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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돈 수녀의 - 진복팔단 해설묵상] 7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입력일 2012-08-24 수정일 2012-08-24 발행일 1995-03-12 제 194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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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는 공동체 건설의 요체
차별없는 보편성이 큰특색
타산적인 베품은 지양돼야
그리스도교인의 자비는 애덕서 비롯

“복되어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니” (마태5,7)

우리는 지금까지「행복칭송들」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앞으로 보다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삶과 사랑의 자세를 보게 될 것이다. 자비의「참된 행복」은 마태오가 제시한「행복칭송들」안에서 근본이 되는 것이다.

자비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자세 및 그리스도교적 실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을 가진 사람은 틀림없이 인간사랑도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자비는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다.

자비는 결속이며 우리 형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투신이다. 이 자비의 행복칭송은 하느님의 자비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우리의 자비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얻는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연민ㆍ동정과는 달라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오 18, 23~27)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인간은 자신의 거절과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에 의존되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에게서는 자기 자신의 행동안에서 하느님의 행위를 닮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요구되고 있다.

자비는 종교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자기자신을 굽히는 사랑이며 또한 그들에게 권고와 행동으로, 비록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돕고자 하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실제로 도와 주는 사랑의 방법이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자비를 초월하여, 고통받는 이들에게만 한정시키지 않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목표는 사람들이 모든 삶의 차원에서 최대 긍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또한 그들에게 삶의 풍요에 참여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통속에 묶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속에서부터 이끌어 내기 위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자신을 굽히는 사랑

자비는 모든 인간들 사이에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반드시 수반되는 수단이다. 결속과 투신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용서는 공동체를 재건시킨다.

자비는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끈이다. 이「행복칭송」은 우리에게 자비를 촉구하면서 서로간의 친교의 임무를 아울러 부연하고 있다.

동시에 이 임무를 복음화의 본질로 삼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자비는 보편적이므로 결코 차별을 두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교적 자비는 느낄 수 있는 사랑과 우정의 인간적 표현을 수반한다. 즉 자비의 투신은 구체성이 없는 사랑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그 본질상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행동, 투신, 실천, 자세, 우정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자비로운 사랑」은 구체적인 인간에게 실제로 실천,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상적, 추상적이고 내면적인「의향」에 그치고 만다. 이처럼 인간 서로간의 관계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시선을 결정짓게 한다.

인간과 이웃, 이 둘은 하느님께 대한 같은 관계를 통해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무관할 수 없다.

완고함 대신 자비를

자비는 인간 서로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첫번째 행복칭송이다. 예수는 여기서도 영과 정신에서 시작하는 마음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

완고함 대신에 자비를, 이기심 대신에 무아적인 사랑을, 자기추구 대신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은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비록 멀리 있다할지라도 그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어려움에 열린 눈과 손, 무엇보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뿐만아니라 그들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마음도 가져야 한다. 자비의 동기는 우리 모두가 의존하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첫번째 행복칭송

우리는「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리스도교적 자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강도를 만나 매질당하고 길에 쓰러져 있었던 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자기 스스로는 도울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마리아인은 이웃에게 도움을 베풀어야만 했다. 이웃이 단지 부르짖고 있는 어려움때문에 그 어떤 계산적인 생각이나 다른 의도가 없이 그 사람에게 가까이 있어 주는 것이 자비, 곧 그리스도교적인 자비이다.

이렇듯 그리스도교인의 자비와 그 실천은 애덕에서 비롯해야 한다.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안에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비를 형제적 사랑의 요건인 동시에 이 사랑의 매듭이요 봉인으로 강조하셨다(요한 13, 34참조).

또 율법의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유사하다」고 선언함으로써 (마태오 22, 39. 루가 10, 27. 요한 15, 22)우리의 구체적인 상호친교 관계안에서 실현되는 자비와 사랑을 당신의 나라를 감지할 수 있는 표시로 만드셨다.

형제적 사랑의 요건

용서는 자비의 가장 고귀하고 또 가장 어려운 형태이다. 자비는 모욕의 용서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예수는『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오 5, 44)고 하셨다.

또 주의 기도에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기를 청하기에 앞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신다.

왜냐하면『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마태오 6, 14~15)이기 때문이다. 자비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마태오 18, 21~22), 즉 한없이 마음으로부터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용서통해 화해 이룩

우리 인간의 친교는 끊임없이 실수와 결함때문에 불완전하다. 고의적인 잘못이나 편견, 부정 등이 우리의 친교를 약화시킬 뿐아니라 쇠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자비와 사랑을 드러낸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공동체를 재건하고 굳건하게 만든다. 복음화는 용서의 선포이며 동시에 용서에 관한 교육이다. 복음화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선포한다. 우리도 그렇게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복음화는 친교를 위한 봉사이며 동시에 용서를 통해 화해를 이룩하는 봉사이다.

예수께서 수행하신 사명은 불행으로부터의 해방과 화해의 사명이다.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