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85) 천상의 기쁨(하)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9-05-14 수정일 2019-05-14 발행일 2019-05-19 제 3145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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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넷째 날, 캠프장 신부님은 하루 종일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그 바람에 나 또한 하루 종일 세쌍둥이와 지냈습니다. 그날은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며, 아이들 곁에 머물면서 이 아이들이 마치 내 자녀인 듯 돌보았습니다. 캠프 중에 아이들 모두가 다 물을 너무,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캠프 넷째 날에는 프로그램을 변경하고 하루 종일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 원 없이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물놀이를 끝내고, 샤워장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나의 역할은 당연히 샤워기 줄만 잡고, 아이들이 씻는 부위에 이리저리 물만 잘 뿌려주면,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샤워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샤워장으로 들어갔는데…. 아이쿠! 바뀐 수영장의 샤워장에는 줄이 달린 샤워기가 아니라, 사람 키보다 높은 벽에 고정된 샤워기가 있었습니다. 속으로 ‘저 샤워기 부스를 잡아 뺄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다…’라며 난감해했습니다. 그런데 세쌍둥이는 한꺼번에 옷을 벗더니, 내가 있는 그 좁은 샤워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명씩 한 명씩 샤워를 시킬 생각이었는데, 순간 당황하였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겉옷을 벗고, 속옷 바람으로 아이들과 함께 좁은 샤워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 물을 트니, 샤워기에서 따스한 물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한 명씩 한 명씩 머리를 감긴 후 등에 비누칠을 해 주려는데! 그런데 따뜻한 물이 흐르는 샤워기 앞에 선 세 아이가 갑자기 흥얼-흥얼, 웅얼-웅얼 노래를 불렀습니다. 해맑아도 저렇게 해맑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놀랐습니다. 세 아이들은 그 좁은 샤워장 안에서 춤까지 추며 가사를 알 수 없는 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것입니다. 특히 한 아이는 나의 튀어나온 배가 북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배를 찰싹찰싹 치면서 허공인지 천정인지를 바라보며 웃으며 노래했습니다.

세쌍둥이 얼굴이 너무나 똑같았기에, 얼굴의 미세한 차이조차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한 명 한 명 머리를 잘 감긴 후, 등에 비누칠을 해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행복했는지 샤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따뜻한 물을 맞으며 3부 합창인 양 혹은 아카펠라를 하는 듯 한바탕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 명씩 다 씻긴 후 수건으로 머리랑 몸을 닦아 주고, 준비한 옷을 갈아입힌 후 샤워실 밖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세 명을 다 보낸 후, 나 혼자 덩그러니 따뜻한 물이 흐르는 샤워기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휴…, 이제 다 했다’라는 중얼거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멍하니 따뜻한 물이 떨어지는 샤워기 앞에 서 있는데,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성가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순간, ‘아, 내가 좀 전에 천국의 한 장면을 본 건가…, 이 느낌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하루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난 후, 따뜻한 물이 흐르는 샤워기 앞에 서서 그냥 좋아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 배를 큰 북인 양 치고 노래하며 춤까지 추던 세쌍둥이의 모습. 지금 생각해 보면, 천국을 맛보게 해 준 그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잊혀 지지 않는 명장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최선을 다했는데, 원하는 만큼의 반응이나 결과가 나오지 않아 힘들거나 지쳤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란 놀라운 성취감이나 혹은 뭔가 대단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 때에만 주어지는 감정 반응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하루를 단순하고 평범하게 지내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그저 따스한 물에 샤워하면서, 순간을 즐기며 기뻐할 수 있다면 그건 천상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듯합니다. 그래서 문득 기쁨이란 내가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