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오늘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3-30 수정일 2021-03-31 발행일 2021-04-04 제 323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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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 제2독서(콜로 3,1-4) 복음(요한 20,1-9)
신앙으로 체험하는 주님 부활은
어둠에서 빛, 죽음에서 삶으로
우리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세례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단다. 그 사이에만 사는 거지.”(브라이언 멜로니)

성삼일 중에서 저는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기 전 성토요일 오전 침묵의 시간을 좋아합니다. 이 시간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 가장 위로받고 함께 기도해야 할 분은 예수님 어머니일 것입니다.

로마 성모님 대성당에서는 성토요일 오전에 라틴 전승과 비잔틴 전승의 텍스트와 노래를 결합한 ‘어머니의 시간’(l’ora di Madre)이라는 전례를 거행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성모님은 기도하며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성토요일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부활절 새벽을 맞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빈 무덤을 향해 세 사람이 달립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요한복음서 저자는 20장에서 부활 이후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여러 활동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빈 무덤에서 부활의 표징을 살펴보고 확인하는 베드로는 사목자를, 부활의 표징을 관상하고 이해하는 애제자(예수님이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관상가를 상징합니다. 관상을 통해 계시가 받아들여지고 사목을 통해 계시가 중재됩니다.

저자는 이것을 염두에 두며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요한 20,11-18)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이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는 장면(요한 20,19-29)을 전하기 전에, 빈 무덤 앞에 도착하는 시몬 베드로와 애제자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저자가 부활 장면에 남자와 여자들을 소개한 것은 교회 공동체 모두가 이들의 부활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라는 초대입니다.

첫째, 애제자의 체험입니다.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야 다른 제자도 무덤에 들어갑니다. 예수님 얼굴을 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 몸을 누가 훔쳐가지 않았음을 제안하는데 이것은 증거가 아니라 ‘표징’입니다.

표징은 그 자체는 모호하지만 신앙으로 가는 길을 엽니다. 애제자는 무덤 안에 있는 물건들을 봄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행위를 마주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부활했음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9절에서 자신의 부활 신앙 체험에 대한 신학적 해설을 소개합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도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오는 빛은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인데 예수님의 인격과 역사는 구약 전체를 비추는 빛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마리아 막달레나의 체험입니다. 본문이 아니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복음(요한 20,11-18)에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전하라고 한 부활 메시지가 나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17절)

예수님이 부활 메시지에서 마리아에게 한 약속은 믿음으로 결정되는 새 가정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그분 형제이자 누이, 하느님 자녀라고 불립니다. 예수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될 것이며, 예수님 하느님은 우리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칭호는 가부장제 언어가 아니라 친밀함, 관계성, 가족 언어입니다.

그녀는 사도들에게 이 부활 메시지를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 전승 안에서 ‘사도들의 사도’라고 불렸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죽고 무덤에 묻힌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충실하게 그분을 찾는 이, 교회를 상징합니다.

셋째, 베드로의 체험인데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느리게 성장하는 사람의 모델입니다. 베드로는 엠마오 제자들처럼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을 받고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사도행전 전반부에 나옵니다.

제1독서는 성령을 받고 담대한 선교사가 된 베드로가 이탈리아 부대 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케리그마입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사도 10,43) 설교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부활이 포함돼 있습니다.

마르코 도기오노 ‘그리스도의 부활’(1491~1494년, 일부)

베드로는 유다인으로 유다 율법에 따라 살았고 어떤 사람을 정결하거나 불결하다고 간주하던 사람인데 환시를 통해 이방인들도 하느님 계약에 포함된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바꿉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듯 베드로는 나중에 스승 예수님과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로 순교함으로써 위대한 부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준 체험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체험이 그런 경우입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건너갔는지, 예수님의 몸이 어떻게 이전 몸과 달리 부활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2000년 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활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각자의 부활 체험, 삶의 방식과 선택을 바꾼 건너감, 회심 체험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저의 빈 무덤 체험입니다. 오래 전 로마에서 공부할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모든 것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고 사방이 어둡던 날, 70번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작은 경당에 들어갔습니다.

“부활하셨네,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장례미사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담대하고 힘차게 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성가는 네오까떼꾸메나도 길(Neocatechumenal way) 창립자인 스페인 평신도 키코(Kiko)가 만든 ‘부활하셨네’(Risuscitò)였습니다.

그 분위기에 압도당했고 마치 이사야가 천상 어전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책이나 강의를 듣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절망에서 희망, 어둠에서 빛,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콜로 3,1-2)

오늘, 부활절 미사에서 코로나19로 많이 지쳐 있던 우리 삶을 환하게 밝히는 부활초를 손에 듭니다. 우리를 다시 정화하고 치유하는 세례의 물을 받습니다. 우리 인생의 길, 진리, 생명이신 하느님 말씀을 경청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죽음을 이기신 분이 우리 안에 머무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 우리의 두려움과 이기주의, 소심함과 세속성이라는 어두운 방에서 나와 빈 무덤 앞에서 함께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화답송)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