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봄이 님의 얼굴이었습니다 / 김영자

김영자(클라라) 시인
입력일 2021-03-30 수정일 2021-03-30 발행일 2021-04-04 제 3238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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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의 따스함은 생명이며 희망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입춘이 며칠 남지 않은 날 폭설주의보가 있었다. 아침 미사 후 돌아오는 길에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쌓인 눈 위를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걷다가 내리는 눈발 속에서 봄을 만났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눈꽃이 여기저기 피어나 온 세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금방 봄이 찾아 올 것만 같다는 느낌, 그 느낌은 황홀했다.

황홀감에 젖은 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난 일들을 불러왔다. 가을을 무척 좋아했던 여고시절, 국어선생님의 봄 예찬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가을을 좋아해야 한다는 속단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50대에 들어서면서 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겨울 눈밭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다니! 해가 갈수록 봄의 생명력을 노래하며 봄을 예찬하시던 선생님을 떠올리곤 한다.

20여 년 전 봄방학 중이었다. 오랜 교직생활 중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분노가 가득 차 잠을 잘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급자에게 따져보며 항변해 보았지만 마음은 풀리지 않고 분노는 더욱 더 쌓여갔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심한 분노를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분노가 쌓이니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듯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 타인의 안타까운 일에 위로한다면서 쉽게 용서하라고 권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감한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걱정하던 후배 선생님은 수도원에 며칠 머물도록 권하면서 불암산 아래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안내해 주었다.

그 후로 나는 쉼이 필요할 때마다 그곳 수도원을 찾곤 한다. 일하고 기도하는 수사님들의 기도시간에 맞춰 함께 기도하고 미사 봉헌하면서 개인 침묵피정을 한다. 행복한 시간이며 감사의 시간이다. 내 작은 희생과 사랑의 항아리를 빚을 수 있는 은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해 4월, 부활시기 중이었다. 온통 배꽃으로 가득 찬 수도원에서 한 사흘 머물던 날이었다. 봄은 하느님의 모습, 만물을 창조하신 아름다운 님의 얼굴이라는 시 한 편 쓸 수 있는 행복이 찾아왔다. 시의 모티브는 그날 수도원장님의 미사강론이었다. 가끔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울고 싶다는 말씀에 갑작스레 시를 쓰고 싶다는 열의가 생겨난 것이다. 다음 소개하는 ‘봄이 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시 한 편이 내게 찾아와 창조의 신비와 사랑을 안겨 주었다. 그 후로 나는 봄이 오면 나를 안아 주시는 님의 얼굴을 뵙고 행복할 뿐이다.

하늘 속에 흰 배꽃이 가득 찬/ 불암산彿岩山 아래 사는 수도 사제는/ 오늘 아침 막달라 마리아처럼/ 울고 싶은 아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낮엔 봄을 님이라 불렀습니다/ 흰 옷자락 만지던 날은/ 내 꿈속이었지만/ 오늘은 배꽃을 받으며 님을 만났습니다

꽃목걸이 걸어주시던 따뜻한 손/ 봄처럼 안아주시던 님/ 봄이 되어 오신 나의 님/ 봄이 님이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봄이 님의 얼굴이었습니다.(‘봄이 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전문)

4월 배꽃이 가득하고 봄꽃들이 아름다운 불암산 아래 수도원에서 체험했던 용서의 신비는 은총이었다. 이 암울하고 긴 코로나 시기가 끝나면 그곳에 머물며 쉼의 시간을 갖고 싶다. 봄이 오면 그 신비를 묵상하며 님의 품에 안기고 싶다. 봄은 님의 모습, 님의 얼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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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클라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