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특별기고]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에 부쳐

이경규(안드레아·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입력일 2020-03-17 수정일 2020-03-17 발행일 2020-03-22 제 3187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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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동양평화’, 언젠가 반드시 이뤄야 할 신앙적 염원
가톨릭신앙 근거해 민족구원과 평화 도모
분쟁 끝내고 협력하는 동양·세계평화 주창
이는 하느님 뜻 증거하고 실현하려던 노력

안중근(토마스·1879~1910) 의사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선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았던 신앙인이었기에, 그의 의거 또한 동양평화 실현을 위한 거사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 안 의사 순국 110주년을 맞아, 안중근 연구 전문가인 대구가톨릭대학교 이경규(안드레아) 명예교수로부터 민족영웅이자 신앙인으로서 안중근의 진면모를 돌아본다.

202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안 의사가 염원했던 대한의 진정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있으며, 한·중·일 삼국의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안 의사가 주창했던 동양평화는 아득하고 「안응칠역사」에서 언급했던 ‘안중근의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시점에서 안 의사에 대한 평가와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 의사에 대한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찬사가 분분한데, 그중에서도 노산 이은상 선생의 안 의사에 대한 평가는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조국이 기울어갈 제 정기를 세우신 이여 역사의 파도 위에 산같이 우뚝한 이여 해 달도 길을 멈추고 다시 굽어보도다.” 또한 안 의사를 중국 남송(南宋)의 유신(遺臣)으로 ‘정기가’(正氣歌)를 지은 문천상(文天祥)에 비유하기도 한다. 타이완 화리엔에는 그의 이름을 딴 ‘천상’이란 지명이 있다. 문천상은 ‘정기가’에서 “고대 충신·의사들의 사적을 열거하고, 그들에게 정기가 있어 나라의 동량이 되었고, 그들의 충절·의행(義行)은 크게 빛나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몇 해 전 전공 연계 답사로 학생들과 함께 하얼빈역사의 안중근 의사 전시실을 둘러보며 방명록에 ‘민족정기, 동양평화’라고 서명했던 기억이 난다. 안 의사는 그렇게 민족의 바른 기운을 세우신 분이다.

안 의사는 32살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국권수호와 동양평화를 위한 다양한 행적을 남겼다. 교육입국을 위해 삼흥학교(民興, 士興, 國興)와 돈의학교를 설립·운영하였으며, 식산활동의 일환으로 석탄판매회사인 삼합의(三合義)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 관서지방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서북학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서우학회와 서북학회의 기본 종지는 민권사상인 국민주권론과 국민국가론을 기반으로 한 민력양성으로 이러한 민권사상은 안 의사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상해에서 상인 서상근과의 대화에서 “나라란… 2000만 민족의 나라입니다. 국민이 국민 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에서도 안 의사의 민권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안 의사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관서지부장을 자처하고, 평양 명륜당에 선비들을 모아 연설을 하고 즉석에서 의연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모친 조 마리아 여사를 비롯한 부인과 제수씨들이 패물의연에 적극 참여한 것도 삼화항(진남포) 패물폐지부인회의 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안 의사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국권회복의 출발점을 국채청산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가족의 지원과 참여가 있어야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사실 국채보상운동이 들불같이 피어올랐던 것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감찬(減饌)·감반(減飯)운동은 물론이고, 머리를 잘라 의연하는 눈물겹고 감동적인 사연은 온 국민의 동참을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하층민들이 역사의 담당자로 책임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였으며, 그 선봉에 안 의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의사는 의병운동에도 가담하여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의병운동 실패 후 심기일전 독립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동지 11인과 더불어 동의단지회를 구성하고, 약지를 단지하여 대한독립을 천명하였다.

안 의사의 민권·민족의식 형성과 정세인식, 교육·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참여 등 민족운동 참여는 향후 「동양평화론」을 구성·집필하는 주요한 경험적 산물이자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 서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안 의사는 민족의 영웅인 동시에 평신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줬다. 사진 우세민 기자

안 의사의 일념은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였다. 최후의 유언에서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옥중자서전인 「안응칠역사」에도 “내가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어이하랴. 그러나 일본국 4000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형장에서 간수가 최후로 남길 말이 무엇인가 묻는 말에 “나 자신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니 한일 양국이 서로 일치 협력하여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옥중에서 하얼빈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이라고 하였으며, 유묵 중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의 ‘대업’은 동양평화라고 생각한다. 민족의 독립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을 넘어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제창하였던 것이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 후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3월 15일에 「안응칠역사」를 탈고하고, 순국한 3월 26일 사이인 11일 만에 「동양평화론」의 서문과 전감(前鑑) 일부분만 집필하였던 것이다.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해 사형연기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 요청하였으며, 그와의 면담내용인 「청취서」에서 그 내용의 대강을 알 수 있다. 그 주요 내용은 1)평화회의의 본부와 지부를 두고, 한·중·일 국민으로부터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를 받는다. 2)공동은행과 공동화폐를 발행한다. 3)각국 청년을 대상으로 평화군을 구성한다. 그 외에도 공동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각국의 권력을 인정받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오늘날에도 동아시아 공동체 수립의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안중근 의사의 염원인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는 가톨릭신앙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안 의사는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종교관을 가졌으며, 사랑과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을 증거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안 의사는 19세 때 프랑스 선교사 빌렘 신부로부터 ‘도마’(토마스)로 세례를 받았다. 안 의사는 경문의 강습과 도리의 토론을 통해 신앙을 돈독히 하였으며, 빌렘 신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였다. 안 의사는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했던 제도교회의 선교정책에 비판의식을 가졌으며, 동시에 가톨릭신앙을 통하여 근대 민권의식을 성숙시켜 나갔다.

「안응칠역사」에 지면을 상당히 할애하여 신앙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하얼빈 의거도 동포의 기도에 힘입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의거 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잡혀 있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절명 소식을 듣고, 십자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전한다.

또한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장남 분도(베네딕토)가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희망을 피력하였으며, 가톨릭신앙의 목적인 ‘천당지복영원지락’(天堂之福永遠之樂)을 휘호하기도 하였다.

안 의사의 행적은 평신도 신앙의 모범이었으며,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는 당시만의 화두가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의 생생한 화두로 남아있고, 그 평화가 구현될 때 ‘안중근의 날’은 올 것이다.

이경규(안드레아·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