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쉼터]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 도보순례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7-08-01 수정일 2017-08-01 발행일 2017-08-06 제 3056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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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명소’ 만들기 염원 담아 ‘교회와 사회’ 발맞춰 걷다
내년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선포 앞두고
서울시·구청 관계자 함께 순례길 점검
도심 곳곳 스며있는 교회 역사 느끼며
“세계적인 순례길 조성하자” 마음 모아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을 한국교회와 시민사회 모두의 순례길, 더 나아가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세계적인 순례 명소로 만들기 위한 발걸음과 땀이 모아졌다.

■ 주교와 서울시 부시장·구청장들이 한자리에

7월 26일 오전 8시 무렵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정순택 주교) 직원들이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 구 주교관 앞에 안내 부스를 차리고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정순택 주교, 원종현 신부(서울 순교자현양위 부위원장) 등이 등산화에 모자, 수건 등을 갖춘 모습으로 속속 구 주교관 건물터로 모였다. 서울시 류경기 행정1부시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성장현(빈첸시오) 용산구청장, 박홍섭 마포구청장도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과 함께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2013년 9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 의해 선포된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은 서울시내 종로구·중구·용산구·마포구 등 4개구에 걸쳐 총 27.3㎞에 이르는 도보순례 코스다.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터-좌포도청터와 한성부 내 주요 관청터-서소문역사공원·순교성지-당고개순교성지-새남터순교성지-절두산순교성지 등이 주요 순례거점이다.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은 내년 9~10월 경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로부터 교황청 공식 순례지로 선포될 계획이다. 이번 도보순례는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선포를 앞두고 사전에 개선사항을 점검하고 자치구의 문화콘텐츠를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이뤄졌다. 서울시와 자치구별 관광정책 책임자는 물론 역사정책, 보행·도심재생 실무 공무원들도 참여해 27.3㎞ 전 구간을 꼼꼼히 점검했다.

원종현 신부가 마이크를 잡고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 조성 경위와 교황청 공식 순례지로 선포되기 위한 준비사항 등을 설명한 뒤 참석자들은 구 주교관 계단에 자리를 잡고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이날 순례의 막을 올렸다.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 도보순례단이 7월 26일 출발에 앞서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날 순례에는 서울시 류경기 행정1부시장을 비롯해 김영종 종로구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성장현(빈첸시오) 용산구청장, 박홍섭 마포구청장도 함께했다.

■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절두산순교성지까지

순례단은 주교좌명동대성당 지하성당에 안치된 성인 유해 앞을 천천히 지나며 마음을 경건히 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수표교 옆 ‘이벽의 집터’로 향했다.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장소인 이벽의 집터를 알리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구 관수동 두레시닝빌딩 인근에 세워져 있지만 교회사 연구자들의 고증 결과 중구 수표동이 정확한 위치로 밝혀졌다. 관수동과 수표동은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청계천을 사이에 둔 지척 거리에 불과하다.

원 신부가 즉석 제안에 나섰다. “종로구청장님과 중구청장님이 이 자리에서 바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석을 내년까지는 중구 수표동으로 옮긴다는 합의를 해 주십시오.” 표지석을 둘러싸고 서 있던 김 종로구청장과 최 중구청장은 정 주교와, 원 신부, 류 부시장과 곧바로 손을 하나로 모으고 웃음꽃을 피우며 “표지석 이전해야죠”라고 시원하게 화답했다.

순례단의 발걸음은 박해시대 순교선조들이 고초를 겪었던 좌포도청터로 향했다. 지금은 종로3가 치안센터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원 신부의 ‘백과사전식’ 설명이 이어졌다. “조선시대 좌포도청터에 지금은 치안센터가 들어와 본래 기능과 역사성, 장소성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곳이 역사적 의미를 살린 문화시설로 이용되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이에 대해 김 종로구청장은 “종로3가 치안센터를 ‘종로3가 좌포도청터 치안센터’로 명칭을 바꾸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 교회 역사는 한국사회 역사와 분리 불가

순례단은 점점 기온이 올라가는 한낮 더위에 아랑곳없이 다음 행선지인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을 찾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초기부터 중기, 후기, 1960년대, 최근까지 여러 번 고쳐 돌을 쌓아 서울의 역사를 가장 오롯이 보여주는 문화재다. 돌 색깔만 봐도 유구한 역사를 생생히 알 수 있다. 한양도성 성곽길(낙산길)을 따라 내려오자 출구가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으로 연결된다. 가톨릭대 성신교정은 본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전신인 백동수도원터다. 서울의 역사와 한국교회 역사가 장소적으로 별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 순례지인 가회동성당으로 가는 길에 서울 계동 한옥마을을 지나던 중 도심 한가운데 이색적인 우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석정보름우물’이다. 원 신부의 설명이 또 이어진다. “1794년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님이 계동에 숨어서 선교하며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집니다. 1845년 김대건 신부님도 짧은 기간이지만 이 지역에서 사목하며 이 우물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회동성당을 나와 124위 시복식이 열린 광화문광장, 형조터, 의금부터, 전옥서터, 우포도청터 순례가 계속됐다. 광화문광장과 세종문화회관, 보신각을 따라 걸으며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한국천주교 순교터이자 신앙증거터’라고 적힌 표지석을 곳곳에서 발견하고 다들 놀라워 했다. 교회사와 한국역사가 하나로 묶여 있고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을 가꾸기 위해 교회와 사회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서울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가 서울 계동 북촌한옥마을 ‘석정보름우물’에 얽힌 교회사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 도심이 내려다 보이는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 걷고 있는 순례단.

■ 모두가 걷고 싶은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로

서소문역사공원·순교성지 공사현장과 당고개·새남터·절두산순교성지 순례는 버스 이동과 도보순례가 결합됐다. 다른 성지들과 달리 주변이 아파트로 둘러싸인 당고개순교성지가 하마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사연을 들은 순례단은 탄식을 내뱉었다.

성장현(빈첸시오) 용산구청장의 증언이다. “1998년 당고개성지에는 10명의 순교자 이름이 적힌 안내판 하나만 세워져 있었을 뿐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이곳에 아파트 설립 허가가 나자 제가 당시 고건 서울시장을 찾아가 ‘새 역사도 만드는데 있는 역사를 없애서야 됩니까? 아파트 설립 허가를 취소·변경하고 성지 부지는 남겨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결국 아파트 두 동이 들어서기로 했던 당고개성지 부지는 천만다행으로 보존이 되고 주변에만 아파트가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 순례지인 절두산성지가 올려다보이는 깎아지른 절벽 밑 ‘영혼의 강’(이인평 작) 시비 앞에 모인 순례단은 순교자 유해실로 이동해 경배한 뒤 성지 사무동으로 자리를 옮겨 더위를 식히는 다과와 담소를 나눴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정 주교는 “천주교 성지 순례에 서울시 부시장님과 4개 구청장님들, 실무 공무원들이 동참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며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역사가 우리 교회의 자랑인 동시에 우리 역사의 자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우포도청터 표지석.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