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잔인한 평화 / 성슬기 기자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9-04-30 수정일 2019-04-30 발행일 2019-05-05 제 314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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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판문점선언 1주년을 맞은 지난 4월 27일 강원도 철원 월정리역 평화문화공원에서 봉헌된 6·25전쟁 희생자의 영혼을 위한 추모미사에서 춘천교구 포천본당 주임 오세민 신부는 이 시를 인용하며 강론을 시작했다.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쟁은 잔인하다. 평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눈앞의 이익만 챙기는 인간의 탐욕과 무지는 더 잔인하다. 그러나 그런 죽음과 절망조차 이겨내고 생명이 돋아나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지난해 4월이 그랬다.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과 북은 지난 10여년간 막혔던 대화의 물꼬를 텄다. 교회 안팎에서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최근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남북관계도 영향을 받고 있다. 4·27 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행사도 북측이 불참하며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반쪽 행사’로 치러졌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판문점선언 1주년 축하 메시지에서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노력으로 조화로움과 화합을 추구함으로써 분열과 반대를 극복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탐욕과 무지에서 벗어나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