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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조성만과 한반도 평화 / 이원영

이원영(프란치스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입력일 2019-05-07 수정일 2019-05-07 발행일 2019-05-12 제 314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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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돌아왔다. 우리 현대사에서 5월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39년 전, 신군부가 등장한 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에 대한 군부의 모진 탄압과 시민의 저항은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사회적 상황 혹은 환경의 지속과 변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정치학 이론 중 하나인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에서 사회적 변화의 결정적인 사건 혹은 시기를 표현하는 ‘중대한 분기점’(critical juncture)이라는 용어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적 변화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 혹은 시기를 뜻하는 용어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의 모태가 됐으며, 결국 우리 사회는 ‘민주화’(democratization) 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점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 공고화에 ‘중대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 5월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중대한 분기점’으로 다가온다. 1988년, 명동성당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요구하면서 스스로 민족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던진 조성만(요셉)의 투신 사건이 그것이다. 필자는 그의 죽음이 한반도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중대한 분기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의 죽음으로 1960년 4·19 혁명 이후 등장했다 스러졌던 ‘통일 운동’이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서 되살아났으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가 사회운동의 새로운 담론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후 1991년, 남북한 정부 사이에서 ‘남북 사이의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됐으며, 1992년 제1차 북핵 위기가 발발했지만 1994년 북미 간 ‘제네바 합의’가 타결된 이후 2000년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2018년, 조성만의 30주기를 맞아 서울대교구 유경촌 주교는 추모미사 강론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사제가 되기를 꿈꿨던 조성만에 대해 “시대와 민족의 아픔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고 살고자 했다”는 삶의 태도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고뇌와 자기 성찰을 잃지 않고 스스로 청빈을 선택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했던” 신앙적 자세를 언급했다. 아울러 “조성만 형제가 열망했던 우리나라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리고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할 몫이 여전히 중대하다”고 말했다.

올해 조성만의 31주기 추모미사가 5월 15일 오후 7시30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예정돼 있다. 31년 전,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조성만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십시오”(2티모 2,22)라는 말씀을 떠올려 본다. 작더라도 한반도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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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프란치스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