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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표류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8-04-17 수정일 2018-04-17 발행일 2018-04-22 제 309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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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0월 제가 특전사에서 근무할 때, 해군 상륙함은 60여 시간을 항해한 후에야 특수대원들의 침투훈련을 위해 동해 앞바다에 정지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파고(波高)로 하선하지 못하고 24시간 이상을 긴장감 속에서 롤링(rolling)하는 상륙함과 함께했습니다. 장병들은 풍랑과의 사투에서 온몸의 모든 부산물을 게워냈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함장과 대대장은 드디어 하선을 결정했습니다. 해군 상륙함정의 육중한 철문이 내려지자, 특수대원들을 태운 모터보트는 성난 파도가 으르렁대는 어둠 속으로 한 척 한 척 사라졌습니다. 우리 팀의 하선 순서가 되자, 팀원 모두가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차디찬 바다로 미끄러지듯 내려갔습니다. 함정과 충돌하지 않을 안전거리에 도달했을 때, 한숨을 돌리며 모터를 내리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함상에서는 전혀 이상 없던 모터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동해바다 물살은 얼마나 세던지 대원들이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보트는 점점 본대와 멀어졌고, 설상가상으로 한 대원이 노를 바다에 빠트렸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대원들은 불안에 떨며 팀장인 저만 바라봤습니다.

‘동해바다에서 표류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불길함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질책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대대장에게 무전을 쳤습니다. 하지만 대대장은 상황의 급박함을 아는지 ‘걱정하지 말라’는 따뜻한 위안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비상 불빛신호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한 후, 예인 보트를 보내줬습니다.

표류는 바다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인생살이에도 때론 거센 폭풍우와 비바람이 불어 닥치곤 합니다. 이럴 때는 삶의 방향을 잃고 부초처럼 흘러갑니다. 1997년 초 소령으로 육군대학을 수료하기 직전 또 다시 강원도 오지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가슴에서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어떤 장교는 한 번도 가지 않는 오지에 또 다시 가라는 불공정한 인사에 실망했고 배신감까지 들었습니다.

분노의 마음에 민간 항공사를 경영하는 선배를 찾았습니다. “나야 이 소령이 온다면 좋지. 그런데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새로운 임지에 가서 한 달만 근무해 보고 다시 와”라고 달래줬습니다. 선배의 지혜로운 조언 덕분에 표류하던 제 인생항로는 깜깜한 밤바다에서 등대를 만난 것처럼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표류는 일생일대의 위기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비가 교차하는 속세에서 순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그 답을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아침마다 성체조배를 하며 혼돈의 사춘기 아들딸을 위해 기도했고, 진급을 목전에 두고 업무의 압박감과 상급자의 까탈스러움을 담담히 받아 넘길 수 있었으며, 인간적인 오욕(五慾)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곧 인생살이의 표류에서 저를 이끌어 준 예인선이었습니다.

장병 여러분! 교형자매 여러분! 삶이 표류 중입니까?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십시오. 매달리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