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딱 한 시간만

모처럼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여름처럼 달아오른 햇살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어요. 너무 더우니 나가지 말까? 책상 앞에서 밀린 일들을 바지런히 해치웠지만 아직 일은 밀려 있고요.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을 마치려면 그냥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새 신발을 신고 있네요. 약속을 잘 어기지 못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몸이 먼저 나서길 원하는 것 같아요. 출발하면서 제가 무심코 말했어요. “우리 딱 한 시간만 스마트폰 끄고 걷자.” 친구도 흔쾌히 좋다고 하네요. 여름 산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어요. 습도가 높을 줄 알았는데, 숲 그늘 속 대기가 적당히 촉촉해서 큰 숨을 쉬었지요. 둘 다 지독한 독감에서 겨우 해방된 터라 말도 줄이고, 스마트폰도 주머니에 넣고 그냥 뚜벅뚜벅 걷기만 한 그 시간, 우리는 무엇을 보고 나누었던가요. 오후 햇살 속에서 싱그러운 초록으로 짙어진 여름 숲을 거니는 일이 그대로 큰 은총이었어요. 익숙한 길이니 지도를 볼 필요도 없었고, 풍경 사진을 찍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걸어온 길. “집 뒤에 이런 산이 있는 건 너무 좋아.” “그러게.” “아무 한 것도 없이 공짜로 이런 축복을 누리네.” “네가 왜 한 게 없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너는 지구에 공헌하는 게 많아.” “아니야. 닥치니까 부지런히 하는 일들이 많은데 때론 무슨 의미인지 모를 때가 많아.” “그래 맞아. 나도 그런 느낌 들 때가 많아. 뭐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어.” 40년 넘은 세월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지내는 사이란! 새롭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민을 너무 잘 아는 우리. 우리는 딱히 특별한 이야기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걷고 헤어졌어요. 저는 일이 많았고, 친구는 들어가서 저녁을 해야 하니까요. 사고로 엄마가 다치셔서 간병을 도맡은 친구는 노년의 육체를 바라보는 슬픔과 그럼에도 하루하루 인내 속에서 많이 배우는 이야기를 했고, 지난겨울 아버지를 떠나보낸 저는 상실로만 생각되던 그 이별이 상실도 이별도 아님을 이야기했고요. “우리 딱 한 시간만” 하고 나선 그 길에서 우리는 평소의 한 시간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치유와 위로의 선물을 받았네요. 친구가 그러네요. 자기도 나올까 말까 고민했다고. 그런데 “우리 딱 한 시간만”이 자기를 구했다고. 요즘 번아웃으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도 이 신비를 말해주겠다고요. 얼마 전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칠은으로 ‘공경’을 뽑은 친구와 ‘슬기’를 뽑은 저.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나눕니다. “부모님 모시랴 봉사하랴 넌 공경이 생활인데 또 공경을 뽑았어? 내 것 가져.” “너는 늘 공부하고 읽고 듣고 지혜를 쓰고 나누는데 또 슬기야? 내 것 할래? 근데 이것도 은근히 어렵다.” 앞으로도 지칠 때면 주저하지 말고, ‘우리 딱 한 시간만’ 아니, 같이 만나지 못해도 ‘나 딱 한 시간만’ 이 빈 시간을 주자고 약속하며 돌아온 저녁. 이 글은 그 시간의 선물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2면

신중하게 고르는 말의 힘

얼마 전 레오 14세 교황께서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발표하시면서 “인공지능(AI)은 무장해제”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뒤이어 “좀 센 단어 같지만 신중하게 골랐다(deliberately chosen)”는 말씀을 덧붙이시면서요. AI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자본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이용되는 문제를 짚으며, 교황께서는 기술 권력이 주도권을 잡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다음 세대의 교육에 있어 공동선을 위한 인류의 과제를 앞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AI에 거부할 수 없이 모두가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시절에,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어요. 이번 학기 강의를 하면서 저는 생성형 AI가 학생들의 교육 환경 격차를 더 심화시킨다는 걸 절감했어요. 어떤 학생은 유료 AI를 여럿 맞춤으로 구매해 쓰면서 과제를 하고, 어떤 학생은 그런 도움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끙끙대며 과제를 하네요. AI 시대 학생들의 인지력과 절제력, 판단력을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텍스트를 잘 읽는 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생각할 시간도 없이 던져주는 AI의 화려한 답은 편리하긴 해도 막상 배움에는 큰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아요. 