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눈물의 고해성사와 은반지

모두가 클라라를 걱정했습니다. 엄마 소피아와 시어머니 소화 데레사, 배우자 아우구스티노는 물론이고, 두 딸 카타리나와 엘리사벳까지 클라라를 걱정했습니다. 가족의 도움으로 클라라는 일과 육아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아에만 전념하면 잘 해낼 줄 알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엄마의 역할이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다섯 살 엘리사벳이 고열로 입원했고, 이어서 아홉 살 카타리나도 같은 증상으로 입원했습니다. 병원에서 딸들을 보살피다 클라라마저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집 근처 아동병원의 3인실에서 세 모녀가 그해 겨울을 났던 것입니다. 병실에도 봄은 찾아왔고, 두 딸은 퇴원했지만 클라라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습니다. 홀로 남아 돌봄이 필요한 딸들을 생각했습니다. 새 학년 신학기가 시작되었으니 손길이 절실할 때였습니다. 병실에 누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클라라는 온 가족의 걱정거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소피아는 매일 구일기도를 바쳤고, 소화 데레사는 치유의 은사를 구하는 성령기도회 참석을 권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백방으로 좋은 병원을 물색하느라 분주했으며, 카타리나는 얼른 자라서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엘리사벳은 동화 속에서처럼 산삼을 캐 오겠다고 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판공성사를 보기 위해 클라라는 고해소 앞에서 줄을 섰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매우 담담하게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해실에 들어가자마자 느닷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뜻하지 않은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죽고만 싶습니다, 신부님.” 빗장이 열리자 마음속 깊이 꼭꼭 숨겨두었던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가족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낱낱이 밝히며 어린 두 딸에게까지 걱정을 끼치는 엄마로 살아야 한다면 그러한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호소했습니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시는군요.” 칸막이 너머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랑이라니…, 그늘진 마음에 한 줌 햇살로 다가오는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가족의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가족의 사랑을 충분히 받는 일상에서의 실천을 보속으로 주셨습니다. 고해실 밖에서 아우구스티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라라에게 작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직접 세공해 만든 ‘아모르 파티(운명애)’라고 새겨진 은반지였습니다. 그 은반지는 클라라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10년이 더 지났지만, 눈물로 고해성사를 하고 은반지를 선물 받았던 그해 부활절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완벽한 엄마라는 허상에 갇혀 있던 제가 그로부터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걱정하는 거야.” 딸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딸들의 잔소리를 들을 때면 “사랑해 줘서 고마워”라고 말합니다. 가족이란 구성원 각자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완전해지는 공동체가 아님을 압니다. 각자의 고유함을 존중하며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곁에 머무르는 관계임을 이제는 압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3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자녀를 위한 기도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가톨릭 기도서」의 ‘자녀를 위한 기도’ 후반부는 아이의 삶이 놓이게 될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 부패에 물들지 않게 하시며.”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세상이 아이를 위협하는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아 달라는 요청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 기도의 의미가 제 걱정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아이를 세상에서 빼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부패’는 노골적인 악의 얼굴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더 자주,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삶의 형태로 다가옵니다. 비교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분위기,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길 말입니다. 아이들이 물드는 것은 악 그 자체보다, 이런 무감각과 체념일지도 모릅니다. 기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온갖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유혹은 대개 위험한 제안의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속삭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다들 그렇게 살아.” 이런 말들은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리기에 더 위험합니다.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유혹은 나쁜 선택을 하라는 권유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길로 내미는 손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보호막이 아니라, 분별의 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대신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추고 묻고 다시 선택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기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청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자칫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권고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늘 질문하는 분이셨습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사회 질서에 질문을 던지셨고, 힘의 중심보다 주변부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범생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자녀를 위한 기도의 후반부는 아이를 약한 존재로 바라보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필요하다고, 다르게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족의 역할도 다시 보입니다. 가족은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 남아 주는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세상 속에서 흔들릴 때, “다 그렇게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질문해도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꿈꾸게 하는 가족이라고 말입니다. 꿈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함께 살아 주는 가족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서도 자기 길을 잃지 않도록, 서로의 곁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의 후반부는, 아이를 세상에서 빼내 달라는 기도라기보다, 세상 한가운데서도 자기 삶을 지켜 내며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구일기도를 바치며

