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사도직협조자로 60년 헌신한 양 수산나 여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9-12-30 수정일 2019-12-31 발행일 2020-01-05 제 317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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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찾은 한국땅… 백발성성해진 지금도 주님만을 따릅니다”
23세에 가톨릭 접하고 선교 결심
‘한국교회사 특강’ 계기로 한국행
고아들 거둬 기르며 평생 헌신
여성 교육 등 다방면 복지 초석 다져

“멀리서 우째 다 왔노. 와줘서 고맙데이.”

2019년 12월 8일, 선교를 위해 대한민국 대구 땅에 발을 디딘 지 꼭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축하연장에서 주인공이 던진 한 마디에 함께 한 이들은 시쳇말(時體)로 ‘빵’ 터졌다. 경상도 ‘토백이’(토박이)보다 더 구수하게 쏟아내는 사투리 입담의 주인공이 백발성성한 영국 스코틀랜드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for god’가 아니라, ‘from god’를 늘 기억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 사랑받고 하느님 덕분에 사랑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번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의 주인공은 60년간 사도직협조자(Auxilista)로 살아온, “결혼은 안했지만 시댁은 있어요, 바로 대구예요”라고 말하는 양 수산나(수산나 메리 영거, Susannah Mary Younger) 여사다.

한국 선교를 위해 60년 넘게 ‘한국인’으로 살아온 양 수산나 여사는 “한국교회는 빛나는 복음화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특히 한국 평신도들은 대단한 저력을 가진 이들”이라고 말한다.

집안 내력이나 학벌 등으로 본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화려한 삶은 무궁무진했다. 아버지는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 또한 아버지는 노동당 국회의원에 외무부 차관, 남동생은 BBC의 유명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수산나도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한 재원으로 의사 약혼자까지 있었다. 하지만 1959년, 당시 23세의 젊은 스코틀랜드 여성은 한국 선교에 투신하기로 했다. 어떤 세속적인 잣대도 들이대지 않고 단박에 빠진 사랑이었다.

■ 예수가 뭐길래

신앙 안에서 성장하진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성공회 세례를 받았지만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부모님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고등학생 시절, 심심풀이로 읽으려 추천받았던 책이 「그리스도의 생애」였다. “어? 예수란 인물, 상당히 매력적인걸.” 곧바로 친구에게 성경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하룻밤새 신약성경을 통독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음날엔 온종일 테니스를 쳤다. 소용없었다. 밤이 되자 다시 성경을 펼쳤다. 그리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모님은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는 것도,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해줬다고 한다.

수산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기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고 싶었다. 집 지하실에서 ‘빛을 향하여’라는 이름의 선교 준비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우연히 들은 한국교회사 특강.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스러져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동했다. “그래, 한국으로 가자.” 마리아 하이센베르거(하 마리아, 한국SOS어린이마을 초대원장)와의 인연으로 수산나 역시 서정길 대주교(당시 대구대목구장)의 초청을 받아 한국행 배에 올랐다.

■ 그래서 뭘 했길래

독일 함부르크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 피아노가 없어 연습을 못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7대의 피아노를 싣고 탄 화물선이었다. 함께 한국으로 향하는 열 명의 사제·수도자·평신도 선교사들도 피아노를 가져가기 위해 편안한 비행기가 아닌 5주 넘게 소요되는 화물선 이동에 응해줬다.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집이 없어 다리 밑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과 고아원에서 도망쳤지만 폭력배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사는 구두닦이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서정길 대주교로부터 그들과 같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고향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구 삼덕성당 옆에 집을 마련하고 폭력배의 소굴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의 옷을 빨 때 뜨거운 물에서 도망가려고 후드득 뛰어오르는 벼룩 떼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아이들은 나중에 SOS어린이마을 각 가정의 ‘형’들이 됐다.

수산나는 젊은 여성들의 자립에 더욱더 헌신했다. 기술원을 세워 전인적인 교육은 물론 양재, 미용, 기계뜨개질 등의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국에는 ‘사회복지’라는 개념도 자리 잡지 않은 때였다. 이 대구가톨릭여자기술원은 현재도 ‘가톨릭푸름터’로 운영되고 있다. 그의 발걸음 발걸음은 대구지역 사회복지의 모퉁잇돌이 됐다.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바쁜 와중에도 자주 기술원에 들른 김수환 신부(故 김수환 추기경)와 함께 배급받은 금죽(옥수수죽) 혹은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며, 아이들이 교도소 수용자들을 위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김 신부가 악취와 굶주림으로 쓰러져가는 시립희망원 수용자들을 살리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받은 음식을 나눠줄 때에도 동행했다. 대구·경산지역 농민들을 돕기 위해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농장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지만, 이를 디딤돌로 세워진 무학중·고등학교는 지금까지도 지역교육에 든든한 거름이 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입국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양 수산나 여사.

■ 오늘도 다시 사랑에 빠진다

23세의 수산나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프랑스 루르드성지에서 하 마리아를 다시 만났었다. 당시 ‘사도직협조자’라는 성소자들을 위한 양성센터도 방문하게 됐다. ‘사도직협조자’는 세상 안에 살면서 특정교구에 소속돼 그 교구와 주교의 사목활동에 협조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봉사하는 성소다. 수산나는 한국으로 향하는 화물선 위에서 이 성소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특히 오랜 기간 루르드에 있는 사도직협조자 양성센터에서 한국인 협조자들과 후보자들의 양성을 지원하는데 헌신했다.

올해로 84세, 가톨릭푸름터 원장과 고문까지 역임하고 일선에선 은퇴했다. 하지만 60여 년 이어온 한국과의 인연의 바탕에는 ‘사도직협조자’로서의 열정이 생생히 자리한다.

한국에서의 선교 봉사 활동, 늘 ‘수지 언니’로 불렸던 수산나. 이젠 수산나 여사, 혹은 수산나 할머니로 불릴 만큼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평신도들은 100%가 아니라 120%를 해내는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은 퍼내고 나눌수록 더 많이 샘솟는다”고, “하느님께서 계시니, 하느님께 사랑받고 또 사랑하니 늘 기쁘고 외롭지 않다”고 되풀이해 말한다.

“이름이 영거여서 그렇게 젊게 사는 것인가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은사를 받은 분입니다.” 그가 사도직협조자로 봉사한 대구대교구의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가 수산나 여사에게 건넨 말처럼, 수산나 여사의 오늘 하루는 더욱 젊고 더욱 기쁘다. 수산나 여사는 “그리고 나는 오늘 더 많이 기도하고 더 깊은 사랑에 빠진다”고 덧붙였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