답을 고민하는 시간에 배움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저는 텍스트를 읽을 때 자신과 텍스트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고, 다른 이의 해석과 AI의 섣부른 개입, 편리한 줄거리 해석에 의존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손쉽게 답을 주는 AI의 유혹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수업 중에 질문을 많이 던지고 글을 쓸 때도 자기 경험 안에 목소리를 녹여 내는 걸 강조했어요. 교실에는 문화자본, 교육자본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함께 앉아 있어요. 이번 학기에 전시회를 보고 글을 쓰는 과제를 내줬는데 전시회를 처음 가봐서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이 있고, 전시회 다니는 게 취미라서 용돈을 거기 다 쓴다는 학생이 있네요. 교육의 장에서라도 이러한 문화자본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게 바람직한데, AI 광풍이 그 격차를 늘이는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강의 마지막에 교황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 때 의도적으로 세심하게 단어를 선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 보았어요. 화려한 말 잔치가 쉽게 사람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고요. 우리가 길러야 할 지혜로운 식별력은 오랜 훈련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그 훈련에는 더듬어 숙고하고 이 세계와 나의 관계를 찬찬히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는 눈이 필요하다고, 인간됨의 의미라든가 이 세계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책무 같은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요. 이런 것들은 긴 호흡으로 보고 읽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요. “이번 학기 저는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찬찬히,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삶이 중요하단 걸 배웠어요. 글도 그렇게 신중하게 써야 한다고요.” 한 학생의 메시지를 선물로 받으며 또 작은 시간의 매듭을 묶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2면

그대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학생이 와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열정적인 학생은 고민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어떤 일에 크게 분노하는 학생을 마주하며 생각했어요. “너는 이 에너지로 뭐든 하겠구나. 다행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 기준이 있으니 남에게 나약하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분노를 공부로 가뿐하게 태우자고 이야기하니, 아이는 웃습니다. 학생들은 교수와 학교에 큰 기대를 겁니다. 신자들이 신부님이나 수녀님께 큰 기대를 걸듯이. 아이가 부모에게 기대하듯이. “봐, 여기 학교가 있지? 학교는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야.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만. 학교도 그냥 세상이야. 세상에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많잖아. 더 배웠다고 더 좋은 인격을 갖추는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알지? 높은 자리에 있다고 더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무던하니 잘 돌아갈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게 세상의 매력 아닐까?” “저는요. 적어도 디그니티(dignity)는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맞아, 네 분노는 네 자존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면역세포야. 잘 작동하고 있네. 우리가 공부하는 게 존엄을 지키려고 하는 거잖아. 부당한 일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아주 잘하고 있네. 네 분노는 정당하니 겁낼 필요 없어. 내게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며칠 잠을 설쳤다는 학생 얼굴이 밝아집니다. 그 분노가 옳다고 믿지만 거기 너무 에너지를 뺏기길 원치 않기에 다시 당부합니다. “그러니 너는 네 공부를 하면 돼. 미리 결과를 예측해서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이 구절을 만납니다. ‘그대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그다음에 무슨 말이 올까요? 네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뭐 이런 이야기 말고요. “그대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하느님은 당신 일을 하신다.” 13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씀입니다. 열다섯 나이에 도미니코회에 가입하고 활동하다가 파리로 가 프란치스코회와 논쟁을 통해 명성을 얻었지만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분.