한 뒤로 가끔 써먹곤 합니다. 진로상담을 하러 온 학생이 앉자마자 울면, ‘울어라.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 앞에서 실컷 울고 가라’고 말해줍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그 학생은 지금 씩씩한 공무원이 되어 잘 살고 있는데, 그 말이 참 고마웠다고 합니다. 다부진 직원 선생님이 어떤 일로 눈물 글썽여도, ‘실컷 울다 가라’고 합니다. 울음이 뭘까요. 울음은 터져 나오는 거지요. 고여 있다가 터져 나오는 것이 슬픔이든 서러움이든, 누군가 운다면 실컷 울게 하는 게 맞지 싶어요. 가짜 눈물도 있지만요. 매일 수많은 일 사이에서 오해, 불의, 불합리와 씨름하는 우리는 어쩌면 저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일 텐데, 그러니 너무 힘들면 울어도 된다고요. 특히 아버지 앞에서는 실컷 울어도 된다고요. 이 글을 쓰는 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었어요. 지병이 있으셨으나 건강하셨던 아버지. 가벼운 감기를 앓으셨는데 갑자기 3일 만에 이 세상에서 거두어졌어요. 왜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로 부르시는지,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봅니다. 생은 찰나라는 것, 어느 때고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두 말씀으로 알아듣고 그리움을 간추립니다. 힘들 때 생각하곤 합니다. 내 눈물 아는 이가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아버지가 아셨던 눈물은 하느님 아버지도 아시겠지요. 장례식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샛별을 보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나는 내 몫을 살고, 너는 네 몫을 살면 된다. 그러자꾸나.” 돌아와 다시 말에 기대어 봅니다.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시편 56,9) 인간의 눈물과 함께 당신의 책을 쓰신 하느님. 울고 싶다면 울어도 된다고, 아버지 앞에서 실컷 울어도 된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한 걸음 또 내딛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2면

언제나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아침에 하늘을 보며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을 되뇝니다. 오늘 하늘은 연한 하늘색이고 제가 걷는 길에는 내와 숲이 없습니다. 다만 가파른 고갯길과 지하철역을 지납니다. 광화문 사거리를 건너서 지하철로, 동대문을 지나서 학교로. 시 구절을 살짝 바꾸어 봅니다. 매일 지나는 길을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로움을 불어넣는 힘, 시의 마음이 영성의 지혜를 담고 있다 싶어 오래전 시인에게 새삼 고맙습니다. 영성이란 무엇일까, 매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매일 새로움을 찾아 기쁘게 힘을 얻고자 하는 시인의 시가 영성에 닿아 있다 싶어요. 그러고 보니 가파른 길을 안전하게 운전해 주시는 마을버스 기사님도 고맙고, 복잡한 지하철 1호선의 사람들도 정답게 느껴집니다. 바쁘게 내리며 제 어깨를 치고 나간 키 큰 남자가 밉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시의 언어가 전해주는 영성의 힘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말을 생각합니다. 문학 연구자로서 시의 말을 고민하고, 번역가로서는 영어에서 한국어로, 한국어에서 영어로 적절히 잘 옮길 단어들을 매만지다 보면, 늘 말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러니만큼 말의 힘을 조금 더 예민하게 감지하게 됩니다. 이 강퍅한 세상에서 말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이왕이면 세상의 소금 같은 귀한 말을 더 널리 퍼뜨리기를 바라며 매일 말을 고르고 말 안에서 울고 웃습니다. 좋은 말이 나태한 마음속에서 오염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가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좋은 말이 나쁜 말로 바뀌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이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힘들고 지치면 하늘을 올려다보고 겨울나무를 무연히 바라보기도 하지만, 숨구멍이 될 말을 찾고 희망이 되는 말씀에 기대어 볼 때 든든해집니다. 그러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견딜 만하게 바뀌기도 해서, 좋은 말은 그대로 숨구멍이 됩니다. 이 지면에서 여러분과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나누고자 생각하니, 새롭게 시작된 2026년이 두근두근 더 기대됩니다.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은 새로운 길 …’ 시인은 그 길에서 민들레와 까치를 만났는데, 우리는 누구를 만나게 될까요. 저는 오늘 아침 노란 외투를 입고 아장아장 첫걸음 걷는 아가를 만났습니다. 동글동글한 목소리의 아가는 아빠가 잡아주려는 손을 마다하고 혼자 걷겠다고 떼를 씁니다. 나 혼자 할래, 자아가 생긴 아가는 앞으로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손을 잡을까요? 그 아가가 자라날 세상엔 어떤 꽃이 피어날까요? 하느님 만드신 이 세상이 더 고운 사람들 속에 이어지길 기도하며 지하철에서 내립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싸한 겨울 공기를 들이쉬며 나를 살리는 말 한마디로 부드럽게 새 마음을 채우니 오래된 낡은 길도 새롭게 보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영문학자, 영미시 번역가. 우리 시를 영어로, 영미 시를 우리말로 옮겨 알리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시가 전하는 사유를 나누기 위해 매일 읽고 쓴다. 산문집 「바람이 부는 시간」, 「딸기 따러 가자」,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 「홀로 함께」 등과 다수 번역 시집을 출간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