클라라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주변에선 온통 언제 아이가 생길지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이 생각을 하니, 클라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아이가 자신을 닮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클라라는 자신의 아이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은 클라라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난생처음 엄마 소피아의 마음을 짐작해 보았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와 불길한 태몽 때문에 임신 중지를 결심했던 젊은 날의 소피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고민하던 중 클라라에게 아이가 생겼고, 클라라는 곧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닮을지, 엄마를 닮을 수밖에 없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있는지 물었습니다. 태아가 아들이면 50퍼센트, 딸이라면 25퍼센트 확률로 엄마의 유전적 특성을 닮는다는 교과서적인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법이라면, 임신 주수별로 다양하게 산전기형아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정도였습니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야.” “너를 닮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멋져지겠어?” 아우구스티노는 아름다운 말들로 클라라를 격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임신 전 과정과 출산은 오로지 여성인 클라라의 몫이었고 아우구스티노가 대신할 순 없었습니다. 시어머니 소화 데레사로부터 선물 받은 구일기도 책을 꺼냈습니다. 구일기도란 개인이나 공동체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기 위해 9일 동안 계속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7일간 청원기도를 하고 27일간 감사기도를 하는 총 54일간의 기도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매일 저녁 클라라와 아우구스티노가 함께 구일기도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클라라의 첫 기도지향은 건강한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뱃속 아기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자 그와 동시에 세상의 모든 건강하지 않은 아기들이 떠올랐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만드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도지향을 바꾸었습니다. 어떤 아이를 주시더라도 좋은 엄마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생각하자 그와 동시에 세상의 모든 어쩔 수 없이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 많은 여성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 클라라는 그들을 이해했기에 또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기도지향을 정하지 못한 채로 매일 저녁 구일기도를 바쳤습니다. 기도하는 날들이 쌓일수록 건강한 아이와 건강하지 않은 아이, 좋은 엄마와 좋지 않은 엄마에 대한 이분법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신과 같이 온전히 완벽할 순 없으니,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고민은 한 가지 생각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그의 피조물 전부를 아끼신다, 주신대로 받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조화롭고 아름답게 살겠다고 말입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자녀를 위한 기도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신자로 살아오며,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자녀를 위한 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도, 조금 자랐을 때도, 제 마음이 불안할 때도 이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길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어느 순간부터 이 기도문의 전반부에 있는 이 문장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녀를 길러’라는 구절에서, ‘과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하느님께 맡겨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나서 제가 ‘아이를 기른다’고 말해 왔습니다. 실제로 아내가 아이를 낳았지만 아버지인 제가 먹이고, 가르치는 일에 동참했으니까요. 두 딸의 아버지로서 꽤 오랫동안 아주 자연스럽게 ‘제가 기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정말로 내가 이 아이들을 키운 것일까, 아이들과 함께 그 시간을 지나온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제가 분명히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일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였던 순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 힘든 일을 겪을 때, 불안해하며 잠들지 못하던 밤들 앞에서 저는 준비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럴듯한 조언을 건네지도 못했고,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저 아이들 곁에서 함께 머무르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자라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자기 생각을 갖고 자기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가고 있는 이 길은, 애초에 내가 대신 걸어줄 순 없는 길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아내는 어릴 적 자주 넘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대신 걸어 주지 않았고, 넘어지지 않게 미리 막아 주지도 않았답니다. 다만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고요. 그 짧은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아이가 가야 할 길을 앞장서서 열어준다거나 대신 그 길을 걸어 준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길이 드러나도록 아이 곁에 머무는 일일 것입니다. 기도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이 문장은 자칫 아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루기를 바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신학자였던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특별한 성취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내가 나답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가족이란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구성원 각자가 자기답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조용히 말해 주는 관계일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전반부는, 부모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내려놓게 하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아이의 삶을 대신 완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하느님께서 이미 그 삶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이 기도는 응답을 서두르지 않은 채, 우리 삶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3,5) 클라라는 두려웠습니다. 아침이면 ‘오늘은 또 얼마나 넘어지려나?’ 걱정했습니다. 여섯 살 어린이 걸음으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의 성당 옆에는 유치원이 있었습니다. 