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오늘 읽은 책 속에서 만난 구절은 그대로 제게도 힘이 됩니다. ‘그대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하느님은 당신 일을 하신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순수와 불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일희일비하며 애태울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성마른 조급함으로 휘둘릴 필요도 없고요. 그 믿음은 나를 온전히 비우게 하고 그 비움은 곧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바탕이 됩니다. “이 과정이 모두 공부라 생각하고 묵묵히 걷다 보면 어제의 분노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날이 와. 알았지?” 단순한 믿음은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그 단순한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 하루도 잘 건넜습니다. 다 감사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22면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는 학생이 논문을 들고 학교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겠다고 하네요. 자주 신실한 기도를 전하는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이 하는 ‘말’이 늘 두렵다고 하네요. 성경은 ‘하느님 앞에 인간의 눈물로 쓰인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는, 신앙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친구가 이런 말을 할 때, 저는 동시에 글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했어요. 말도 글도 다 밖으로 나오는 것. 타인에게 전해지는 것. 타인의 귀와 눈에 들어가는 것. 금방 휘발되기도 하지만 가시처럼 박히기도 하는 것.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소명 앞에서 두려움을 고백하는 청년이 너무 해맑고 기특해서 제가 무슨 말을 했던가요. “나도 그래. 나도 늘 두려워.” 우리는 잠시 말을 잊었어요. 그런데 또 거기서 멈출 수는 없지요. 천천히 말을 이어갔어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컴퓨터의 흰 화면, 노트의 빈 공백, 늘 겁이 나. 그런데, 또 그럴 때마다 생각해. 두려우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정직하게 일단 쓰라고 늘 내게 당부해. 그러니 너도 두려움 속에서 정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정직함은 곧 신실함에서 나오니 기도가 두려움을 가시게 할 거야.” 이 칼럼을 쓰면서 자주 제자의 고백을 떠올립니다. 나는 지금 신실한 글을 쓰고 있는지. 좋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소망이 혹 주제넘은 욕심은 아닌지. 그러다 또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제게 힘을 주는 치유의 경험도 합니다. 이번에도 그랬어요. 감기로 3주 정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무척 고생했는데, 그 와중에 수업을 간신히 이어가고 성경 말씀을 읽고 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글을 읽었습니다. 좀 힘에 부친다고 생각하던 중에 어느 강의에 초대해 주신 신부님께서 “몸이 회복되는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란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 마음과 몸의 속도가 다를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다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건넨 한마디,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란 물음이 생각났어요. 벳자타 연못가에 누워 있던 이들,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 가운데 그토록 오래 앓은 이가 힘이 없어 연못에 못 내려간다고 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그는 곧 건강해져서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고 하지요. 말이나 글이 가시가 되기도 하지만 진심 어린 염원을 담은 말은 곧 그대로 전해져 누군가에게 새 힘을 주고 또 자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고향으로 간 제자는 믿음의 말씀을 전하고자 간곡한 기도를 청하면서 제게도 가끔 소식을 전해옵니다. 긴 감기를 떨치고 일어나면서 오늘도 들것을 들고 잘 걸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요즘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한 분들께 마음으로 안부를 전하면서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2면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

