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악의 평범성 / 성슬기 기자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9-07-09 수정일 2019-07-09 발행일 2019-07-14 제 315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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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나치가 유대인 학살 계획을 꾸밀 때 600만 명을 처리하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 구축과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저 단순히, 출세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줄 몰랐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남·북·미 판문점 깜짝 회동으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가 손에 잡힐 듯 다가선 것 같다는 기대감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는 평화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낮 기온이 33도에 이르는 뜨거운 여름날이었지만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노인 그리고 외국인까지 다양한 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들 대부분은 실향민도 북한이탈주민도 아니었다. 그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처럼 북한 땅을 밟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원래 우리는 하나였으므로. 지난달 25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봉헌한 한반도 평화기원미사에 참례한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처럼 진정한 평화는 항상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인간’인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찰하며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아렌트는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렌트의 말처럼 평범한 인간이야말로 극도의 악이 될 수 있고, 의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누구나 아이히만처럼 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평화가 달아나고 그 자리에 다시 악이 피어날지도 모른다.

성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