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하돈 수녀의 주의 기도 해설 묵상] 7 우리 죄를 용서하고

정하돈 수녀·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입력일 2018-02-01 수정일 2018-02-01 발행일 1994-07-17 제 191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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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간청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회개 없는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
인간이 해야 할 행위의 기본 지침
서로간 용서 베풀지 않으면 구원약속 취소
『우리 잘못을 용서하여 주심을, 우리가 이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줌 같이 하소서』. 이 기도는 이 세상이 언젠가 최후심판 때에 치르게 될 헴바침을 안중에 두고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용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심판 날인 마지막 순간만을 위해서 빈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오늘 그들에게 용서를 베푸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메시아의 시대는 용서를 받는 시대이며 용서는 구원시대가 베푸는 은혜이다. 이런 용서를 바로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기도 안에서 인간이 구체적으로 해야 할 행위에 대해서 언급한 곳은 바로 여기뿐이다.

용서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없다고 여러 비유들 안에서 예수는 거듭거듭 말씀하셨다: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오 18, 23~34ㆍ35)를 이해한 사람만이 올바르게 이 간청을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빚진 사람의 비유(루가 7, 41 이하), 늦기 전에 화해하라(루가 12, 57 이하), 약은 청지기의 비유(루가 16, 1~8), 악한 소작인(마르코 12, 1~9)과 달란트의 비유 혹은 돈 관리에 관한 비유(마태오 25, 14~30 루가(19, 12~27)-이 비유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빚진 자」「죄인」들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무수히 많은「빚」을 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는 너무나도 크다.「빚」은 갚아야 할 것을 갚지 못할 때 생긴다.

「빚진 것을 갚아라!」(마태오 18, 28 참조).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요구에 충실히 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실로 크다. 예수는 오직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 않는 데서만 우리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데서도 보신다.

예수께서는 자주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을 아는 원천으로 가리키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이를 위한 일반적인 규칙을 주셨다. (마르코 12, 31 루가 6, 31ㆍ36 참조). 이젠 하느님이 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헛되이 맹세하지 않는 것 등등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느님은 이제 온전한 사랑, 깨끗함, 솔직함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완고한 마음 때문에」-(마르코 10, 5) 많은 것을 허용해야만 했었던-구약의 율법 안에 매어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마태오 5, 48) 우리도 우리의 행위에서 완전해야만 한다.『여러분도 지시 받은 일을 모두 하고 나서도「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하시오』(루가 17, 10). 하느님은 다른 것들과 더불어 함께 섬길 수 없는 오직 한 분, 주님이시기 때문이다.『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오 6, 24).

인간의 마음에 악의는 결국 하느님 앞에서 거부하고 해야 할 복종을 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고」(로마 10, 3) 하느님의 요구들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스런 일이다.

여기서 예수는 놀라울 정도로 모든 율법의 규칙들을 글자 그대로 열심히 지킨 바리사이들,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실해했다고 믿었던 그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신다.

『여분의 의로움이 율벅학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넘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오 5, 20). 바리사이들의 모든 업적, 과도한 의무 수행(루가 18, 12 참조)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모든 율벅학사들의 결의법도 이젠 모두 끝났다. 본래 예수는 여기서 인간의 요구가 작게 만들 수 없는 하느님의 명예를 위해 투쟁하고 계신다.『여러분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높은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흉물입니다』(루가 16, 14).

◆보다 더 완전한 삶 요구

하느님이 모든 것을 요구하실 수 있고 또 요구하신 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잘 표현한) 심지도 않은 것에서 거두는 모진 주인에 대한 달란트의 비유(마태오 25, 24ㆍ26)에서 예수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자기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둔 종은 악한 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게으른」종(마태오 25, 26)「쓸모 없는」종(마태오 25, 30)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나쁜 열매를 맺은 나무만이 아니라(루가 6, 43 이하, 마태오 3, 10 참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루가 13, 6~9)도 잘라버려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역시 잘라버려 불 태워버릴 것이다. (요한 15, 1 이하) 악한 말뿐 아니라 쓸 데 없는 말까지도 심판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12, 36). 이렇듯 우리 인간은 보다 더 완전하게 살아야만 한다.『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마태오 12, 28~31)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직 하느님의 뜻만으로도 넉넉히 만족해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곧 그의 생활비를 몽땅」(마르코 12, 41~44) 하느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다.「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시오!」(마르코 12, 17)-이는 예수의 큰 표어(Parole)이다!

죄인인 인간이 하느님께 자비로운 면제와 용서를 청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무엇을 했는지 떳떳하게 말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서서『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 13)라고 빌 수 있을 뿐이다. 아무도 예외없이 이 간청만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오직 이 간청만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통로이다. 이 간청은 주의 기도 안에서『우리 죄를 용서하소서!』와 거의 동일하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즉 모두가 이 간청을 아뢰야 할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깊이 알고 있었던 세리와 같이 받을 자격조차 없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용서만이 오직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이 청을 드릴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용서를 비는 우리 죄가 그 얼마나 큰가 알고 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 일, 삶, 상황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개별적인 관계나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개별적인 관계 때문에「용서」를 청해야 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란 죄를 면제하는 것 그 이상이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모욕한 것을 너그러이 취소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우리가 행하지 못한 부담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야 할 뿐 아니라 그분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빚을 또한 인격적으로 용서해 주셔야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여지기를 간청한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다만 면제시키는 것뿐 아니라 용서까지도 해주셔야 하신다.

