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허계임 막달레나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7-16 수정일 2019-07-16 발행일 2019-07-21 제 315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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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박해에도 꿋꿋이 신앙 지켜
갖은 가정폭력에도 견디며 오히려 남편 개종 위해 노력
제1대리구 당수성령본당 주보

미리내 103위시성기념성당 성인화.

제1대리구 당수성령본당 주보인 허계임(막달레나) 성인은 남편과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순교자다.

1772년 용인에서 태어난 성인은 과천의 외교인이던 이씨와 결혼한 후 시누이 이매임(데레사) 성인에게 천주교를 배웠다. 늘 “나는 열심히 믿다가 죽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하던 성인이었지만, 신자가 아니던 성인의 남편은 온갖 방법으로 성인의 신앙생활을 방해했다.

하루는 남편이 이른 아침부터 성인에게 폭행을 가하고 외출했다. 그러자 성인은 잔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인은 식구들에게 “오늘 아침 너희 아버지가 난폭하게 굴었으니 저녁에는 아마 더할 것”이라며 “천주를 위해 죽기 전에 잔치를 베푸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 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인의 말대로 저녁에 돌아온 남편은 성인의 목에 칼을 대고 위협을 했다. 그러나 성인은 남편에게 굴복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성인은 늘 이 순간 배교한 것을 후회했고, 순교하지 못했음에 슬퍼 울었다고 전해진다. 남편의 박해는 이후로도 이어졌지만, 성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나갔을 뿐 아니라 남편을 개종시키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838년 남편이 죽어 남편을 개종시키려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성인은 판공 때가 되면 시누이와 함께 한양으로 가 딸의 집에 머물면서 성사를 받곤 했다. 성인과 시누이의 모범으로 성인의 두 딸 이정희(바르바라)와 이영희(막달레나)도 열심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성인은 1839년 봄에도 성사를 받기 위해 딸의 집을 찾았다. 마침 한양은 큰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성인은 시누이와 딸들과 함께 순교하기로 각오했다. 성인과 시누이, 성인의 두 딸 등 6명의 신자들은 관헌에 나가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밝혔다. 당시 순교자들이 문초당한 이야기들이 상세히 기록되고 알려졌지만, 성인을 비롯한 몇몇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4월 11일 관헌에 나간 성인은 7월 20일 시누이와 두 딸의 순교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혹형을 참아냈고,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처형됐다. 그때 성인의 나이는 67세였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