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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물레방앗간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다 / 윤민구 신부

윤민구 신부 (원로사목자)
입력일 2019-06-03 수정일 2019-06-04 발행일 2019-06-09 제 314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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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왕권을 제한하고 여러 계층의 특권을 폐지하는 등 국가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불행하게도 이때 교회도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혁명의 초기 단계일 때 하급 성직자들인 교구 사제들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를 끊고 제3신분 계층과 합류하면서 혁명에 적극 협조했다. 하지만 프랑스 의회는 1790년 7월 12일에 ‘성직자 공민법’을 통과시키고 모든 성직자에게 이 법에 따른다는 서명을 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이 법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항이 있었다. 특히 주교를 교황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10명으로 구성된 수도 대주교좌의 주교들이 결정한다. 임명된 주교는 신앙의 통일성의 표시로 교황에게 서신으로 보고만 하면 된다’는 조항은 교황청의 반대를 초래했다. 결국 비오 6세 교황(재위 l774~l799)은 1791년 교황 교서를 통해 이 법은 이단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으니 성직자들은 절대로 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미 서명한 성직자들은 40일 이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성직 정지 처분을 내릴 것이며, 이 법에 따라서 주교에 임명된 주교들은 모두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의회는 맞불 작전을 폈다. 서명에 불응하는 성직자들은 15일 안으로 프랑스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림과 동시에 수많은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결국 약 4만 명의 성직자가 조국을 떠났다. 조국을 떠나지는 않더라도 서명을 하지 않은 성직자들은 ‘불법 신부’가 돼 자신이 맡고 있던 성당이나 사제관에서 떠나야 했다. 이들에게 성직 수행은 곧 불법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796년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마리냔느에서 앵베르가 태어났다. 후에 앵베르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주교가 됐고 조선대목구 제2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돼 1837년 말 우리나라에 입국해 활동했다. 그의 우리나라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으로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때 순교했으며 103위 우리나라 성인 중 한 분이 됐다.

하지만 앵베르의 생애 시작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의 본당 신부는 앞에서 말한 프랑스 의회의 법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 신부’가 돼 성당과 사제관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됐다. 아기의 부모는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도 본당 신부에게 세례를 청했고 본당 신부는 자기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그러나 세례 장소는 성당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아기의 부모와 본당 신부는 밤에 동네에 있는 물방앗간에서 은밀히 만났다. 그리고 아기에게 라우렌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줬다.

이렇게 어렵게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앵베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생각을 갖게 됐다고 「기해일기」에서는 말하고 있다. 7세가 됐을 때 이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이 다음에 나는 먼 나라에 가서 전교해 수많은 영혼을 구하리라”는 꿈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유아세례에 대해 부모에게서 듣고 신앙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루어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윤민구 신부 (원로사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