◆「구원체험」 신뢰에 바탕

이 간청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우리」간청이다: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죄를 용서하소서! 여기서 자기 죄를 용서해 주기를 비는 자는 어떤 공동체 안에서 이 간청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같이 간청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이는 틀림없이 집단적인 죄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거룩함 앞에서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없는 자, 즉「죄 지은」「개개인」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주체는 본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무리로 생각할 수 있다. 공동생활을 한 제자들은 거듭거듭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서로 용서를 비는 것은 사랑이 부족함, 봉사정신이 없거나 부족한 자세, 특히 기본적인「공동규칙」(마르코 9, 35)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예수를 직접 따르던 제자들만이 용서를 청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필요성은 예수의 선포 안에서-이미 부활 전에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이 간청기도를 전해받았을 사람들과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소식을 전해주고 그분의 비유와 격언들을 설명해준 사람들 사이에서도-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철저한 요청에 감명을 받고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이 본래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따른 사람들 역시 이같이 기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예수의 기도는 이런 이들을 위해서도 주어진 것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라면 추종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계속 전해주기 위해 그들에게「넘겨준」것이다.

예수의 기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은 필연적인 간청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요한 세자의 회개 외침을 듣고「정화수를 끼얹어 씻게」하는 (에제키엘 36, 25 즈가리아 13, 1 참조)「죄를 용서 받기 위해」(마르코 1, 4)「닥쳐올 하느님의 진노」(루가 3, 7)를 피하는 자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최후적 구원 위한 기도

추종의 모험과 복음선포(「빵 간청」)의 모험을 위하여 안전을 비는 것은 용서를 간청하는「구원체험」이 선행한 것이다. 하느님과 깊이 연루되어 있는 시작 원의가 행복「아빠-호칭」에 뒤따르고 있듯이 이제 용서를 비는 청은 그 앞서 신뢰에 가득한 간청에 뒤따르고 있다(루가 7, 36~50 참조). 예수를 따르면서 하느님을「아빠」라고 부를 수 있고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예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는 예수를 다만「주님」으로 인식한 사람보다 자신의 죄를 더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용서를 이미 체험한 사람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게 될 것이다.

주의 기도문에서 우리가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이미 용서 받은 죄에 대해서 최후심판을 바라보며 최후적인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매일 새롭게 범하는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것일까? 가능한 한 우리는 간청을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도록 해야 하겠다:이미 용서가 약속되었으나 거듭거듭 새로이 최후적인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이 용서는 아직 최후적으로 자유를 선언한 하느님의 판결선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후적인 구원은 언제나 조건 아래 약속된 것이다. 즉「회개의 열매」를 맺어야만(루가 38, 8) 한다. 특별히 최후적인 하느님의 용서는-예수께서 강력히 역설한 바와 같이-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우리 자신이 용서한 사람이 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가 이미 확실한 사람만이 이같이 기도할 수 있다.

◆이미 여기 그리고 지금

이미 용서를 받았고 또 언제나 앞서 용서할 자세가 되어 있는 하느님 앞에서의 죄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한 후의 죄보다 무한히 더 깊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분의 사랑과 거룩함에 있고 그분의 위대하심은 겸손과 용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에게 범하는 죄는 다만 존경을 드려야 할 사람에게 범하는 죄보다 언제나 더 크다 하겠다.

주의 기도문의 용서를 간청하는 후문장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에게 빚진 사람을 용서해 주었노라고 맹세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용서는 거듭거듭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하고 있다. 주의 기도에서 기도하는 이는 이미 하느님의 크나큰 용서를 받은 자이다. 이런 사람은 신뢰 가득한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며 기도한다. 용서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이런 이는 동시에 더 깊이 그리고 간절하게 용서를 간청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무엇보다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처럼(마태오 18, 23~35) 최후적인 구원과 용서의 약속은 취소되고 말 것이라 가르친다. 이미 구원되었음을 아는 예수의 제자라 할지라도 매일 새롭게 용서를 청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최후적인 구원은 오직 조건하에서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매일 새로이 범하는 죄 때문에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용서를 우리 자신의 용서와 관련지어 말씀하실 때마다 심판 때의 최후적인 용서를 생각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이 용서의 간청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성전 안에서 세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인정 받았다:『근데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가 18, 9~14). 이는 다가오는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용서의 대사를 베푸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여기 그리고 지금(alresdy here and now)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가 심판까지 가지 않기 위해서.

죄의 용서 안에서 최후적인 구원이 이미 세상에 온다. 우리 자신이 이미 용서해 주었음을 선언, 맹세하는 것도 이제는 모든 장애물들이 치워졌고 하느님의 용서가 이제 즉각적으로 효력이 있게 됨을 말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를 이미 오늘 그리고 지금을 위해서 간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미 용서를 받은 예수의 제자들은 용서를 청하는 가운데 이미 현재를 위해 세상 심판의 최후적인 용서를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존재 특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제자들은 여기서 구원에 대한 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겸손한 두려움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하돈 수녀·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