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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돈 수녀의 주의 기도 해설 묵상] 6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정하돈 수녀·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입력일 2018-02-08 수정일 2018-02-08 발행일 1994-07-03 제 191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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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구원을 위한「천상의 만나」의미

인간생활의 성화를 비는 기도
깊은 신뢰와 용기의 신앙 요구
세상 변화를 희망하는 것이 기도 내용 되어야
우리 말에서는 빵을 양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빵이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빵이 아닌 밥이 주식이기 때문에 빵을「양식」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해온 것이 아닌가 한다. 팔레스티나의 주요 음식은 빵이다. 예수의 모국어에서 빵이란 단어는 단지 빵만이 아니라 표괄적으로 양식, 식량을 의미하기도 한다. 빵이란 개념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다지 생소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서「양식」을「빵」으로 쓰기로 한다.

『복되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빵을 먹게 될 사람은!』(루가 14, 15). 예수는 우리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청하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필요한 빵, 그러나『이마에 땀을 흘려야 얻어 먹게 되리라』(창세기 3, 19)는 그 빵이 필요하다. 여기 우리말 번역서에서는「빵」이란 단어 앞에「우리의」(our, unser)가 빠져 있다. 그대로 직역을 하자면『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의 빵(양식)을 주소서』이다.「우리의」빵이란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는, 즉 없어서는 안 될 세상의 빵을 의미한다. 우리가 빵을 청한다는 것은 대단히 절박한 상황 내지는 그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빵을 청한다는 것은 곧 생명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빵」은 일반적으로 필요한 식량을 뜻하고,「우리의 빵」은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꼭 필요로 하는 빵을 의미하고 있다.『우리가 필요한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나날을 위한 빵은 생활하는 데 있어 필요한 빵, 즉 없어서는 결코 안 될 빵인 것이다.

◆모든 은총의 비유 개념

두 개의 우리를 위한 간청의 첫째 것은 날마다 필요한(일용할) 빵(양식)을 빌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날마다」를「매일의」라고 번역하였다. 또 예로니모 교부는 아람어 원문의「나자렛 사람들의 복음서」에서는「내일」을 의미하는「마하르」(Ma-har)라는 낱말이 씌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증언에 의하면 주의 기도문에서 말하고 있는「빵」은「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내일, 즉 미래의 양식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라는 뜻이다.

초대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해석으로는「내일을 위한 양식」은「영속적 구원시대의 양식」,「생명의 빵」,「천상의 만나」를 의미하였다. 예부터 생명의 빵, 생명수는 모두 낙원의 상징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선물과 은총을 총괄하는 비유적 개념들이다.

「내일의 양식」을 비는 이 간청은 우리의 전 생활권을 포용하는 기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영육 간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생명의 빵」을 비는 이 간청은 바로 인간생활의 성화를 비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이 간청기도 안에서「오늘」이 크게 강조되어 있고 또한 그 말이 갖는 비중 역시 대단히 크다. 굶주림과 헐벗음에 떨며 하느님을 멀리하고 이 세상에서 지금 바로 오늘 생명의 빵을 우리에게 주소서 하고 진지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깊은 신뢰와 용기를 포괄하는 신앙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가오는 날을, 필요한 그날을 위해 빵을 청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우리가 청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신 이 간청은 먼 훗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다가오는 날을 위해 필요한 것을 청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생의 끝날까지 모든 날에 모자람이 없도록 기도하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루만을 위한 것이다. 내일은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마태오 6, 34).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루가 12, 22~30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며 또한 염려하시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같이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하는가?

예수께서 이 간청기도를 가르칠 때 오늘이 큰 위기를 겪고 있던 팔레스티나의 작은 사람들을 생각하신 것은 아니다.

아주 가난한 하루 품삯꾼이 오늘 일하면 그는 그날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주인에게서 받고(마태오 20, 1~15 참조) 저녁에는 하루 품삯으로 데나리온을 지불 받는다(루가 17, 35 참조). 그것은 한 가족이 내일을 사는 데 필요한 적당량이다. 그가 품삯을 받으면 밀가루와 기름(그리고 여분으로 싼 생선도 조금은 살 수 있다)을 살수 있고 아내가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날을 위한 빵을 만들 수 있다(루가 17, 35 참조).

하지만 가난한 하루 품삯꾼이 하루 종일 시장 마당에서 서성거려도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으면 그는 삯을 받을 수 없다. 그러면 그는 어려운 처지가 되고「내일을 위한」 빵을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의 모든 걱정은 오로지「내일」에 집중될 것이고 이 가난한 하루 품삯꾼은 무엇보다도「내일을 위한」빵을 청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미 오늘 그 빵을 자기 손 안에 가지려고 조급하게 강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본래는 오늘의 어려움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내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지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그날그날 손으로 받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내일을 걱정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같이 예수는 행운을 바라는 가난한 거지들과(루가 16, 19~31: 나자로 이야기에서처럼) 그의 마지막 동전닢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와 자선과 동냥으로 그날그날 겨우 얻어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이 간청은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예수를 따르며 그분의 가난에 동참한 제자들에게 어울리는 기도이다. 예수는 그들이 가정, 소유, 직업을 떠나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필요한 빵」을 위해 미리 염려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는 그들 자신을 위한 모든 생활 걱정과 염려에서부터 그들을 불러내셨다:『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마태오 6, 36a). 오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 일하고 수고해야 하는 날이다.『하루하루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마태오 6, 36b).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적용된다:『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루가 12, 22ㆍ31).

