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찬란한 일상

서강휘 신부rn(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입력일 2019-04-30 수정일 2019-04-30 발행일 2019-05-05 제 314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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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제1독서(사도 5,27ㄴ-32.40ㄴ-41) 제2독서(묵시 5,11-14) 복음(요한 21,1-19)

“군자의 도는 이처럼 밝으면서 동시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 쉬움으로 치자면 부부간에서도 드러나지만 그 지극한 데 이르러서는 성인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의 말이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삶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이때 도와 일상이 서로 긴장감을 가지고 교차한다. 도는 일상 안에서 구현돼야 하고 일상을 통해서 드러나지만 그 깊은 의미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찬란하고 초월적이다. 일상과 초월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중용이란 두 점 사이의 중간지점이 아니라 일상과 초월이 만나는 현장이다. 일상이 초월화되고 초월이 일상화되는 찬란한 평범함.

오늘은 부활 제3주일이다. 매년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부활을 맞이하지만 그것은 단지 교회 전례 안에서 일뿐 나의 평범한 삶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성탄은 그에 비하면 조금은 현실적이다. 추운 겨울과 하얀 눈 그리고 산타, 교회에서가 아니더라도 자본과 만난 연말연시의 성탄은 설렘과 기대라는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부활은 초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과거의 사건에 한정돼서인지 진정으로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죽음이 있고 나서야 부활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수고스러울 뿐 아니라 나는 사순 시기 죽음을 체험했는가를 되묻다 보면 언제나 제자리인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하게 된다. 탄생이 인간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에 비해 부활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죽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어렵다.

우리의 체험과 먼 그래서 초월적인 이 부활은 하나의 분열을 낳았다. ‘부활을 기뻐해야 한다’는 강박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의 괴리다. 인간의 감정만큼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것이 없는데 ‘해야 한다’는 당위로 감정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 그럼에도 우리들의 부활은 기뻐해야 한다는 감정의 범주에 어느새 구속돼 버렸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활체험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무엇이 문제일까.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기쁘게 선포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법정 앞에 세웠다. 오늘 독서의 대사제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느냐”며 제자들을 몰아세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고 제자들이 일을 꾸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했는데 그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예수보다는 더 찬란해야 하며 더 위대해야 하고, 상상 이상의 존재여야 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초월을 일상과 분리시키고 율법의 준수를 강조해 살아 있고 인격적인 하느님을 살해시켰다. 그들의 일상이란 초월하신 하느님이 빠진 계산적이고 인과적인 삶의 연속이며 그들에게 초월이란 당면한 현실보다 언제나 화려해야 하는 신기루다.

그들에게 살해된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서 새롭게 부활된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묵시 5,12)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이다. 유다의 지도자들, 아니 어쩌면 우리들의 편견으로 매장당한 평범한 일상과 그것에 담겨 있던 초월을 하느님은 다시 일으키셨다. 그 일상이란, 누군가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려야 하는 작지만 위대한 생명, 어린양이다. 초월과 일상이 만나는 지점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초라했던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는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으로 비춰진다.

라파엘로의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기는 그리스도’.

오늘 복음은 부활에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던 우리에게 또다시 당혹스러움을 안겨 준다. 부활에 관계된 이야기가 너무나도 평범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오늘의 부활 이야기는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과 만났던 기억들을 고스란히 소환해 내고 있다.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여 제자가 되게 했던 만선(滿船)의 추억,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무작정 물로 뛰어든 베드로의 단순함, 5000명을 먹이신 빵과 물고기의 풍요로움, 마지막 만찬 상에서의 기억,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배신 등이 오늘 복음 안에서 오마주 된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적은 평범한 과거의 일상(日常)들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렴풋했던 그분의 신원이 부활 사건으로 명백해지면서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했던 초월적 사건으로 다시금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은 특정 인물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일회적 사건을 지시하거나 죽어야 부활한다는 메마른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평범한 일상, 잿빛 기억으로 소멸해 갈 것 같았던 삶 전체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어린양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했고, 함께했던 매일의 삶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또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과 찬미를 받을 수 있는 초월이며 부활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주신 것은 일상의 소중함인지도 모른다. 그렇고 그런 누군가의 건조한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인 ‘나’로 부활하는 것. 나의 육신뿐 아니라 나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찬란한 의미로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의 기쁨은 그것을 알아차림으로 인해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닐까?

얼마 전 종영했던 한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에 부는 달콤한 바람…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서강휘 신부rn(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