“언제 시를 읽어요?” 누가 묻습니다. “네, 늘 읽지요. 밥하다가도 읽고, 게을러질 때도 읽고요. 생각이 막힐 때, 답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더 읽어요. 시는 오래 곰곰 생각해야 하는 언어라서, 제 사유와 상상력의 한계를 늘 시험하는 언어라서, 인내심이 필요한 물음표를 마주하고 풀어가는 시간에 슬며시 답이 주어지니까요.” 시는 영성이 깃든 철학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실제로 시인은 철학자에게 중요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철학자의 말이 시인의 말과 통하는 접점도 많습니다. 지난해 내내 몰두했던 번역 시집이 얼마 전 「DMZ 콜로니」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요. 여기서도 시인은 철학자의 말을 화두로 인용합니다. 시인 최돈미가 프랑스의 사상가 루이 알튀세르에게 기댄 것은 ‘호명(呼名)’, 즉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 관한 질문. 개인은 호명에 응답하면서 주체가 되는데, 알튀세르는 그 주체적인 이름이 동시에 사회적 구조에 종속된다는 걸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시집에서 시인은 공적인 역사가 묻어버리고 싶은 상흔을 발굴하여 실험적인 형식으로 보여주는데요. 이를테면 과거 통치자의 계엄령으로 인한 무고한 이들의 희생, 양민 학살이라든가, 고아라든가,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등, 전쟁과 가난과 억압으로 얼룩졌던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집을 번역하면서 저는 또 뭐든 파고드는 버릇대로 시인이 호출한 철학가의 책을 다시 읽었지요. 알튀세르는 현대철학의 한 산맥을 이룬 철학가지만,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았던 사람. 급기야 정신착란으로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사건 끝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지요. 하지만 그가 남긴 자서전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폴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지금 예순일곱 살이다. 그러나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이런 통찰을 할 수 있다니. 이 계절에 그의 말을 곱씹어 봅니다. 빛의 선물은 존재의 충만함을 오롯이 느끼게 하고 그 어떤 슬픔도 다 잊게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말을 남긴 철학가는 가정이나 학교, 국가, 교회 등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제도가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했는데요. 저는 이 말을 통해 알튀세르에게 본인도 잘 몰랐을 하느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해요. 매 순간의 빛을 선물로 느끼는 힘은 신성 외에 다른 걸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참담한 비극을 통과한 연약한 철학자가 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무구(無垢)한 영성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오월 하루하루, 누구나 이 빛의 축복을 매 순간 놓치지 말고 받으시길 소망해 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22면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야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 / 햇빛 뒤에 그늘이 있는 건 사랑스러운 모습이야 밝은 미소를 짓지 않아도 사랑할 이유가 많단다.” ‘악뮤’라고 부르는 악동뮤지션의 새 노래를 요즘 즐겨 듣습니다. 아픈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는 것 같은 노래예요. 처음 이 칼럼 제안을 받았을 때 ‘나의 기쁨과 슬픔’으로 칼럼 제목을 삼으려 했는데 그때 생각했던 마음이 이 노래에 오롯이 담겨 있어 신기하기도 합니다. 서로 알지 못해도 마음은 이렇게 저절로 연결이 된다고요. 새로 나온 앨범의 노래들은 악뮤의 오빠 찬혁이가 우울증과 여러 이유로 힘겨워하던 동생 수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만든 것인데요. 찬혁은 이에 대해 “동생을 잘 프로듀싱해주고 싶었다”고 표현을 하네요. 얼마나 예쁜 말인지요. 노래처럼 동생을 잘 가꾸어주고 싶은 마음. 수현은 오빠가 입대한 후 책임감과 부담감에 짓눌려 커튼을 친 어두운 집에서 혼자 지냈다지요. 폭식에서 위로를 찾는 바람에 몸이 급격히 불기도 했고요. 그런 동생에게 오빠가 손을 내밀어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어 준 것인데, 담담하게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힘은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오빠의 사랑에 동생도 용기를 내어 응답을 한 것이고, 둘은 다시 무대에서 예쁜 노래를 부릅니다. 찬혁은 말합니다. 슬픔 다음에 기쁨에 대해서는 대개들 좋다고 생각하지만 기쁨 다음에 슬픔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기쁨 다음에 슬픔까지가 하나라고요. ‘나의 기쁨과 슬픔’을 칼럼 예비 제목으로 처음 떠올렸을 때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샴쌍둥이처럼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슬픔을 대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쫓아내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아픔도 마찬가지고요. 기뻤던 만큼 슬프고 슬펐던 만큼 기쁘다고요. 