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화로 만난 하느님] (18) ‘지상을 내려다보는 예수 그리스도’

윤인복 교수rn(아기 예수의 데레사·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입력일 2019-08-27 수정일 2019-08-28 발행일 2019-09-01 제 3160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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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움큼이라도 더 쥐려는 욕심이 천태만상의 죄를 낳아
건초를 더 차지하려는 싸움
교회 재산 빼돌리는 욕심
속임수 도둑질 일삼는 악덕
거대한 탐욕의 건초 수레는 악마가 있는 지옥으로 내달려 
인간의 선악 풍자적으로 묘사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에서는 ‘일곱 가지 큰 죄’(칠죄종)를 주요 악덕으로 구분한다. 일곱 가지 죄는 그 자체가 죄이며 인간이 자기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로서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일컫는다. 화가들은 미술작품에서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큰 죄들과 함께 비겁함과 변덕, 우둔함과 무지, 간통과 부정, 우상 숭배 등과 같은 것을 더해 악덕을 특별히 강조했다. 화가들은 죄의 근원을 동시대의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자세히 묘사해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다.

■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

상상력이 풍부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은 인간의 선과 악, 기괴한 상상의 짐승, 비현실적인 풍경 등을 묘사하고 있다. 보스의 작품 주제는 크게 종교와 도덕적 교훈이 혼합돼 나타난다. 종교화 속에 장르화(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익명의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적인 요소가 보이거나, 장르화 속에 도덕적 교훈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보스의 작품 ‘건초 수레’도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상징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룬, 도덕적 교훈이 담긴 하나의 풍자적인 교리로 설명될 수 있다.

세 폭 패널로 구성된 ‘건초 수레’의 중앙 패널에는 인간의 타락한 도덕성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거대한 건초 수레는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고 있다. 지옥에서는 인간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다. 왼쪽 패널에는 인간의 영벌(永罰)에 관한 주제를 담은 총 네 개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반역 천사의 추락,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 수레’, 1512~1515년, 패널에 유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중앙 패널에는 커다란 건초더미를 가득 실은 마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시끌벅적한 모습이다. 네덜란드에는 “세상은 건초더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건초더미에서 각자 움켜잡을 수 있는 만큼 취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다. 마차 뒤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교황과 황제를 비롯해 세속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다. 마차 주위에는 서민들이 하나같이 한 움큼이라도 건초를 더 가지려고 욕심스럽게 다투고 있다. 사다리를 놓고 건초더미에 오르려는 사람, 갈퀴로 건초를 빼돌리려는 사람, 바퀴에 걸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 건초를 조금이라도 더 움켜잡으려고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 등 사람들이 치열하게 발버둥치고 있다. 모두 커다란 건초더미를 보호하려는 마음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초를 양껏 차지하려는 사람들이다.

건초 수레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한없는 욕심을 상징한다. 건초를 차지하려는 탐욕은 다른 죄를 낳기도 한다.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뚱뚱한 수도사가 한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자신이 모아 놓은 건초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고 그를 대신해 수녀들이 큰 자루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다. 이들은 수도자로서의 서약은 저버리고 교회 재산을 빼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왼쪽에는 여자 환자가 고통스럽게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다. 그 옆에는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고 보채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인이 한 집시에게 손금을 보고 있다. 이들 뒤로는 검정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아이를 업은 마술사이자 도둑이 보인다. 모두 탐욕에 젖어 속임수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이다. 더욱이 이들 위쪽에는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장면도 묘사돼 있다.

■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

건초 꼭대기에는 두 쌍의 남녀가 한때를 즐기고 있다. 소박한 차림의 한 쌍은 덤불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고, 우아한 차림을 한 다른 한 쌍은 곡을 연주하고 있다. 이들 오른쪽에는 공작새 꼬리를 한 파란색 악마가 있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다. 천사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가엾다는 듯 하늘만 쳐다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하늘의 구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양팔을 벌리고 지상의 아수라장을 내려다본다. 인간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탐욕에만 눈길이 간다. 부를 향한 인간의 온갖 탐욕과 범죄, 혼돈과 분열의 결말은 어떠한가? 수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수레는 기이한 생물들에 의해 천천히 그들의 목적지인 오른쪽 패널, 곧 최후의 심판인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얀 베르메르의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662~1663년, 미국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 정의의 저울 앞에 선 사람들

지옥은 단순한 불구덩이가 아니라 현세가 그대로 연장된 듯한 장소다. 괴물 같은 형상의 악마들이 죄인을 하나씩 맡아 고문한다.

죄인들은 저 멀리 도시를 집어삼킬 것 같은 불길 속으로 던져지거나 괴롭힘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모든 죄인을 수용하기에는 지옥이 너무 적은지 벽돌공 악마들은 새 건물 짓기에 바쁘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 도상에서 구원받은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의 수를 비슷하게 배열하지만 보스의 작품에서는 지옥으로 갈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서 각자의 마음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화가 베르메르(Jan Vermeer, 1632~1675)의 작품에 보이는 저울을 든 여자를 보자. 여인의 머리 뒤에 걸린 액자 속에는 예수께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창을 통해 빛을 받고 있는 여인은 탁자 위에 널려 있는 많은 보석 앞에서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비어 있지만 탁자 위의 금과 진주는 세속적이고 순간적인 삶을 의미한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저울은 정의의 공평함과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을 상징한다. 여인은 빈 저울을 들고 욕망의 물질 앞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고 있다.

윤인복 교수rn(아기 예수의 데레사·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