오늘을 위해 필요한 빵을 청하게 하는 이 기도 가르침은 예수께서 아직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리고 그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 명령하셨다(마태오 10, 10 참조). 제자들은 매일 아침 그날을 위해 필요한 빵을 청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염려에 내맡겨진「거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업, 가정, 소유,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을 때 큰 모험에 뛰어든 것이다.『우리가 필요로 하는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하는 이 청은 이런 모험을 감행한 제자들의 실존에 필요한 불가분의 요소였다. 제자들은 이 청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매일을 살아갔을 것이다. 이 간청기도가 없는 추종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이 청을 입술로 되뇌이면서 모든 미래 안전을 포기하고 예수의 명령을 지키며 걱정없이 일을 할 수 있었고 또한 생활에 대한 염려조차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있었다.

◆공동체적 의미 함축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우리의」-「우리에게」빵을 청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였고 생활공동체, 식탁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돈까지 공동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가 예수와 함께 하는 생활공동체 안에서「우리의」빵을 청하는 것은「단체적인」느낌을 준다. 즉 생활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필요한 공동 생활비를 청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자신의 어려움과 함께 또한 어려움에 처해있는 다른 형제들의 공동체와 함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틀림없이 당신 제자들로부터 주의 기도문을 배운 다른 사람들까지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는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빵을 청하는 이 기도를 오직 형제들과 그리스도교회 전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이「제일 먼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인은 누구나 아버지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신뢰해야만 하고 그래서 그분 친히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생활 안정을 맡아주시기를 간청하는 동시에 자신을 불확실함과 불안전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루가 복음사가는 빵을 청하는 이 기도를 아주 가까이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상황 속에서도 맞추어 바칠수 있게 하였다. 즉「오늘」을 위해서만 필요한 빵을 하느님께 청하지 않고「날마다」주시기를 청하고 있다. 가정과 직장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오늘」빵을 청해야 할 만큼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이 나라를 그의 모든 일과 사고의 첫째 그리고 일시적인 목표로 삼은 때부터 (마태오 6, 33) 그의 삶과 생활 유지는 언제나 불확실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즐겨 이런 불안정 속에서 앞을 내다보며『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주소서!』라고 간청한다. 신앙인이 이런 표현방식 속에서 이미 미래를 위해서 하느님께 매일을 안전을 청한다면 그는 보다「더 많은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그날에 하느님이 특별한 안배의 도움의 기적을 이루시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더 적게」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간청기도의 정신

예수의 이 간청기도의 정신은 무엇일까?

1. 주님은 우리가 살기 위해「필요한」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청하지 않기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신다. 빵을 청하는 것에 욕심에서 생기는 온갖 종류의 불필요한 관심사들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은 더 원치 않으며 먹을 것이 있는 것으로만 족해 하며 살아갈 것이다. 넘치게 받았음을 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만족해 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2. 빵을 청하는 기도에서 우리는 주님의 무조건적이고 한없는 신뢰의 정신을 볼 수 있다. 이 무조건적인 신뢰는 예수가 모든 이에게로부터 언제나 요구한 그런 신앙일 것이다.『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코 14, 36)고 예수 친히 이같이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모든 기도 앞에서 드려져야 할 것이다. 주의 기도문 중 빵을 청하는 기도 앞에서『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마르코 10, 27)라는 말씀을 다만 크게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려는 모든 이에게서는 무조건적인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3.「오늘」이란 말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그날을 그 순간을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굶주림과 고통으로 인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이처럼 지금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나날을 살아간다. 그러나 새나 들에 피는 꽃들처럼(루가 12, 22~30 참조) 아버지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삶을 가능케 해준다. 물론 모든 일과 염려에서부터 자유로운 이런 파라독스한 신뢰는 오직 예수의 제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봉사에 불리움을 받은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루가 12, 31 참조). 아주 특별한 시대 안에서, 즉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표징과 권세를 체험할 수 있는 종말론적인 완성시대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예외적인 삶과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적인 가까움의 기대가 이 간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종말론적인 현재 체험이 이런 신뢰를 가능케 해준다.

예수는 우리에게 오늘을 위해 필요한 빵을 청하는 가르침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수준 높은 학원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우리는 이 학원에서『예수의 정신』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의 기도학원은 생활학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하고 예수의 정신 안에서 성장해야만 할 것이다.

◆인생의 충만 상징

주의 기도문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나 동기, 또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우리와의 생활관계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주의 기도는 대단히 사려 깊은 기도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것 때문에? - 많은 사람들과 서로 다른 생활 처지들을 포괄하는 시대를 초월한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개별적인 동기나 구체적인 사건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언제나 포괄적인 관계성 안에서 포함되어 있고 그릇된 방법으로 개별화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의 기도에 구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마치 한 지붕 아래처럼 삽입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이 간청은 일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우리가 기도 중에 하느님과 이야기할 때면 포착할 수 없는 저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벌거벗은 이 세상 삶에 관해서 그리고 삶 전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빵은 오직 생의 일반적인 상징만이 아니라 동시에 빵만이 모두에게 가능케 하는 평화의 질서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지금도 굶어 죽어가는 이들은 그 얼마나 많은가!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라도 이 세상은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 세상의 변화를 희망하는 것이 곧 기도의 내용이어야 하며 또 한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오직 빵으로만 살지 않고 동시에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신명기 8, 2~3)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배고픔을 말씀으로 달랠 수 없고, 모든 종류의 배고픔을 또한 빵으로만도 달랠 수 없다. 그러나 배고픈 자에게 빵이 없다면 그는 죽는다. 인간은 육신과 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은 육체를 위한 양식 그 이상이다. 빵은 곧 생의 충만의 상징인 것이다.

정하돈 수녀·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