사랑한 만큼 아프고 아팠던 만큼 사랑하는 거라고요. 그러니 슬픔이나 아픔을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는 일은 우리가 예쁜 돌로 단단해지는 과정이지 싶습니다. 4월에서 5월, 초록이 짙어집니다. 어제는 독감으로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눈부시고 신록이 너무 예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주여!” 했답니다. 어지럽고 아찔한 날이었기에 그 부름은 기쁨이면서도 탄식이었어요. 마태오복음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고 했는데, 하느님을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느껴질 때가 많아서 요즘 자주 질문을 하곤 합니다. 제가 맞나요? 주님? 그래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으며 천사처럼 고운 노래를 불러주는 이들이 있어 오늘도 행복합니다. 오늘도 힘을 냅니다. 기쁨 뒤의 슬픔을 겁내지 말라고,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슬픔도 축복이라고. 나를 나로 살게 하는 힘은 그 모두를 다 품어주는 데서 오는 거라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매일 새로운 길 위에서 품어줄 것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기도를 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2면

영원이 아니라서

영문학 중에서도 현대 미국 시를 전공해서 주로 시를 가르치고 연구하지만, 그 중심에는 시의 언어를 일반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소명이 있습니다. 시는 정갈한 지혜의 샘이라 그걸 나누고 싶거든요. 한국 시를 영어로, 영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저는 매일 무언가를 옮기는 사람이 됩니다. 고민을 거듭하다 마침표를 찍으면 마음이 시원섭섭. 그때그때 좀 다르지만 대개 시원 80%, 섭섭 20%쯤 되는데 이번에는 워낙 오래 붙잡고 있던 시집이라 시원 95% 섭섭 5%쯤 되는 것 같아요. 초고는 여러 해 전에 끝냈지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마침내 끝. 곧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시집 제목이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라 오늘은 영원과 영원 아닌 것에 대해 생각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 무엇이 있을까요? 떠오르는 것들이 많은가요? 영원이 아니라서 좋은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하는 전쟁도 영원이 아니라서 좋고, 지금의 통증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을 알기에 견딥니다. 알기에 견딘다는 것보다는 믿기에 견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이 영원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요. 지독한 그리움이 영원이 아니라서 얼마나 고마운가요?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는 길목에서 짧게 빛났다가 스르르 무게 없이 낙하하는 꽃잎의 찰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을 상상하는 일은 지금 막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저 허공에 번지는 무수한 빛깔들을 보게 합니다. 떨어지면서 녹아버리는, 한순간 세상을 아름답게 채웠다가 사라지는 흰 눈의 부드러운 속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맹세나 사실, 확신 등 세상을 채우는 많은 것들 속에서 시인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을 불러 우리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시집에 <택시에 두고 내렸다>라는 재밌는 시가 있는데요. ‘나는 어둠이 매일 온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 다른 하늘의 새 떼를 깨달은 사람이. / 내가 없는 너의 하루를 / 가만히 수긍한 사람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슬프고도 아픈 구절인데, 이 가만한 수긍이 참 좋습니다. 나여야만 하고 내가 있어야만 하고 모든 일에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내가 아니어도 되고, 내가 없어도 되는 마음, 이 비움. 이 대목이 너무 좋아 읽고 또 읽습니다. 오늘은 영원이 아니라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시인 다음으로 깨달은 사람인 척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저 고운 저녁노을, 그 다음엔 어둠이 매일 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영원이 아니기에 가능한 걸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다부지게 새깁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괜찮다고. 영원이 아니라서 허락되는 이 모든 기쁨과 슬픔들. 고맙다고. 그 너머에 굳건한 우리 하느님이 계셔서 너무 좋다고.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22면

우분투 우분투

