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좁은 문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입력일 2019-08-20 수정일 2019-08-21 발행일 2019-08-25 제 315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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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제1독서(이사 66,18-21)   제2독서(히브 12,5-7.11-13)   복음(루카 13,22-30)

호리지차 천리지류(毫釐之差 千里之謬). 털끝만큼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착오를 낳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가갈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것이란 없다. 애초에 털끝의 차이라 해도 차이는 차이이며 극복할 수 없는 간격도 거기서 비롯된다. 그러니 첫발을 어떻게 떼느냐가 그 이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거리끼는 미세한 가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던 자들이 집주인에게 했던 말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견상 주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서먹함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비난할 구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주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그들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그 비난의 수위가 높다. 하지만 그들의 어정쩡하고 방관자적인 삶은 시작부터 이러한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주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주인의 삶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사람들. 처음의 미온적 태도가 비록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을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인과 항상 함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비난받으며 거부된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질문한 그는 아마도 유다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공허한 이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사 이래 계속돼 온 이데올로기다.

귀족인가 아니면 평민인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정략적 결혼과 인간적 욕망, 위선, 거짓을 감추기 위한 몇 가지 교양 있는 태도를 익히는 것뿐이다. 구약의 후계자라 자처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책임지고 한발 한발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을 생략하고 글자와 이념에 숨어 사는 삶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사되는 우아함만으로 내면의 위선과 욕망을 감추는 정도가 그들에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적당한 선에서 단절된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고고한 자세로 바라보거나 점잖게 훈계하려 들 뿐 참으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던 자기들만의 리그에 할당된 영토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그들은 정말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그들이 사는 세계를 대다수의 평민들은 알지 못한다. 주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선택됐다는 우월감으로 좁은 문에 서 있던 자들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나 좁았던 문이 어느새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변모하는 아이러니를 오늘 복음에서 만난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사방(四方)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에게서 배척된 이들이다.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잡기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잔치에 초대됐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에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는 특정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다.

제1독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라고 한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초대됐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그 문을 스스로 좁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든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얀 뤼켄의 ‘좁은 문’.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신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정말로 좁다는 말이라기보다 너희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어렵게 만든 귀족적 혈연이나 우리사회의 상류계급이 세워 놓은 계층 바리케이드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좁은 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수많은 이방인들과 좁은 문을 통과하기 녹록지 않은 이스라엘의 차이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삶으로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이념과 계급에 가둬 둘 것인가의 차이다.

특권 계층에 속해 있다는 이념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조차도 보장해 줄 수 없다. 세련되지 않고 투박하더라도 진지하게 일궈 나가는 매일의 삶 안에 구원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좋은 가문과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의 맵시보다 햇볕에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과 노동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마디가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그런 것이다. 계급사다리의 상층부라고해서 그것이 하늘과 가까운 것도 아니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오르지 못하게 한 좁은 문이 스스로를 가둘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천 리나 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은총은 우리에게 허락된 넓은 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은 짧고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길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