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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하느님 백성과 시민의식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rn(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9-06-11 수정일 2019-06-11 발행일 2019-06-16 제 314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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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는 불안정한 국면이 지속되면서 ‘촛불과 맞불’의 갈등이 계속되고 ‘혐오 발언’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삶에 불확실한 난관이 많을 때, 우리는 자기만의 경험이나 신념에만 묶이곤 하지요. 특히 정치문제에 관해서 그렇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들이 자기의 의견과 주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헌법에 보장돼 있지만 그 주장이 과연 참되고 온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하고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실, 현대사회의 민주주의는 왕이 홀로 통치하던 군주제도의 비인간적 억압과 착취에 대항해 시민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형성돼 왔습니다. 그렇기에 현대사회에서 ‘시민(市民)의식’은 역사의 진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해 왔으며 ‘자유와 평등,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이와는 달리, 과거 역사의 유물에 천착해서 제왕적 국가가 주입한 이데올로기, 냉전과 반공이념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구시대적 과오의 틀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신민(臣民)의식’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시민의식과 신민의식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유 차원에서 ‘진리와 진실’을 따르는가? SNS나 유튜브에서 확산되는 조작과 왜곡, 강요된 뉴스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는 명백한 진실에 입각해서 진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공자는 ‘명부정(名不正) 언불순(言不順) 사불성(事不成)’ 즉 ‘하느님의 진리[天命]를 거스르면 말이 불순해지고, 그릇된 말은 일을 망친다’고 했습니다. ‘5·18은 북한소행’이라는 가짜뉴스처럼 종북·반공 이념에 억지로 꿰맞춘 거짓 프레임을 성찰 없이 유포하거나 수용한다면, 역사의 주체인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자유와 책임을 포기한 구시대적 ‘신민’에 해당합니다.

둘째, 평등 차원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가? 사리사욕, 당리당략, 개인·집단 이기주의 정신은 공동선의 가치를 훼손합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역사 해석을 문제 삼아 대통령 하야(下野)를 주장하는 이면에는 ‘개신교인 대통령 만들기’의 흑심이 있어 보입니다.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신교인이 대통령이었을 때 종교적 편파성 때문에 사회갈등이 증폭된 적이 많았지만, 천주교가 가장 공신력 있는 종교로 인정받은 비결은 바로 우리 사회의 공익과 공동선을 지향하며 시민의식을 건강하게 견인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류애 차원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가? 왕정 시대 신민들은 위계적 통치와 구조적 불평등을 당연시했고 특권층은 자기들만의 소유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온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지배층의 질서만을 대변하던 가톨릭(국교)의 위상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시민들이 배제되지 않고 존중받는 인류애를 추구하는 역사의 진보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는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이 사회구조 안에서 존중받도록 연대를 추구하는 길은 시민의식의 나침반이 됩니다.

넷째, 구세사 차원에서 ‘미래지향적’인가? 신민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영예와 자부심 가득했던 과거로 회귀시키려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과거의 향수에 묶여 어른들이 훈계만 일삼을 때 ‘꼰대질’, ‘갑질’이라고 일컫습니다. 저도 기도와 성찰을 깊이 하지 못하면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하며 ‘미래세대의 주역인 청년·학생’들의 번민과 필요를 헤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성세대만의 안위와 편리함에서 한걸음 벗어나 자녀와 미래 세대가 인류 공동의 집에서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도록 미래지향적인 가치와 사고관을 습득할 때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을 위계교회보다도 앞서서 교회론의 중심에 선포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은 국가와 교회의 명령에 그저 순종만하는 신민이 결코 아니라 일상 모든 삶의 자리에서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성령과 더불어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시민’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고유 소명을 의식하여야 한다. 확고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공동선의 함양에 진력하여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사목헌장」 7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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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일 신부rn(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