올해 3월 세계문학 행사로 DMZ에 다녀온 후, 지워지지 않는 잔상과 말들이 계속 어른거려요. 폭력과 죽음이 낭자한 곳에서 건너온 이들이 용서와 화해,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바로 우리 분단의 현장 DMZ였기에 더 실감 나기도 했는데요. 그 엄중한 땅에서 작은 말의 씨앗을 하나 품어 왔는데 바로 ‘우분투(Ubuntu)’입니다. 초대된 작가 중에 아프리카 소년병 출신의 이스마엘 베아가 있었어요. 그는 서아프리카에 있는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났는데, 내전이 발생하여 12살에 가족을 잃고 소년병으로 징집됩니다. 당시 만 명 정도의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었다고 해요. 전쟁에서 “매우 빨리 광기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베아. 살육과 복수의 현장을 전전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죽이고 끝까지 살아남는 법을 배운 그는 우연히 유니세프에 구출되어 전쟁에서 벗어납니다. 보호학교에 다니며 마약을 끊고 아이로 돌아가는 길을 배우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어 “모든 아이는 희망입니다”라고 말하는 베아. 이제는 인권운동가이자 작가로 살아가는 베아는 유머가 넘치고 저음의 목소리가 멋졌어요. 저녁 식사 자리에선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를 기막히게 불렀지요. 베아는 대담 자리에서 친구 소년병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소년병 친구가 적에게 두 손이 잘렸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두 손을 자른 병사도 전장에 끌려 나온 소년병이었지요. 그 소년병이 다시 잡혀 와 손 잘린 친구와 대면하게 됩니다. 손 잘린 친구가 묻습니다. “왜 내 손을 잘랐니?” 적 소년병이 대답합니다. “네 손을 자르지 않으면 우리 둘 손을 다 자른다고 해서야.” 친구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다행이네, 네 손이라도 남아 있으니.” 그리고 자기 손을 자른 병사를 용서해 주었다는 이야기. 믿기지 않는 이 생생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살아있는 예화로 제 머리를 쳤어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늘 질문이 꼬리를 무는 구절. 무엇이 용서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답은 우분투에 있었어요. 아프리카의 평화 정신을 상징하는 이 말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 정말 용서하기 힘든 사건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가요. 하지만, 그래도, 끝내, 우분투를 말하는 이를 마주하며 그 말을 따라 하면서 저는 속으로 ‘아멘’ 했습니다. 낮게 엎드리게 되는 말. 전쟁이 인간의 야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면 소년병의 용서는 야만이 죽이지 못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어요. 이 시간에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희망의 씨앗인 아이들이 다시 웃게 되길 바라며, 새로 배운 말을 홀씨처럼 뿌립니다. 우분투, 우분투.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2면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

비를 좋아해요. 맑은 햇살도 좋아하지만, 비가 내리면, 특히 늦은 밤에 빗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콩콩 뛰어 잠이 들지 못한답니다. 오늘, 봄비가 촉촉이 내린 한낮, 일을 마치고 기분 좋게 걷고 있었어요. 이 비 그치면 세상이 얼마나 더 파릇파릇해질지 생각하면서요. 사람들이 광장에서, 꽃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네요. 지금 이 순간은 전쟁 걱정도, 취업 걱정도, 사무실에 들어가 처리해야 할 서류 걱정도, 아픈 가족 걱정도 다 잊은 표정이에요. 친구와 차를 마시고 나오니 바람결이 좀 거칠어지네요. 빗방울도 굵어지고 순한 봄비가 여름 폭풍처럼 사나워지네요. 느긋하게 걷던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빨리하네요. ‘이러다 저 꽃들 다 지겠다’ 싶어서 그만 마음이 아슬해졌어요. 젖은 보도 위로 꽃잎들이 이미 점점이 떨어지고요. 아깝다, 안타깝다, 어쩌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꽃들은 이미 제 몫을 충분히 했구나. 온전히 이 순간에 존재한 것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힌 이 며칠의 빛으로 충분했구나. 벚꽃은 벚꽃대로, 목련은 목련대로, 피어나 지는 생명의 순리를 이리도 아름답게 보여주었으니.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 상실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첫 마음을 다 보여주고 떠나는 꽃무덤을 보며, 더 이상 슬프지 않았던 오후. 지난 일을 놓지 못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없이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피어 있음의 의미를 알게 한 꽃나무.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쌓아두고 쟁여두는 걱정도 말라고, 마음이 바빠 마주하는 사람과의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던 어제를 반성하며 돌아오는데, 멀리서 친구가 사진을 보내줍니다. “이 비에도 꽃나무에 꽃잎이 그대로야. 의연하지? 연약한 꽃잎이 강한 비바람을 이기는 것 같아. 기운 내.” 