클라라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유치원에 갔습니다. 유치원 문 앞에는 수녀님이 서 계셨습니다. 걸어오는 동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해 새까매진 무릎을 털어주시며 “잘 왔다” 하고 반겨주셨습니다. 유치원 안에서도 넘어지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두꺼운 안경도 소용없었습니다. 얕은 문턱이나 계단에서 어김없이 넘어졌습니다. 클라라가 넘어질 때마다 마치 클라라만 계속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어딘가에서 수녀님이 나타나 넘어진 클라라를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클라라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수녀님을 보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라라도 커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수녀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 클라라는 기도하는 소녀였습니다. 넘어지지 않기를,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일하시는 엄마아빠의 무사귀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있으면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응답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릴적 자주 넘어졌던 내가 새 생명 잉태하고 길러낸 일 모두 창조주 하느님의 신비 클라라는 수녀님이 되진 못했습니다. 소년 시절 신부님이 되고 싶었던 아우구스티노를 만나 함께 기도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일생을 함께 기도하며 살아가자고 약속하며 클라라와 아우구스티노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에게 가족이 더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클라라에게 아내, 엄마, 며느리, 아우구스티노에게 남편, 아빠, 사위 등등 여러 역할이 주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3) 클라라와 아우구스티노가 부부가 된 지 스물두 해가 지났습니다. 두 딸 카타리나와 엘리사벳과 함께 새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수녀님의 도움 없이 유치원 생활이 불가했던 클라라가 어떻게 새 생명을 잉태하였는지,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어떻게 두 아이를 길러냈는지 신비롭기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라와 아우구스티노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것 같진 않습니다. 온 세상을 만들어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만들어내시고 길러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이면 성령칠은 카드를 뽑는 행사를 합니다. 봉사자분들이 미리 만들어놓은 여러 장의 카드 꾸러미 앞에 서면 마음이 설렙니다. 올해는 어떤 카드가 내게 올까 기대하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저는 늘 ‘용기(굳셈)’ 카드를 선물 받았습니다. 성령칠은 용기(굳셈)의 의미를 살펴보면,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어려움을 이겨낼 힘. 하느님께 나아감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 쓰여 있습니다. 성령칠은 용기(굳셈) 카드를 스마트폰 케이스에 꽂아두고서 자주 들여다봅니다. 볼 때마다 두려운 순간에 일어났던 신비 체험을 떠올립니다. 하느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마태 9,22)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 운영자)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아버지의 자리

인생을 살다 보면, 아버지로서 설 자리가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2012년 파업이 그랬습니다. 회사의 매각 결정으로 수백 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졌고, 고용 안정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은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몇 달째 월급이 끊긴 시간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버지라면 마땅히 가족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고 여겨 왔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파업의 현실은 저를 그런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대책도 확신도 없는 상태로, 마치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파격적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래도록 ‘겸손하라’는 권고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140여 일에 걸친 파업의 시간을 지나며, 이 말씀은 제게 조금 다른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인간 아버지가 가족 안에서 중심의 자리를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초대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기보다, 가족들과 함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모든 답을 알고 결정하는 존재라기보다, 함께 묻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말입니다. 파업의 시간은 제게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중심의 자리를 내려놓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더 이상 가족들 앞에서 모든 답을 가진 사람처럼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가족 곁에 함께 머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심에 있지 않아도, 가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족 각자의 자리가 또렷해졌습니다. 제가 새롭게 배운 아버지의 자리는, 가족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된 자리에 가까웠습니다.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여지, 모른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여백, 필요하다면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담담함 말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그때, 제자 요한 역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심의 자리에 서려 하지 않았고, 십자가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 또한 해결책이 아니라 관계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은 새로운 권위가 아니라, 서로를 맡기고 돌보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렇게 다시 배웁니다. 저 역시 ‘아버지’라는 책임을 맡아 가족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끎이 중심 차지가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합니다. 모든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함께 질문을 품고 함께 결정해 가는 사람으로 살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중심에 서서 완전한 척하는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도망치지 않는 아버지로 살고자 합니다. 권위가 아니라 관계 안에 머무는 아버지로 살아갈 용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 67,2) 소피아와 베드로는 부부입니다. 결혼 3년 만에 딸을 얻었습니다. 소피아는 어려서부터 남동생들 뒷바라지에 지쳐 오직 딸, 딸, 딸을 원했고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딸이었기에, 마리아라 부르며 귀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딸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피임 시술을 차일피일 미루던 중 원치 않은 아이가 생겼습니다. 