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한반도 평화 기원 유럽 순례 (중) 독일 평화 순례 여정

독일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8-06-04 수정일 2018-06-05 발행일 2018-06-10 제 3098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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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도 못 꺼트린 기도회 촛불… 통일 밑거름 되다
-그뤼네스 반트
동·서독 갈랐던 비무장지대, 생명과 평화의 땅으로 탈바꿈
총 겨누던 곳에 산책길 조성 역사 현장 안내판 등 설치
-석방거래
서독 정부와 교회, 동독 지원 물질적 교류와 나눔 매개로 끊임없는 소통의 기회 다져
-평화기도회
동독 개신교 성 니콜라이교회 1982년부터 매주 평화기도회
동독 정부가 교회 탄압했지만 교회활동과 발언권 등 얻어내

70년 넘게 갈라져 지내온 북녘 땅은 또 230여 개 크고 작은 단위 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북한 주민에게는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여행한다는 것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남녘 땅을 밟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반도와 같이 분단을 체험한 동·서독은 냉전이 격렬하던 1964년부터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오갔다. 비록 은퇴한 연금생활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4주간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체제나 이념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으로 평화를 한껏 누렸다. 그들이 쐰 평화의 바람은 훗날 통일 독일의 미래를 맞아온 마중물이 됐다.

독일 중동부 뫼들라로이트(Mödlareuth) 마을에 조성된 ‘그뤼네스 반트’는 과거 동·서독 분단시절 한 민족 한 형제이면서도 오갈 수 없었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지금도 동독 군인들의 눈초리가 느껴지는 감시탑이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 들려주는 듯하다.

■ 죽음의 선에서 생명의 선으로… ‘그뤼네스 반트’를 찾아

무거운 구 동·서독 분단 역사를 따라가던 평화 순례단의 발걸음은 독일 중동부 튀링겐 주와 바이에른 주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 뫼들라로이트(Mödlareuth)에서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50가구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분단 시절,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독으로 갈라져 살아야 했다. 지척에 보이는 친척집을 방문하려면 개천 위 다리가 아니라 100㎞가 넘는 길을 돌아가야 했다.

5월 17일 순례단이 찾은 뫼들라로이트를 둘러싼 ‘그뤼네스 반트’(Grünes Band)에서는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독일어로 ‘녹색 띠’라는 의미를 지닌 그뤼네스 반트는 과거 동·서독을 가르던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곳에 조성된 생태축. 서독으로의 탈출을 막으려고 설치한 철조망과 감시탑 등의 잔해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어 이곳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死線)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서를 나누던 분계선으로 인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이 지역 자연은 수십 년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돼 멸종 위기에 처한 수많은 희귀 동·식물류 1000여 종이 서식하는 생명의 못자리가 됐다.

그뤼네스 반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과거 죽음의 선이었던 동·서독 군사분계선 지대가 화해와 평화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길이만, 한반도를 나누고 있는 DMZ 248㎞의 다섯 배가 훨씬 넘는 1393㎞에 달한다. 폭은 5~10㎞정도인 우리 DMZ에 비해 50m에서 가장 넓은 곳도 200m 정도밖에 안 돼 군사분계선 건너 마을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다.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이곳이 오늘날 죽음의 전장에서 부활의 상징으로 거듭나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자연보호구역이 되기까지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밑거름 됐다.

그뤼네스 반트가 평화의 기념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서가 아니다. 그뤼네스 반트는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인 1975년 7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소속 환경운동가들이 독일에서 가장 큰 환경단체 중 하나인 ‘분트’(Bund für Umwelt und Naturschutz Deutschland)를 창립하면서 이미 시작됐다. 분트는 1989년 12월 동·서독으로부터 모인 400명의 환경운동가들과 바이에른에서 첫 번째 독일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그뤼네스 반트’의 이름과 개념이 탄생했다.

분트는 그뤼네스 반트 프로젝트 일환으로 정부 등과 협력해 2007~2010년 사이 과거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모든 구간에 산책길을 조성해 누구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또, 1134㎞ 길이의 자전거 도로를 조성하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그뤼네스 반트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연령대별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생태 환경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또한 그뤼네스 반트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는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고 안내소를 설치해 과거 아픈 역사와 함께 잘 보존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관광상품 등을 마련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과거 분단과 냉전의 상처로 얼룩졌던 땅은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생명과 평화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나아가 분트는 광범위한 현장조사와 홍보활동 등을 통해 철의 장막이 녹색 생명의 띠로 변했음을 널리 알려나갔다. 이런 활동은 유럽 전체로 파급돼 2003년 유럽 그린벨트 협력 사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독일 정부의 자연보존을 위한 정책들이 2010년 다른 여러 나라들에까지 확산되면서 자연보호를 위한 다양한 기관들이 생겨나는 결실을 맺었다.

