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19) 중국문화와 복음화(하)

이근덕 신부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0-03-24 수정일 2020-03-24 발행일 2020-03-29 제 3188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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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복음화, 유교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있어야 가능
인간관계 질서와 도의·현실 중시하는 유교
현실 직시하고 이상적 인격 얻는 수양 중시
하느님 뜻과 같은 점 이해시키는 노력 필요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는 아시아복음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아시아 지역의 문화와 대화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는 그 지역의 전통 가치관과 사회질서 그리고 삶의 양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유지돼 왔다.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중국인들의 근간에 있는 유교문화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에 본지는 지난 호에 이어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이자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인 이근덕 신부의 기고를 통해 중국 유교문화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를 어떻게 복음화 활동에 반영해야 할지 유추해 본다.

■ 유교문화의 인격수양

유교는 개인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인격수양이란 한 개인의 전체적 소질을 어떻게 양성해 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유교는 교육 특히 가정교육을 강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두는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교육이다. 유교는 이에 더하여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도덕적 자각에 주목한다.

인격수양은 일종의 자각적이고도 자율적인 과정이다. 공자에 의하면 이는 극기복례의 과정이기도 하다.

만일 여기에서의 ‘예’를 과거 봉건사회의 예의질서 체계에 국한하지 않고 그 의미를 모든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규범으로 확대한다면 공자의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시대를 살면서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들과 인간관계의 원칙들을 자각적으로 준수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가는 곳마다 벽에 부딪힐 것이요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사실 도덕규범에 대한 자율적 강제는 우리를 도덕의 노예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도덕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곧 물질의 노예가 아닌 물질의 주인이 될 것이요, 도덕의 노예가 아닌 도덕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유방식의 변화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이다. 올바로 깨달아 안다면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것이요, 만일 가는 곳마다 부딪혀 투쟁한다면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마치 운전을 하면서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것과 같다. 만일 교통법규 준수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많은 위반통지서가 날아들 것이고 심지어는 구속될 수도 있다. 그 안에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유교에서 자신을 수양하는 목적은 ‘안신입명’에 있다. 안신입명이란 사회 안에서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자재로 생활하며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종국에 가서는 공자가 말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중국 칭하이성 시닝의 한 성당에서 한 남성이 세례를 받고 있다. CNS 자료사진

■ 유교문화의 인생관

유교의 인생관은 낙관적이다. 이는 인생을 고해로 보는 불교와 상반된다. 하지만 결국 추구하는 목적인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데는 서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사실 유교 안에서도 맹자는 성선설을 말하고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다. 얼핏 볼 때 이는 상반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더욱 확장함으로써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려 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고침으로써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려 하는 것이니 결국 최후에 다다르고자 하는 목적은 같다고 하겠다. 게다가 그 방법 역시 나란히 교육과 수양을 통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관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자연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부단한 교육과 인격수양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해서 이를 인정하고 가만히 둔다면 이 사회에 생존해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드시 교육과 인격수양을 통해서 이를 고쳐나가야 비로소 최종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와 순자의 출발점이 비록 다르다고 하여도 결국 이상적인 인격을 추구하는 귀착점은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교의 낙관적인 인생관은 자연히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맹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위험한 담장 아래에 서 있지 않는다고 하였다. 곧 넘어질 것을 명백하게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담장 아래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용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을 중시하고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힘써 노력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의 노력을 아주 중시한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의 노력을 다 기울인 연후에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저 소극적으로 앉아서 하늘이 준 기회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여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가 무르익으면 이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 유교문화의 가치관

유교의 가치관은 다음의 세 가지로 종합할 수 있다. 바로 ▲의로움을 보면 용감히 행해야 한다(견의용위(見義勇爲)) ▲이익 앞에서는 정당함을 생각해야 한다(견리사의(見利思義)) ▲올바름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사생취의(舍生取義))다.

「논어」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답하였다. “이익 앞에서는 정당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위험한 순간에 마주해서는 과감히 나아가 맞서며, 아무리 오래된 약속이라 하여도 이미 승낙한 일은 반드시 실천한다면 진정한 어른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문화가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관이라 하겠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정신을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교문화는 인간관계의 질서를 중시하고, 도의를 중시하며, 현실을 중시한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인간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 도의와 하느님의 뜻, 현세와 내세 등의 개념을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당연히 유교문화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인간의 질서가 담겨 있고, 하느님의 뜻과 도의가 다르지 않으며,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할 때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유교문화 안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근덕 신부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연구위원·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