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10-07 수정일 2019-10-08 발행일 2019-10-13 제 316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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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 가는’ 주님의 집 새로 짓다

안드레아 바니 작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성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찬가(태양의 찬가)’ 중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널리 사랑받는 성인이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인을 염두에 두고 교황명을 정하면서 세계적으로 더욱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성인이다. 교구 역시 성인에 대한 사랑이 커 광교2동·동탄숲속·봉담성체성혈·세류동·소사벌본당과 별양동·연성·태평동·판교성프란치스코본당 등 많은 본당이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삼고 있다.

성인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성인은 젊은 시절을 낭비와 노는 일로 보냈다. 기사가 되길 꿈꿨던 성인은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고, 1년 만에 풀려나서 심한 병을 앓았다. 성인은 병중에도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때 환시와 한 한센병 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성인은 고향 아시시로 돌아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에 몰두했는데, 폐허가 된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허물어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말씀을 들었다. 성인은 이 말씀을 따르고자 집안 재산을 다 팔아 성당을 재건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성인은 부친의 분노를 샀고, 부자의 연과 상속권을 모두 포기하고 가난의 삶을 선택했다.

성인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시작으로 포르티운쿨라, 성 베드로 성당 등 허물어가는 성당들을 차례로 수리해 나갔다. 그 과정 안에서 ‘허물어 가는 나의 집’이 외적인 성당이 아니라 내적인 교회라는 것을 깨닫고 ‘교회의 내적인 삶에 봉사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

성인은 세속화되고 종교적 관심에서 멀어져 간 당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난’을 삶으로 보여줬다. 성인의 뜻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성인은 수도회를 만들고자 교회의 인준을 청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성인이 제시한 회칙이 너무 엄격해 인준을 망설였지만, 꿈에서 쓰러져가는 로마의 라테라노대성당을 성인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인준을 결심하고, 성인이 세운 ‘작은형제회’에 설교의 사명까지 줬다.

성인의 설교로 많은 이들이 회개의 삶을 살았다. 특히 아시시의 명문가 출신이었던 클라라 성인도 성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성인의 정신을 따르는 수도회에 날로 많은 이들이 찾아들었다. 성인은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평화를 전했는데, 가난의 삶과 평화 안에 머물던 성인의 모습 그 자체가 설교가 됐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는데 탁월한 신비가였다. 성인은 온 우주와 자연을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지로 여겼고, 형제애를 깊이 묵상하며 창조된 세상과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다. 성인의 이런 사상은 ‘피조물의 찬가’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이에 197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인을 생태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평생을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고자 열망했던 성인은 죽음을 2년 앞두고 1224년 라 베드라 산에서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 즉 오상을 받았다. 성인은 오상의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당나귀를 타고 다니며 설교를 이어나갔다. 결국 시력까지 잃고 병세가 깊어진 성인은 1226년 죽음을 예감하고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고자 알몸으로 잿더미 위에 누워 시편을 노래하며 죽음을 맞았다. 성인은 선종 후 2년이 지난 1228년 시성 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