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 / 이미영

이미영(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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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흐드러진 여의도를 지나며, 봄날의 싱그러움보다 가슴 저릿한 아픔이 더 먼저 다가옵니다. 7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은 파스카 성삼일 바로 전날 수요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영광 속에 부활하셨듯 바닷 속에 잠긴 아이들이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길 기도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 즈음이면 기쁨보다 슬픔의 감정이 먼저 올라옵니다.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히는 것입니다”라던 세월호 유가족의 말이 떠올라, 세월호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는 날까지는 부활과 봄날을 맘껏 기뻐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올해는 핏빛 어린 소식까지 이 봄을 가득 채우고 있어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지난 2월 28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십 명이 죽고 다친 ‘피의 일요일’ 소식이 전해진 바로 다음 날, 연구소에서 국제연대를 담당하는 선배가 미얀마 친구들이 보내온 사진이라며 셀 수 없는 군중으로 가득한 시위현장과 시민들이 군대와 경찰 앞에 무릎 꿇고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피 흘리는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이 떠오르는 참담한 현장이었습니다.

선배는 말레이시아 교회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순시기 단식 운동을 벌이기로 주교단 차원에서 결정했다며, 연구소에서도 어떤 응답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 현지 활동가들에게 그곳 현실을 직접 듣는 온라인 긴급토론회를 서둘러 조직했습니다.

연구소에서 섭외한 2명의 활동가는 각기 가톨릭과 이슬람을 기반으로 한 종교단체의 대표로, 대부분 불교 신자인 미얀마에서는 소수 종교인이었습니다. 평상시에도 늘 적대심과 위협을 마주하였을 소수 종교인에게 이런 비상시국에서 그곳 상황을 전달해달라는 부탁이 그들을 행여나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닌지 많이 걱정되었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의 실명이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며 당당하게 미얀마의 현실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안전도 몹시 걱정되지만, 그곳의 참담한 현실에 어떻게든 응답하여 도움을 주어야 할 텐데 이후 대응방안이 막막한 것도 걱정스러웠습니다. 미얀마로 향하는 긴급구호나 원조창구는 대부분 막혔고, 미얀마 현지에서 선교 활동 중인 한국인 사제·수도자들을 접촉해 구체적인 지원 방법을 상의하려 해도 외국인 선교사들은 더 심하게 감시받고 있어서 외부에 노출되는 상황 자체가 위험해 조심스럽다고 고사했습니다. 도와줄 방법도 딱히 없는데 그저 그들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토론회를 준비하면서도 그곳의 긴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지 미얀마 활동가들과 토론자로 참여한 국내 미얀마인들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인 자신들의 현실에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아주 고마워했습니다. 국제정세나 정치 역학을 이유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정서가 팽배하고 미얀마 군부 역시 국제사회의 시선을 별로 개의치 않으며 학살을 멈추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불의의 현장을 함께 지켜보는 증인이 있다는 것, 또 그들이 고립되어 외롭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연대로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얀마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 고통받는 이들에게 귀 기울여 주는 것, 함께 아파하고 기도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와 연대임을 이번 토론회에서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도 미얀마 사람들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저 외면하지 않고 함께 기억해달라는 것, 책임자들이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같이 목소리를 내달라는 것뿐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의 얼굴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고통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부활의 희망을 품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지만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영(우리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