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평신도 주일 기획] 박해시대 여성 평신도의 활동과 영성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9-11-05 수정일 2019-11-05 발행일 2019-11-10 제 3169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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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신앙과 애덕 실천으로 신분의 벽 넘고 교회 주추 놓다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신앙 지키며 진리 통한 사회 변혁에 큰 역할
한국교회 설립 중요한 토대 이뤄
여성 신앙 공동체 자발적으로 조직
사랑 전하며 선교에 적극 매진

한국교회는 선교사나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교회를 먼저 창설했다. 이 땅의 평신도들은 조선교구 설정 이전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며 순교의 칼을 받았으며 혹독한 박해를 무릅쓰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렸다. 그 안에서 특별히 당시 여성 평신도들은 희생 자체였던 조선 여성들의 삶 속에서 꿋꿋한 신앙생활과 애덕 실천으로 교회 유지와 발전에 기여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박해 시대 여성 평신도들의 활동과 영성을 살펴본다.

■ 새로운 가치를 따라

조선 유교 사회에 유입된 천주교 신앙은 당시 시대적 상황 안에서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숙 교수(아기 예수의 데레사·영남대)는 「조선 후기 천주교 여성 신도의 사회적 특성」에서 “여성에게 있어 천주교 신앙은 전통적 사회 기반을 흔들고, 근대적 정신과 생활양식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됐다”고 밝힌다.

남성 지식 계층에 의해 수용된 천주교 신앙은 여성들에게 급격히 전파돼 갔다. 박해시대 전체 여성 신자들의 수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하느님의 종 황사영(알렉시오)의 증언 등을 참고할 때 교회사학자들은 1801년 당시 여성 신자 비율이 2/3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신년 4월에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여러 교우들이 신공을 부지런히 힘썼고,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쏠려서 자진해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습니다. -중략- 부녀자가 3분의 2요, 무식한 천민이 3분의 1이었는데, 사대부 집 남자는 세상의 화가 두려워서 믿고 좇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황사영 「백서」 중)

박해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전문가들은 여성 신자가 대체로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황은 한동안 지속했을 것으로 본다. 순교자 관련 기록들을 참조해서 신자 성비를 추정하면 1850년대 이후 조선 교회에는 대략 7000여 명에서 1만2000명에 이르는 여성 신자들이 있었다고 파악한다.

천주교를 만난 여성들은 유교적 관념이 엄격하고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신앙에 대한 열정을 추구하고 지키며 교회 설립의 중요한 토대를 이뤘다. 또 사회적 기득권과 전통적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로 시대를 탈바꿈하는 기초가 됐다.

김 교수는 “조선 시대 여성 신자들은 한국 여성사에서 독립된 지위와 역할을 확보해 나가는 근대 지향적 시점을 마련했다”고 밝힌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 복자 윤지충(바오로)의 모친 안동 권씨는 유교식 조상 제사 거부를 유언으로 남기면서 향후 백 년의 박해를 몰아치게 한 빌미를 제공했으나 그리스도교 진리를 통한 사회 변혁에 획을 긋는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여성들은 한국 천주교회 시작 때부터 신앙의 싹을 트는 결정적인 계기에 자리했다.

김성태 신부(대전교구 솔뫼성지 전담·내포교회사연구소장)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폐제분주를 실천했지만 이미 어머니 안동 권씨의 강한 유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며 “그는 신앙을 전수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전통에 정면으로 맞서며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을 시도한 여성”이라고 밝혔다.

해미성지 순교자들의 생매장터였던 진둠벙에 설치된 순교자 동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적극적인 변혁의 주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던 복자 강완숙(골룸바)은 순교자로서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여성사에도 시금석이 된 인물로 꼽힌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힘들었던 당대에 한국 사회 최초로 여성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가 뿌리 내리는 데 필요한 봉사와 선교에 매진했다. 특히 여성 신앙 공동체는 여러 방법으로 공동체 유지를 위해 경제 활동에 나섰다. 이는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개척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사회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격식을 깨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강완숙은 또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도맡아 처리했고 교리교사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활약으로 1794년 주문모 신부가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된다. 그중 여성 신자 수가 절대다수였다. 학자들은 강완숙의 삶과 영성은 21세기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과 지도자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복자 윤점혜(아가타) 경우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동정 생활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치를 드러냈으며, 또 동정녀 공동체 회장을 맡아 수많은 동정녀를 지도하며 가르쳤다.

수리산에서 체포된 최양업 신부의 모친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삶도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범을 보인 대표적인 여성 신자 사례다. 사제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식을 내놓았고, 회장을 맡았던 성 최경환의 부인으로 회장 일을 도우며 함께 자선을 베풀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던 복자 강완숙 골룸바.

■ 전교와 철저한 애긍

여성 신자들은 박해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름의 전교와 철저한 애긍 생활, 교중 사무, 복사 활동에 참여하며 교회 성장에 함께했다.

방상근(석문가롤로·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박사는 「병인박해기 천주교 여성 신자들의 존재 형태와 역할」에서 “여성들은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시작해 일부는 외교인에 대한 전교에도 열심이었다”며 “이것은 당시 서울 지역이 4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또 각 지역은 회장 지도하에 조직화 돼 있던 것과 관련해서 여성 신자들도 교회 조직 일원으로서 전교 활동에 참여했음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또 철저한 애긍생활의 모범을 보였다. 「치명일기」에서 송 루치아는 가난한 사람을 힘대로 구제하되 구제할 물건이 없으면 친히 다니며 구걸하여 구제했다고 한다. 유 마리아는 헐벗은 이를 보면 입히고 주린 이는 먹였으며, 빌어서 먹는 이가 있으면 병중이라도 일어나 누추한 옷을 벗겨 친히 빨아 입혔다. 이런 행동은 충실한 애덕의 실천인 동시에 적극적인 선교에 나서는 일이었다.

동정녀 공동체를 통해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복자 윤점혜 아가타.

■ 희생·순교·애덕의 영성

전문가들은 당대 여성들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통과 자녀에 대한 사랑은 커다란 위로였고 끝없는 헌신의 생활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인정한다. 고난의 생애 중 형성된 신심 생활은 삶을 지탱해 준 커다란 영적인 도구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굳건한 신앙생활과 애덕 실천, 그리고 사회 모순에 대한 나름의 저항과 노력은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또 다른 여성들에게도 울림으로 남았다.

오늘날의 제도화된 교회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했고 신분을 넘어서 교리교육과 교회 활동을 펼치며 여성의식을 함양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정신을 살았던 것이다.

송종례 수녀(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는 박사 학위 논문 「한국가톨릭여성들의 영성」을 통해 유교 덕목을 실천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여성의 영성을 희생, 순교, 애덕 등 세 가지로 요약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남편 성 최경환과 함께 교우촌을 일구는데 노력한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

송 수녀는 자기주장 없이 순종해온 여성들이 죽음의 순간에 단호한 결정을 내린 것은 효(孝)의 완성인 순교를 통해 여성들이 자주성을 표현한 것으로 봤다. 박해로 인한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여성들의 효와 충, 절개가 어우러지는 최고의 표현이었다는 견해다. 아울러 이 시기 여성들에게서 드러나는 영성은 연민에서 나온 애덕, 즉 가난한 사람이나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전교의 원동력도 이들의 연민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