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간구와 고백 / 김윤희

김윤희 (이레네) 시인
입력일 2019-06-11 수정일 2019-06-11 발행일 2019-06-16 제 314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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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어떤 기원이라고 부르는 간절한 지향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손가락 끝이 아니고, 제 속 깊은 우물 그 수질을 잘 보관하는 일도 그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저 무명이라 부르는, 독선과 미망이 만연하던 비신도의 긴 세월을 살아 보았다.

비신도에게는 아무 대책도, 구원의 방편도 없단 말인가. 비신도는 한갓 죄인일 뿐인가. 나는 미로를 헤매는, 버려진 천애고아처럼 외로웠다. 전전긍긍의 세월을 살던 어느 날 나는 발견했다.

‘모든 선의의 사람,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 중에서도 하느님만이 아시는 속에서 구원받는 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22항 일부 의역)

이 말은 장님이 눈을 뜨는 것처럼 큰 개안의 기회를 주었고, 나는 이 말을 받아 안음으로써 벌써 나의 생이 구원받는 첫 신호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왜소하기 짝이 없는 가냘픈 핑계 외에 다름 아니었다.

가장 광의의 출구일 뿐, 완전체 지향으로서의 든든한 처방이 아님을 차차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그것은 최소한의 장치일 뿐 최선의 도달점은 아니란 것을. 절대자의 넓디넓은 아량의 표현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은.

나의 절박한 갈증을 품어 주기에는 미흡한, 가장 낮은 단계에서의, 어쩌면 허술한, 참 구원과는 어딘지 거리가 있는.

나는 일찍이 내가 접어든 나의 문학이, 신앙의 단계까지 포용하지 못하고 서성거림으로써, 그 샘이 건조하고 향기와 자양이 남에게 거름이 되지 못함을 자괴해 왔다.

자기가 추구하는 문학 그 속에 내가 희구하는 저 영험과 신비와 구원이 참으로 용해해 있는가, 그 물음은 숙제에 가까웠다.

내가 지향하는 문학과 신앙이 결코 둘이 아니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도 물론 아니고, 각기 다른 영역으로서의 신령한 혼융일체가 된다면 그건 구원의 큰 그림일 것이라 여겼다.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얼마 전 한 수상소감을 통해 나는 말했다.

“감히, 나의 문학은 나의 신앙이며, 그 속에 깨달음과 구원이 있다”고.

우리는 한 정화의 단계를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말한다. 나는 나의 문학이 내가 가진 종교적 승화의 차원으로 가는 긴 통로의 현관쯤이 될 것을 소망한다.

문학이 담당하는 범위와 저 신의 영역이 따로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 궁극은 한 지점이다.

신이 무한대의 절대적 권능 그 자체라고 한다면 문학예술은 다분히 인위적이며, 좀 더 구체적인 현실의 역사화 작업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러하지만, 특히 구약 아가와 시편은 문학 이상의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문학 이전과 이후의 총체다.

비신도인 누구나 안개 같은 자기 아집을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저 문학의 큰 뿌리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앞의 아가와 시편을 접해 볼 일이다. 저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의 말씀’ 그 자체도 바로 문학의 조상 격이라 하고 싶다. 문학이 끊임없는 언어의 추구인 점에서, 언어(말씀)가 갖는 원초적 영향력에 있어서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 겨우 시 ‘사랑을 염두에 두지 않고’를 쓰기에 이르렀다.

‘지하철 선로 위로 떨어지는/ 한 사람을/ 지척에서 두 눈 부릅뜨고 달려드는/ 죽음의 철괴 뻔히 보면서/ 다투어 뛰어내려/ 끌어 올리는 사람들// 사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들/ 아무나 누구든지/ 닥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어떻게 그럴 수가?’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윤희 (이레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