이처럼 그뤼네스 반트의 변신은 한반도에도 DMZ를 통해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중단 없는 나눔이 일군 화해·통일

광장에서 바라본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교회. 성 니콜라이교회에서는 1982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평화기도회’가 열려 통일 독일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통일이 언제 될지 아무도 몰랐다.”

독일이 통일되는 그날까지 동·서독 국민 누구도 갑작스럽게 닥칠 통일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통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었다.

서독 정부는 잠시도 중단 없이 동독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관된 정책을 펼쳤다.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동·서독을 가르던 경계선도 ‘국경’이 아니라 ‘군사분계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동독 주민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함께해야 할 ‘한 형제’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서독이 통일 미래를 준비하며 벌인 정책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 ‘석방거래’(Freikauf) 사업이다.

서독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1963년부터 통일되기 직전인 1989년까지, 1인당 평균 8000마르크(DM)를 주고 모두 3만1775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이 정책을 ‘교회사업 B’라고 부른다. 서독 정부가 예산을 지출하되, 동독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대리자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 총 23.7억 마르크의 엄청난 재정이 소요됐다.

‘교회사업 B’에는 이산가족을 동독에서 서독으로 영구 이주시키는 사업도 포함됐다. 이 사업에는 ‘석방거래’ 보다 훨씬 적은 예산이 들어갔다. 같은 기간 총 85만5130명의 이산가족을 서독으로 이주시켰다. 이 정책에는 10.9억 마르크의 재원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9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자유를 찾았던 것이다.

이처럼 분단 시기 서독은 동독 지역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서독이 동독에 건넨 지원액은 물자와 돈 등을 합해 총 219억 마르크(약 100억 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서독 정부가 지원한 내용을 보면 동서독 간 교통, 우편, 전화 등의 이용금에 83억 마르크, 동독지역 도로공사 분담금으로 23억 마르크, 교회사업 B에 34억 마르크 등 141억 마르크를 철저히 인도적인 목적에 썼다.

‘교회사업 A’는 서독교회가 동독교회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주는 정책이었다.

‘교회사업 A’에는 서독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28억 마르크를 지출했다.

이 부분은 향후 남북 간 교류 협력에 있어 시사하는 면이 적지 않다. 비록 물질적 교류와 나눔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끊임없는 만남과 이를 바탕으로 한 소통이 평화와 통일을 향한 길을 다져나갈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룬 평화·통일 - 우리는 한 민족(Wir sind ein Volk!)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그리스도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동독 개신교회는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어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니콜라이교회는 동독 사회에서 교회 위상을 보여준다. 성 니콜라이교회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이사 2,4)라는 슬로건 아래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의 촛불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동서독 간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평화기도회’를 이어갔다.

교회 이름 아래 이런 모임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동독 사회에서 독특한 교회 위상 때문이었다. 동독교회는 1948년 구동독 튀링겐 주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결성된 독일 최대 개신교회 연합체인 독일교회연합(EKD)에 가입한다. 이는 독일의 분단 상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동독 정부가 교회 탄압정책을 펼쳤지만 인구 90% 이상이 그리스도인인 상황에서 실효를 거두기 힘들었다.

동독 정부는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신뢰를 계속 무시만 할 수 없었다. 1978년 당시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알브레히트 쇤헤르 EKD 의장 회담 이후 동독은 교회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가 사회·정치 문제들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그 대표적인 곳이 성 니콜라이교회였다.

1989년 10월 9일, 역사적인 날이 닥쳤다. 평화기도회가 계속되면 유혈 진압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날 성 니콜라이교회에서 열린 ‘평화기도회’에는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이 평화와 인권 신장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한 후 교회 밖으로 나섰을 때 교회 밖 광장에는 7만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었다. 평화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여행의 자유’를 요구했다.

드디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평화 시위 구호는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 그리고 ‘우리는 한 민족’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평화 순례 첫날인 5월 15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을 방문한 순례단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데나워 재단은 독일뿐 아니라 한국 등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가고 있다.

독일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