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상살이 복음살이] 그리스도인과 사회 참여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6-03-09 수정일 2016-03-09 발행일 2016-03-13 제 2985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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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 불의에 침묵해선 안돼
새내기 대학생 “뭐가 문제죠?”

올해 개신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 박재원(가명·가브리엘·20) 씨는 심심찮게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다. ‘채플 시간도 그렇고….’

매 학기 필수 이수 과목으로 개신교 교리를 반강제적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영 마뜩찮다. 고르고 골라 가입한 동아리 등에서도 답답한 현실에 부딪히긴 매한가지다. “가톨릭교회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너무 왜곡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설명해도 가톨릭을 이단시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요. 누가 이단인지….”

‘가톨릭교회의 활동이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개신교 신자들의 논리 앞에서 말문이 막히기 일쑤다.

“뭐가 문제인 거죠? 나름대로 복음에 맞갖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교회에서 하는 일이 자랑스럽기도 한데….”

‘정교분리’ 대한 오해 또는 몰이해

‘어디서 들어본 거는 같다.’

박 씨 같은 많은 신자들이 ‘정교분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개신교 신자들과의 대화는 단절되기 십상이다. 우리나라 헌법까지 들먹이는 앞에서는 옹색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헌법 제20조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개신교 신자들이 내세우는 ‘정교분리’는 자신들도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교분리는 근대국가 헌법에서 나타나는 기본원리 가운데 하나다. 종교와 국가가 자신의 고유한 활동 영역을 지키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아울러 국가가 어느 특정한 종교나 교파에만 특권이나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어떠한 신앙에도 동등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리다.

이처럼 정교분리는 원래 국가가 특정 종교에 편향된 정책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도 “입법부가 종교의 창설을 권장하거나 제한하는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담장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정교분리 원칙을 종교인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잘못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같은 의미에서 종교인이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정당 활동 등에 나서는 것도 종교 본연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 정의평화환경전문위원회 위원장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사제들의 시국미사나 종교인들의 시국선언 등이 ‘이익’을 취할 목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국가기관이 잘못된 법의 이름으로 행하는 불의에 대해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은 교회 가르침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또 “모자보건법에는 반대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생명이 걸린 일에는 무관심한 모습은 모순적이다. 생명 문제에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전 예수님 또한 당대의 불의한 현실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세우고자 하셨다. 이것이 참된 사랑의 모습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정교분리를 강조하는 다른 이면에서 종교집단이 이익집단화 해서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는 결국 공동선을 해치고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회 참여, 주님과 동행하기

오늘날에도 정교분리 원칙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는 이 같은 오해에서 비롯된 바 크다. 정치와 종교가 겹치는 영역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것도 주된 이유다. 정치의 목표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종교 역시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을 구원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가 많은 역할을 해온 복지 사업이나 나눔 등을 이제는 많은 부분 국가가 떠맡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목표와 역할 면에서 중복이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종교가 오랜 노하우와 전문성 등을 지니고 있는 영역에서 국가의 잘잘못을 얘기하고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독일 나치 세력과 같이 특정 인종을 말살하는 정치집단이 있다고 할 때 정교분리를 이유로 침묵한다면 이는 종교의 자기 부정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레오 13세 교황은 「노동 헌장」이라고 불리는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에서 종교가 현세의 불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식 표명했다. 교황은 회칙에서 “교회의 모든 배려가 지상의 현세적 삶에 속하는 것을 무시하면서까지 오로지 영혼의 구원에만 전적으로 쏠려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며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역설한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영적인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갈라 6,1)라고 말한다.

누구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힘은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시공을 뛰어넘어 세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무대다. 2000년 전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이 실현되는 현장인 것이다. 이 사랑의 모습은 오늘날 자비, 정의, 자유, 평화 등과 같이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로 드러난다.

주님 사랑의 모습을 많이 찾아내고 앞장서 살아갈수록 그만큼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에서 무관용보다 더 큰 죄는 무관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 증진과 공동선 실현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세상일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으로 치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살며 주님의 뜻을 펼쳐야 할 무대가 세상임에도 세상일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악마의 속삭임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정수용 신부는 “교회가 침묵할 때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것은 불의를 저지른 자”라면서 “평화의 적은 전쟁뿐만 아니라 의심이나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과 마음의 장벽을 쌓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무관심도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