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선 넘나들며 양떼 돌본 펠홀터 신부 추모사업 착수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0-08-11 수정일 2020-08-11 발행일 2020-08-16 제 3207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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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작은형제회, 한국전쟁 당시 역사 확인
증언 통해 선종 장소 ‘두만리’ 아닌 ‘용담리’로 밝혀져
미 군종대교구에 수정 요청 예정
작은형제회 ‘선종형제 명부’ 포함
선종 장소에 표지석 설치 추진도

수도복을 입은 펠홀터 신부.

군종교구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가 한국전쟁에 미군 군종신부로 참전해 부상병들을 최후까지 돌보다 거룩하게 선종한 허먼 G. 펠홀터(Herman Gilbert Felhoelter, 1913~1950) 신부의 역사 확인과 기념사업에 착수했다.

펠홀터 신부(작은형제회 미국 세례자 요한관구)는 미군 보병 제24사단 19연대 소속 군종장교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종군했고, 개전 초기인 1950년 7월 16일 ‘금강방어 전투’ 격전지인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금남면 용담리에서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선종했다.(관련기사 본지 2020년 6월 21일자 9면 보도) 적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옆에 있던 군의관을 피신시키고 부상병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펠홀터 신부의 거룩한 순교 사실이 70년이 지나도록 조명되지 못했고 한국교회에 그를 기억하는 기념물이나 추모사업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가톨릭신문에 펠홀터 신부의 순교 행적을 밝힌 기사가 나간 후 작은형제회 한국관구에서 펠홀터 신부 추모사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뤄졌다. 마침내 작은형제회 출신인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와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비서 김일득 신부, 작은형제회 대전 목동수도원 백형기·도종현 신부, 군종교구 육군 제32보병사단 한밭본당 주임 윤성완 신부가 펠홀터 신부 순교 현장을 찾아 펠홀터 신부의 성덕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릴 것인지 논의하는 시간을 갖기에 이르렀다.

유 주교와 사제단은 펠홀터 신부 순교 현장을 찾기에 앞서 세종시 금남면 두만1리 마을회관에 모여 한국전쟁을 체험한 고수환 이장(75), 마을 원로 김익태(85)·고성근(79) 어르신으로부터 증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금남면이 고향이면서 한국전쟁사를 연구한 한림대 사학과 최창희(75) 명예교수도 자리를 같이 했다. 두만리는 한국전쟁 초창기인 1950년 7월 중순 미군과 북한군 사이의 최대 격전지였고 두만리와 낮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용담리는 미군 부상병들이 후송되는 장소였다. 펠홀터 신부는 두만리에서 부상병들을 이끌고 용담리로 이동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채 군종장교 직무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최선을 다하다 순교한 것이다.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왼쪽에서 두 번째)와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사제단 등이 8월 6일 세종시 금남면 두만1리 마을회관에서 지역 원로들로부터 한국전쟁 당시 선종한 펠홀터 신부에 대한 증언을 듣고 있다.

유 주교는 고수환 이장과 마을 원로들의 증언을 듣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펠홀터 신부님이 돌아가신 현장 목격 증언을 듣기 원했는데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분들이었다”며 “그러나 미국 측 기록에 펠홀터 신부님 선종 장소가 두만리로 기록돼 있는 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수환 이장과 마을 원로들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들이 전투 지역이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장소에 접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됐다”고 기억하며 “미군 군종신부가 전사한 뒤 북한군이 두만리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마을주민들을 부역에 동원했고 부역에 끌려갔던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듣곤 했다”고 설명했다. 고 이장과 마을 원로들은 전사한 펠홀터 신부와 미군들이 큰 구덩이에 함께 묻혔다고 공통되게 기억했다.

군종교구와 작은형제회 한국관구는 펠홀터 신부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스러운 행적을 바르게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 유 주교는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를 직접 확인한 사실과 기존 미국 측 기록상 두만리에서 용담리로 수정을 요청하는 내용을 적어 미국 군종대교구에 영문 서한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작은형제회 한국관구는 보다 적극적인 추모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김일득 신부는 “펠홀터 신부님을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선종형제 명부’에 포함하되 자유기념으로 기억하고 2020년에 한해 펠홀터 신부님 기일에 각 공동체에서 비망록을 낭독하기로 했다”며 “펠홀터 신부님 선종 장소에 표지석 등의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백형기 신부는 이와 별도로 “한국전쟁 중 대전 목동에서 순교한 분들에 대한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다면, 같은 전쟁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더 이른 시점에 순교한 펠홀터 신부님의 시복시성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유수일 주교(왼쪽에서 네 번째)와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사제단 등이 8월 6일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인 세종시 금남면 용담리에서 최창희 한림대 명예교수(오른쪽 첫 번째)로부터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작은형제회 미국 세례자 요한관구가 펠홀터 신부 선종 50주년(2000년)을 기념해 만든 관구 소식지 특별판(NEWS LETTER Special Edition)에는 펠홀터 신부의 군종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드윈 J. 라이언(Edwin J. Ryan, 당시 23세, 일병)이 1955년 작성한 참전 수기가 실려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펠홀터 신부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무기 소지를 절대 거부했으며 같은 부대 히슬로프(Hyslop) 군종목사에게 배우자와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위험한 지역에서 피하도록 한 사실도 기술돼 있다. 라이언 군종병은 하스킨스(Haskins) 부사관이 펠홀터 신부 전사 사실을 전하던 순간도 생생하게 기술했다. 펠홀터 신부 추모식은 1950년 7월 19일 내지 20일 충북 영동에서 열렸고, 같은 해 9월 펠홀터 신부와 전사 장병들은 선종 장소에서 큰 무덤에 함께 묻혔다. 펠홀터 신부 유해가 미국의 부모님에게 도착한 것은 1953년 7월 18일이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