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앵베르 주교·모방 신부·샤스탕 신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12-10 수정일 2019-12-10 발행일 2019-12-15 제 317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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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 위해 목숨 바친 세 선교사

엥베르 주교

한국교회 설립에는 평신도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신자들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활약이 없었으면 교회가 뿌리내리기 어렵지 않았을까.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초기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이자, 이 땅에서 하느님을 증거한 순교자다.

조선교회 신자들의 간절한 청원이 교황청에 닿아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제1대 주교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됐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으로 가던 길에 병사하고 만다. 이 뜻을 이어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것이 앵베르 성인이다. 그리고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모방 성인과 샤스탕 성인이 앵베르 성인과 함께 조선의 신자들을 돌봤다. 우리는 이 3위의 성인들을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 각각 범 라우렌시오, 나 베드로, 정 야고보라고 부르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길 청하고 있다.

모방 신부

12년 동안 중국의 쓰촨성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성 앵베르 주교는 1836년 조선대목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보좌주교가 된 이듬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성인은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됐고, 그해 12월 정하상(바오로) 성인 등 조선 신자들의 도움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성인은 3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고해성사가 가능할 정도로 우리말을 익히고, 이미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박해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죽을 위험에 놓인 어린이들을 위해 세례를 주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런 성인들의 노력으로 신자들이 빠르게 증가해 신자 수가 9000명을 넘었다.

또 방인 사제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인들은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3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최방제 신학생은 병사했지만,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우리나라의 첫 사제들로서 고국으로 돌아와 신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성인들이 뿌린 씨앗 덕분이었다.

샤스탕 신부

‘신자들을 위해서’. 성인들이 사목을 펼치는 첫 번째 이유이자, 모든 이유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성인들은 움츠려 들지 않고,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신자들을 찾아다녔다. 박해 속에 어려움을 겪는 더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서였다. 또 박해자들이 성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자, 자신들 때문에 신자들이 더 고통을 겪지 않도록 세 성인이 함께 관청을 찾아가 자수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였던 성인들은 온갖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마침내 앵베르 성인은 43세, 모방 성인과 샤스탕 성인은 3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교구 내 본당에서는 제2대리구 상대원본당이 세 성인을 함께 주보로 삼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