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주님 / 박유현 신부

박유현 신부rn(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9-08-06 수정일 2019-08-06 발행일 2019-08-11 제 315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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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열정 많고 혈기 넘치던 보좌신부 시절, 겸손을 제대로 배우게 된 적이 있다. 그 때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와 욕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라 그런지 강론에도 온 에너지를 다 쏟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의 복음을 파악하고 연구하는데 적어도 한 시간, 묵상한 것을 들고 성체 앞에서 기도 한 시간, 책상 앞으로 돌아와 강론원고 준비하고 작성하는데 거의 세 시간. 매일 하루의 다섯 시간 이상을 강론을 위해 투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이었다.

강론은 3~5분 내에 전달될 분량으로 도입에는 가벼운 인사와 더불어 일상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소재로 집중을 시킨 후, 그 이야기 상황의 유비성을 활용하여 그 날의 독서와 복음말씀으로 감쪽같이 이어간 후 생각할 주제 메시지 던지고 마무리하는 방식을 선호했었다. 준비하는 절실함이 전달되었는지 그래도 간결하고 깔끔하게 강론한다는 소리를 몇 번 듣기도 했고, 부끄러움에 손사래 치곤 했었다.

하지만 이같이 열의 넘치던 시간들도 계속될 수 없었다. 이전에 해오던 노력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그 날의 독서와 복음말씀의 연관성과 맥을 잡을 수 없는 시기가 찾아 왔다. 그렇다고 주석서나 예전에 다른 이들이 공유한 강론자료에 기대어 내가 기도하고 묵상한 것처럼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쉽지 않아 뭔가 잘 안 풀리는 상황에 점점 상심하고 낙담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꽤 오랜 주간 의욕을 상실한 채 지내던 중 그나마 스스로를 달래려 영적독서하던 책의 한 구절이 내 영혼을 강하게 흔들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입문자 교리교육 」문헌의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에게 열망에의 집착은 의욕상실과 더불어 근본 목적인 내적 스승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교만으로 이어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부분이었다. 당시 내 상황을 거울로 비추는 듯한 말씀을 보고난 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시달린 덕에 머리로만 이해하고 배운 것이 아니라 내 존재에 각인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머리만 굵은 초보 사제를 그에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후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고, 최소한 이 부분에서만큼은 겸손해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강론은 단순 ‘가르침‘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시행착오와 배움으로 인해 본당사목지에서 가끔 열정 뻗치는(?) 각 분야 봉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울 수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아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아야 그때에 비로소 주님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영성이 성당 단체들에게도 필요하다.

‘굳이 못 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잘하려 할 필요도 없다’는 본당신부님의 아리송한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봉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박유현 신부rn(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