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달의 뒤편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입력일 2019-05-28 수정일 2019-05-29 발행일 2019-06-02 제 314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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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제1독서(사도 1,1-11) 제2독서(에페 1,17-23) 복음(루카 24,46-53)

“등 긁을 때 아무리 용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장옥관 시 ‘달의 뒤편’)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그래서 그랬을까. 공자는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고 해서 하늘을 무시하거나 외면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언어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을 뿐. ‘알고’ ‘모르고’는 지극히 언어적인 것에 속한다. 정말 아는 것이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하는 데 있다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모르는 것’이란 나에게서 소외된 것이나 그것으로 나의 무식이 탄로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 주는 지평 혹은 배경 같은 것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언제나 함께한다.

시인의 표현처럼 내가 모르는 달의 뒤편인 내 얼굴, 내 눈동자, 귀뚜라미 울음은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얼굴, 너의 눈동자, 귀뚜라미의 날갯짓과 언제나 함께하며 그것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 배경 없이 어떻게 너의 얼굴과 너의 이름과 너의 눈동자를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까운 것들은 실은 나에게서 늘 감춰져 있다. 내 눈동자나 얼굴은 나에게 있어서는 언어로 포착돼야 할 메마른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아가신 것이다. 우리 앎의 영역에서 사라지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는데 교회는 오늘을 홍보 주일로 지낸다. 더욱 열심히 복음을 홍보하고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다. 알려져야 할 분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신 날을 홍보 주일로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신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거나 혹은 우리를 완전히 떠나갔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승천은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내 얼굴이나 눈동자 혹은 내 자신이 내게서 감추어지듯이, 내게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감춰지셨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사라짐으로 인해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것, 내 자신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성령 강림을 통해 현실이 된다.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그리스도의 승천’.

사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나보다 항상 나와 더 가까운 분이셨다. 너무나 가까워서 내 눈동자가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느님의 계시는 나에게 달의 뒤편에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십사 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나는 가끔 나를 포기하거나 미워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적이 없으셨다. 그분의 한결같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기적,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됐다. 그에 비해 내가 ‘나’라고 믿는 것은 단 한 번도 일관성을 유지한 적이 없어 보인다. 장자가 호접몽(蝴蝶夢)을 통해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 내가 나인지 헷갈려 하듯 우리는 내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다가도 자랑스러워하고 만족스러워하다가도 혐오한다. 그리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의아해하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나인가, 바라보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나인가? 이러한 물음은 끝없이 이어진다. 무한히 확장되는 나의 총합이 나라면 그것은 일종의 분열증세지 실상은 내가 아니다.

사실 내가 나라고 믿고 있던 것은 나를 확인해 줄 수 없다. 나라고 할 수 있는 일관된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나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일관된 어떤 것에 기대야 하고 기대야 할 어떤 존재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 일관성이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신약의 모든 내용은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일관된 사랑 고백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내가 돼야 할 나의 미래다. 그렇다면 나와 하느님 가운데 누가 나와 더 가까우며 누가 더 나다운가? 하느님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은 그분이 나와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오히려 반증해 준다. 그래서 승천을 통한 예수님의 사라짐은 우리에게서 멀어짐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워졌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복음서의 끝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새로 시작된다. 사도들의 시대, 교회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영영 떠나가셨는데도 불구하고 크게 기뻐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복음 말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이 그들에게서 떠나가시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린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을 떠나보내고도 그렇게 ‘크게 기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눈에서 사라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으로 돌아오셨다. 이제 그들 자신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나의 달 뒤편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복음 선포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이라는 앎의 대상, 그 이름에 한정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배경이 되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이어야 할 것이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