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금기(禁忌)

이연세 (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8-10-23 수정일 2018-10-23 발행일 2018-10-28 제 311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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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어머니의 생신을 맞이해서 아내가 미역국 끓일 재료를 준비합니다. 미역국을 생각하니 1985년 8월의 어느 날이 또 떠올라 웃었습니다. 어머니는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해 정성껏 아침 밥상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소고기를 듬뿍 넣고 먹음직스럽게 끓인 것이 미역국이었습니다. 바빴던 어머니는 아들이 조종사 시험을 보러 간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지요. 시험과 미역국! 이 금기를 어긴 어머니는 수십 년 동안 아버지의 조롱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13일의 금요일은 조종사들이 금기로 여기는 날입니다. 요즘은 퇴색됐지만 2000년 이전만 해도 13일의 금요일에는 비행을 자제했었습니다. 조종사들에게 비행 요주의 날로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어떤 조종사는 13일의 금요일에 항공기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면서 비행임무를 피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기에 당연히 부대에서도 지시 임무나 작전비행을 제외하고는 임무를 편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종사와 정비사들은 지상근무나 운동을 하면서 하루를 유쾌(?)하게 보내곤 했지요.

조종사들 중에는 징크스나 속설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 전 단추가 떨어지거나, 부주의로 유리잔을 깨트렸거나, 전날 밤 악몽을 꾸었다면 ‘혹시 오늘 사고 나는 것 아닌가?’라는 불길한 생각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항공기 사고 모습을 떠올리며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금기 따위를 믿지 않는 조종사도 있습니다. 2000년 5월말, 교관조종사가 되기 위한 최종평가를 받을 때였습니다. 항공기 점검을 완료하고 조종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믿음이 독실한 비행평가관이 “이 소령님! 기도하겠습니다”라며 조종간을 잡은 제 손을 부드럽게 감쌌습니다. “오늘 이연세 소령이 평가를 받습니다. (중략) 안전비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비록 몇 분간의 짧은 기도였지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불합격하면 어떡하나, 비상착륙 훈련 중 항공기 사고가 발생하면 안 되는데…’라는 불안과 초조감이 순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평가관이 고마운 한편,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 비행을 할 때면 성호경을 긋고 기도를 했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인간 세상에는 금기나 미신이 넘쳐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임마누엘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굳은 믿음이 곧 안전비행으로 가는 첩경인 것을 우리는 간과하고 지낸 것이지요.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11) 아멘!

이연세 (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