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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돈 수녀의 주의 기도 해설 묵상] 9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정하돈 수녀·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입력일 2017-08-23 수정일 2017-08-23 발행일 1994-07-31 제 191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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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기도는 -루카 복음에서의 찬송(Doxology)이 없이는 끝을 맺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이 기도에서는 마치 예수의 마지막 권고처럼 큰 위험에 대한 관망 내지는 경고로 끝을 맺고 있다.

『당신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르코 14, 38). 주의 기도문의 간청 중에서 이 간청은 유일하게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희랍어 원문을 직역한다면『그리고 우리를 유혹에 이끄지 마옵소서』이다. 이 말은 마치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이라도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야고보서 1, 13에서처럼 이런 해석은 물론 옳지 않다.『아무도 유혹을 받을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유혹을 당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악으로부터 유혹을 당하실 수도 없고 또한 당신 자신이 아무도 유혹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기도문의 이 마지막 기도에서 『유혹으로 이끌지 마옵소서』라고 한 동사의 참뜻을 알려면 옛부터 전해오는 저녁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께서도 이미 유대교의 이 오랜 저녁기도를 알고 계셨을 터이고 따라서 여기에 맞추어 이 마지막 간청기도를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내 발을 죄의 권세에로 이끌지 마시옵고 나를 잘못의 권세에로, 유혹의 권세에로, 그리고 수치스런 것의 권세에로 끌어가지 마옵소서』

◆유일한 부정의 표현

이 기도문에서는 죄악, 과실, 유혹과 수치스러운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다른 간청들처럼 명령형이 아닌 동사의 사역형은 방임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곧『내가 죄악과 과실 그리고 유혹과 수치스런 일에 떨어지지 않도록 버려두지 마옵소서』즉「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나를 방임하지 말아 주십시요」라는 뜻이다. 즉「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요」하고 비는 것은 주의 기도문의 이 마지막 기도에서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 간청은 우리가 아예 유혹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당할지라도 거기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길, 그리고 유혹을 당할 때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이 도와주시기를 비는 것이다.

「유혹」이란?

구약성서 안에서「유혹한다」는 말은 종종「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 안에서 기도하는 자는 이같이 기도하였다. 『주여, 나를 샅샅이 알아보시고 시험하소서』(시편 26, 2). 이 같은 요청 이면에는 자신의 항구함에 대한 큰 신뢰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는「유혹」과 우리의「유혹성」을 보다 깊이 그리고 위험스럽게 보셨다. 예수의 정신 안에서 기도하는 자는 유혹을 견디어낼 수 있다고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아예 유혹에로 이끌려들어가지 않도록 간절히 빈다.「유혹」은 여기서「시험」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유혹」이란「배신」과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유혹」은 이미 이 간청기도의 후문장 (악에서 우리를 구하소서)에서 다루게 될「악」과도 거의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예수는 여러모로 당대의 관념 안에서 생각하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사가들이 예수로 하여금 묵시문학의 언어를 사용, 말씀하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묵시문학 안에서 새로운 것을 그리고 다르게 말씀하셨음에 우리는 유의해야만 하겠다. 즉 예수는 놀랍게도 묵시문학적인 관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유혹은 배신ㆍ악과 동의

후대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종말 전에 전쟁, 지진, 굶주림(마르코 13, 7 이하:묵시록 6, 1-8 참고)의 큰 환난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에 인류는 하느님의 아들의 재림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루카 17, 22). 그러나「그런 일들은 (메시아)의 진통의 시작」(마르코 13, 8)일 뿐이다. 그 같은 환난들은 아직 닥쳐올「큰 재난」(마르코 13, 19ㆍ24)이 아니다. 이 때에는 거짓 예언자들(마르코 7, 15:루카 21)과 거짓 메시아(마태오 24, 26 이하:마르코 13, 6)가 나타날 것이다. 그 때는 바로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닥쳐올 시련과 유혹의 시간이 될 것이다(묵시 3, 18).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늘 당하고 있는 갖가지 모양의 유혹이 아니라 임박한 종말의 큰 유혹을 뜻하고 있다. 그 때에는 악의 세력이 위세를 떨칠 것이고 반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세상은 무서운 공포로 가득 찰 것이다. 사탄이 판을 치고 하느님의 성도들은 마지막 박해와 시련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말의 유혹은 신앙을 떠나 배교하게까지 하는 (마르코 13, 5-37 참조) 무서운 도전이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문의 마지막 간청은 결국『주여, 우리가 배신하지 말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비는 기도이다. 마태오가 전하는 이 간청을 이런 뜻으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그 끝에『악에서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같은 내용의 간청을 덧붙여 놓은 것이다. 즉 인간을 영원한 멸망에로 쳐넣는 악의 세력에서부터 영원히 구원해 주시기를 비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큰 유혹의 시간, 세말의 큰 재난이 덮치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하라 하지 않으시고 『유혹으로 우리가 빠져들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라』가르치셨다. 예수는 묵시문학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혹의 순간, 다가올 위험이 아니라 이미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매일 겪게 될 바로 지금의 위험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간청은 위험이 눈 앞에 가까이 있음을 보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절실히 도움을 청하는 외침인 것이다.