맞벌이해도 빠듯한 형편인데 가족이 늘어난다니! 소피아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바로 태몽이었습니다. 임신 사실을 몰랐던 임신 초기, 주말 한낮에 소피아와 마리아는 잠깐 낮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꿈에서 소피아는 마리아를 안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크고 아름다운 봉황 한 마리가 날아와 소피아와 마리아의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봉황은 눈동자의 검은자위가 없었습니다. 잿빛 눈동자를 가진 봉황을 안고서 “눈!”이라 소리치면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소피아는 곧 이 꿈이 태몽임을 직감했습니다. 혹시라도 잿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를 낳을까 두려웠습니다. 베드로 몰래 임신 중지를 결심했습니다. 병원에 가기로 한 날.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데, 분명 일터에 있어야 할 시간임에도 갑자기 베드로가 소피아 앞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소피아에게 큰절을 올리고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하여 소피아는 임신 중지 결심을 접은 것이었지요. 저, 클라라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저는 기억을 못 하지만, 소피아와 베드로의 말대로라면 갓난아기였을 적에 저는 그들의 첫 아이 마리아와는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 눈을 맞추지 못하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라는 동안 신체적 결함이 포착되곤 했습니다. 하느님, 왜 저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청소년기 내내 이 질문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교복을 입고 흰 양말에 검정 구두를 신던 시절, 아침이면 반짝반짝 광택이 나던 검정 구두를 기억합니다. 한 번도 제 구두를 제 손으로 닦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구두라는 것이 원래 하룻밤이 지나면 자동으로 자체 발광하는 물건인 줄 알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구두가 닳고 색이 바랜다는 사실을 알았고 베드로가 매일매일 제 구두를 닦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아빠 베드로는 중학생 때 어머니 마리아를 여의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나 일찍 데려가신 하느님을 한동안 원망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곧 살아생전 어머니께서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올랐고 그 모습 그대로 하루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살아내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런 베드로를 제 아빠로 둔 덕분에 저는 기도가 무엇인지 자연스레 체득한 것 같습니다. 기도란 한 뼘 거리를 두는 사랑입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으면서 한결같이 저를 비추는, 어느 맑은 날 밤의 달빛처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제 발 아래를 밝혀주는, 그리하여 제가 넘어지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무엇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구두를 닦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유형선(아우구스티노)·김정은 부부는 ‘인문학’을 통해 가족의 위기를 통과해 왔다. 온 가족이 함께 쓰고 읽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오늘, 가족 독서를 시작합니다」 등을 펴냈으며, 가족인문학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은 부부가 번갈아가며 1회씩 연재한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을 다시 묻다 – 함께 살기 위한 첫걸음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지 모습만을 떠올려 왔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가장이고, 어머니는 희생하며, 자녀는 순종하는 모습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가정교육의 핵심을 ‘순종’으로 배웠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에 오시면 저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셨고, 용돈을 주시며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학교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지!” 그 시절의 가정교육은 자녀의 순종을 미덕으로 삼았고, 그 안에는 정(情)과 함께 당연시된 위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가족의 모습은 익숙한 틀을 넘어 낯설고 도전적으로 다가옵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 앞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자,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에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라고 반문하시고, 심지어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까지 하십니다. 조민아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혈통 중심 유대사회를 넘어 새로운 ‘하느님 가족’을 제안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피를 잇는 가문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행을 더 소중히 여기셨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외의 인간 ‘가부장’을 거부하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가족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던 어린 소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태어나자마자 피난길에 올라 난민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족이란 안정된 제도라기보다, 주변부의 불안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관계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인정에 기반한 혈연 중심 가족 모델을 ‘성가정’의 근간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가족은 형태가 아니라 관계이며, 누군가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질서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돌보며 살아내는 관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위계에서 관계로 이끄는 힘이고, 공부는 새로운 관계의 언어를 배우는 연습이며, 사랑은 서로가 평등하게 다시 마주 앉는 자리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다시 시작할 ‘함께 살기’의 기둥입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따뜻한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이 울림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칼럼은 그 질문에 응답하며, 복음과 일상 사이에서 함께 사는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가고자 하는 여정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기도, 공부, 사랑이라는 세 갈래 길 위에서 ‘함께 살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려 합니다. 이 여정을 함께 걸어 주시기를, 마음 깊이 청합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유형선·김정은(클라라) 부부는 ‘인문학’을 통해 가족의 위기를 통과해 왔다. 온 가족이 함께 쓰고 읽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오늘, 가족 독서를 시작합니다」 등을 펴냈으며, 가족인문학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은 부부가 번갈아가며 1회씩 연재한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