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지 모습만을 떠올려 왔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가장이고, 어머니는 희생하며, 자녀는 순종하는 모습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가정교육의 핵심을 ‘순종’으로 배웠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에 오시면 저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셨고, 용돈을 주시며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학교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지!” 그 시절의 가정교육은 자녀의 순종을 미덕으로 삼았고, 그 안에는 정(情)과 함께 당연시된 위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가족의 모습은 익숙한 틀을 넘어 낯설고 도전적으로 다가옵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 앞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자,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에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라고 반문하시고, 심지어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까지 하십니다. 조민아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혈통 중심 유대사회를 넘어 새로운 ‘하느님 가족’을 제안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피를 잇는 가문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행을 더 소중히 여기셨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외의 인간 ‘가부장’을 거부하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가족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던 어린 소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태어나자마자 피난길에 올라 난민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족이란 안정된 제도라기보다, 주변부의 불안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관계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인정에 기반한 혈연 중심 가족 모델을 ‘성가정’의 근간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가족은 형태가 아니라 관계이며, 누군가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질서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돌보며 살아내는 관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위계에서 관계로 이끄는 힘이고, 공부는 새로운 관계의 언어를 배우는 연습이며, 사랑은 서로가 평등하게 다시 마주 앉는 자리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다시 시작할 ‘함께 살기’의 기둥입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따뜻한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이 울림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칼럼은 그 질문에 응답하며, 복음과 일상 사이에서 함께 사는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가고자 하는 여정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기도, 공부, 사랑이라는 세 갈래 길 위에서 ‘함께 살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려 합니다. 이 여정을 함께 걸어 주시기를, 마음 깊이 청합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유형선·김정은(클라라) 부부는 ‘인문학’을 통해 가족의 위기를 통과해 왔다. 온 가족이 함께 쓰고 읽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오늘, 가족 독서를 시작합니다」 등을 펴냈으며, 가족인문학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은 부부가 번갈아가며 1회씩 연재한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