주의 기도문의 마지막 간청 안에서 언급된 유혹은 그분의 나라가 오심을 바라는 주 원의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믿는 신앙과 희망이 소멸되고 예수를 배반하는 위험이 이젠 보다 더 큰 유혹이 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구원계획과 그분의 나라가 어떻게, 언제 실현될지에 대하여 개방적이셨다. 그분은 자신의 파견과 복음 선포의 좌절 앞에서도 개방적이고도 무관심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셨다. 예수와 제자들의 외적 위험은 쉽게 배반의 내적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도움을 비는 이 기도에서 어디서나 그리고 항상 사람들을 위협할 수 있는「유혹들」, 죄를 짓게 할 수 있는 모든 충동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비는 간청 아래 제자들의 실존 전체를 위해 아주 구체적으로 빌고 있는 것이다. 즉 끝까지 제자로 살아남을 수 있고 배교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사고 빌고 있다. 예수는 당신 친히 바치셨던 청원기도의 내용을 이같이 제자들도 청하게 하신 것이리라.

제자의 존재는 위험스런 존재이다. 이같이 깊은 위험은 애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외치도록 가르친다. 하느님이「유혹에 빠지지 않게」해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의 기도문의 전후 문맥(con-text)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하느님을「아버지」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힘이 감돌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제자들의 상황이 이토록 위험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도로 유혹 극복해야

예수와 제자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싸움 이면에는 이미 통치하며 오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아직도 악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는 스스로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가지고, 상대적인 자주성을 가진 악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나약성과 유혹성도 있다. 사탄은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 이 시대에 특히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이미 이 땅 위에서 이렇듯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바로 지금 세력을 떨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여기서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예수는 이 기도 가르침 안에서 악의 신비를 용감하게 견디어내고 또한 기도로써 극복하기를 요구하신다.

「아버지 호칭」역시 이 간청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아버지,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요』. 사탄의 세력하에 빠져들어가는지 않는지는「아버지」에게 달려 있다. 사탄은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된 한계 내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혹의 장소에로가 아니라 유혹의 상황에로 인도되지 않기를 아버지께 청하고 있다. 하느님 자신이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신다. 유혹의 장소에서 죄로 유인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다만 악이 작용할 수 있는 위험스런 유혹의 상황 안으로 혹은 가까이 인도하실 수는 있다. 그러므로 이 간청은 야고보의 권고 말씀(1, 13)과 상반되지 않는다.

기도하는 자는 언제나 하느님이「아버지」이심을 알고 있다. 악은 세상에서 높은 계획 안에 들어있고 이 계획은 바로 우리「아버지」의 것이다. 사탄의 세력 영역 저편은 기도하는 자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아버지의 권능과 자비의 공간이다. 이제 다스리기 시작하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아버지의 권능과 인자스런 마음을 믿는 신앙은 우리에게 큰 안전과 아버지께 신뢰하며 보호를 청할 마음을 안겨준다. 그러기에 이 간청은 공포에서가 아니라 신뢰 가득한 신앙과 아주 깊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주어질 수 있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다. 사탄은 항상 스스로「청해서」(루카 22, 31 이하) 하느님으로부터 허락 받은 세력과 권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현대인들의 유혹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유혹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유혹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새로운 질(quality)을 가지고 있다. 과거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일들이 지난 50여 년 동안에 일어났다. 인간의 이성이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정도로 극히 발달하였다. 특히 자연과학, 의학 등이 인간과 사회에 기여한다면서 오히려 인간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권리까지 침해하기에 이르렀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보다는 손상시키거나 파괴에로 이끌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 윤리도덕적인 가치관의 변화 등이「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유혹에로 끊임없이 유인하거나 이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선입견 따라 살려는」유혹

우리는 서로 대하면서 상대방이 참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그에 대한 내 판단을 쉽게 가진다. 아니면 그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잘못보았다는 것을 제 때에 알 수 있을까?

△「눈을 감아버리자」는 유혹

이 유혹은 우리 모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유혹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생활환경 안에서 즉시 우리 귀에 이렇게 속삭이며 유혹하려고 다가온다.

「침묵하라」「너무 깊이 참여하지 말라」「흥분하지 말라」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유혹들은 모두가 완전히 구별되는 삶의 상황들과 체험 상황들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그리고 공통적인 핵심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필리피 2, 6 이하 참조) 유혹을 당하신 예수(마태오 4, 1∼11 참조)는 우리 인간의 나약성을 너무나도 깊이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유혹과 세상을 이기신 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거듭거듭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신다. 우리 신앙인들도 시련과 유혹을 당하고 나약한 본성 때문에 유혹에 빠지고 죄를 범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과 죄에 굴복 당했을지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 가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신앙인은 희망하는 자이다. 유혹과 시련은 우리를 정화시켜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한다.

정하돈 수녀·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