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김수환 추기경이 염원한 ‘평화’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9-03-12 수정일 2019-06-21 발행일 2019-03-17 제 3136호 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평화는 이웃과의 화해로부터 시작된다”
평화나눔연구소 ‘김수환 추기경과 한반도 평화’ 세미나
평화 실현하는 바탕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
‘정의실현·인권존중·비폭력 사상’ 따른 대화·타협 강조
남북 화해 이전에 남남 화해부터 이루는 것이 급선무

“동포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이기심으로 어떻게 통일을 이루겠습니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이기심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진정한 통일을 원한다면 주변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강조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가 결렬되면서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져 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정세덕 신부) 부설 평화나눔연구소(소장 최진우 교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김 추기경의 화해와 나눔, 평화 정신에서 찾았다. 평화나눔연구소가 ‘김수환 추기경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마련한 기념세미나는 3월 8일 오후 1시 서울 명동 교구청 강의실에서 열렸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설 평화나눔연구소가 3월 8일 서울 명동 교구청 강의실에서 진행한 기념세미나에서 발표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 평화는 정의의 실현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통일만을 부르짖던 당시 우리 사회에 선도적으로 민족의 화해에 대한 필요성과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인권회복과 정의구현으로 시작해 한반도 평화로 이어지는 김 추기경의 ‘평화 실천’은 그가 여러 차례 언급한 한반도 화해와 평화에 대한 가르침에 기반하고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추기경은 이 가르침을 ▲정의의 실현 ▲인권의 존중 ▲비폭력 사상 등 3가지로 정리했다.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 언급된 내용처럼 평화를 정의의 실현으로 해석했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도, 적 세력 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니라고 말했다. 정의란 존엄한 인격체로서 서로가 올바른 관계에 서서 의롭게 산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곧 평화라는 말이다.

또 인간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평화의 출발점이자 정의실현의 전제조건이라고 제시했다. 특히 한반도 평화는 이데올로기나 군사, 경제 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남북통일 역시 단순히 영토를 합치는 차원이 아니라, 갈라져 사는 동포들의 마음을 열고 서로 믿고 사랑하는 관계를 만드는 문제로 바라봤다.

아울러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일체의 폭력을 거부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 그 자체이며, 자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했고 폭력은 일절 쓰지 않았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염 추기경은 “김 추기경님께서 강조하셨던 비폭력 그리고 대화를 통한 평화를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면서 “평화는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룩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 국제관계 안에서 흔들리는 평화

김 추기경은 국제관계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의 가르침에 따라 이 땅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반도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전망해 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북미관계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발표한 황지환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과거나 현재나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둘러싼 딜레마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원인은 한반도 위기의 근원에 대해 북미 사이에 인식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며 “한반도 평화에 대한 북미 간 개념 차이도 평화체제 달성을 어렵게 해 왔다”고 분석했다.

이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갖고 있는 각각의 평화 개념을 소개했다. 황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거의 모든 전략은 기존에 미국이 취하던 민주주의 가치보다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미국 우선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발표했다. 미국 우선주의 관점은 미국에게 이익이 된다면 다른 어떤 가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미국식 평화 개념이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개념은 ‘병진(竝進) 평화’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의 병진노선은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을 함께 진행하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병진노선에 입각한 북한의 평화개념은 핵무기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으로, 핵무기에 입각한 평화 개념을 뜻한다.

황 교수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접근이 조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며 “우리 관점에서는 북한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이 병진평화를 넘어 경제평화의 접근법에서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향후 진행되는 협상에서 어떤 평화개념을 만들고 합의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가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호철 인천대학교 중국연구소 소장은 비핵평화 프로세스에 대해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지난 20여 년간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모호했다”며 “중국은 자국의 지정학적 안보이익을 실현하려는 목표에 집착하지 말고,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염수정 추기경(앞줄 가운데)을 비롯해 정세덕 신부(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최진우 교수(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평화나눔연구소 기념세미나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평화 통일

“통일은 그것이 평화통일일 때, 이 통일은 반드시 우리가 동포로서, 또 인간으로서 남을 위하고 사랑할 줄 알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통일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우리끼리 먼저 화해하고 일치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말씀을 통해 본 평화’를 주제로 발표한 신정환(토마스)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김 추기경 전집 내용을 소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김 추기경의 평화 개념은 통일론으로 확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 교수는 이러한 추기경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통일의 길은 갈수록 요원해 보인다고 우려를 드러냈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관용이 사라지고 갈수록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민주주의의 유린 ▲비인간화 ▲우리 사회 내의 사회적 갈등 등 김 추기경이 통일을 저해하는 내부적 요인으로 지적한 3가지를 소개했다. 김 추기경은 남북 화해 이전에 남남 화해를 먼저 주문하면서 우리 사회 내의 무수한 장벽들부터 무너뜨리자고 호소했다. 그래야만 남북 간의 군사적 장벽, 이데올로기 장벽 그리고 마음의 장벽을 비로소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이를 위해 제일 먼저 우리가 할 일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이웃과 먼저 손을 잡는 것”이라며 “김 추기경의 통일관은 궁극적으로 일반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제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혹한의 계절에 40만 명을 넘어 선 김 추기경의 조문 행렬에서 희망을 봤다”며 “우리 교회가 김 추기경의 정신을 바탕으로 환대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운동을 주도해서 펼쳐나갔으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한 김환영 중앙일보플러스 대기자도 “김 추기경의 가르침은 한반도 평화와 평화통일로 가는 데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교회의 유산”이라고 밝혔다.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