마음이 괜히 서성이고 불안한 날에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세계가 너무 위태롭게 느껴질 때는 부드러운 것들에 마음을 내어줍니다. 아이의 웃음, 투명한 햇살 한 자락, 고요한 순간에 들리는 가느다란 새소리, 보드라운 연둣빛, 빗방울 소리, 어느 날 받은 카드 한 장.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은 떠들썩한 소란 대신 고요에 기대는 일. 복잡한 계산 대신 단순함을 믿는 일. 고단한 하루를 화로 풀지 말고 감사로 여미는 일. 이 순간의 충일함에 기대어 한 걸음 걷다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어느새 가까워집니다. 희망이 곧 믿음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믿어요. 힘을 좋아하고 협박과 억압을 즐겨 하는 이들이 일으킨 전쟁은 작고 연약한 것들을 보듬는 생명과 평화의 기도에 곧 지게 될 것이라고요. 늘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이 오늘 봄비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22면

사는 동안 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봄꽃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볕 좋은 곳의 개나리는 벌써 노랑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려 하고 벚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꽃을 연구하는 분의 말씀에 따르면 지난겨울이 예년보다 추웠기 때문에 올봄 벚꽃의 휴면 해제 시기가 빨라진 거라고 하네요. 겨울엔 겨울나무처럼 단단하게 안으로 응집하는 힘을 키우려 기도했는데, 봄이 되니 수줍게 피어나 어느 순간 화르르 주위를 밝히는 봄꽃이 되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붓글씨 쓰시던 책상 위, 종이 뭉치 속에서 발견한 글귀입니다. 주로 한자로 붓글씨를 쓰셨기에 아버지 붓글씨 작품을 알아보려면 얇은 한문 지식으로 늘 더듬더듬 읽어야 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사는 동안 꽃처럼’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엄격하고 단아한 서체를 즐겨 쓰셨는데 이 문구는 캘리그라피를 하듯 꽃처럼 날아가게 쓰셨네요. 서예대전에 출품할 목적으로 표구한 작품이 서재에 하나 걸려 있는 걸 제외하고는 아버지 쓰신 글씨는 이렇게 종이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숨결처럼 쓰다듬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처음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붓글씨 덕분에 이 봄 매일 새기며 생각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DMZ세계문학페스타’라는 행사에 참여해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요. 팔레스타인의 작가 아흘람 브샤라트는 어렵게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기적처럼 죽음을 건너온 사람이 환하게 꽃처럼 웃습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 이웃의 가족이 명절에 입을 옷을 사러 가다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에 살해되었다고 해요. 뉴스를 들어도 남의 일처럼 실감 나지 않던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들으며, 도라산 전망대에서 가까운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절감합니다. 평화는 매일 한 걸음씩이라도 더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일임을. 사는 동안 꽃처럼. 성경에서 꽃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자주 비유되는데, 저는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자주 새깁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 6,28) 솔로몬왕의 영광도 이 꽃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라는 뜻이겠지요. 하나인 세상이 분열하고 나뉘어 서로 공격하면서 전쟁의 불안이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이때, 평소 별생각 없이 쓰던 기름이, 원재료들이 모두 유한한 자원임을, 우리가 그동안 기적처럼 서로 돕고 나누며 이어왔음을 뒤늦게 실감합니다.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아무 불안 없이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봅니다. 부는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질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피어 있는 꽃. 곧 사라질 영광이 이 찰나의 시간에 기입됩니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각자의 고투로 바쁘고 힘들지만, 사는 동안 꽃처럼!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슬픔, 하느님의 신비를 모두 간직한 꽃들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오늘, 주님 부활하신 빛과 함께 흐르는 이 시간, 그대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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