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묵주기도 예찬 / 김춘호

김춘호(프란치스코) 시인
입력일 2021-04-20 수정일 2021-04-20 발행일 2021-04-25 제 324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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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농촌 출생인 나는 일곱 살 개구쟁이 때 모친을 돕겠다고 재래식 부엌에서 땔감으로 쓸 장작 운반을 거들다 나무토막에 왼쪽 눈을 크게 찔려 동공이 다치면서 안타깝게도 실명됐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소년기의 나는 외눈박이로의 불편을 실감하지 못했으며,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어떤 원망도 없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왕따’ 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성장했다.

1970년대 초 결혼을 준비하며 천주교 신앙에 입문한 나는 본당 활동은 미숙했지만 묵주기도에는 관심이 깊어 레지오 주회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래서 1단 묵주는 늘 주머니 속에 지니고 다녔다. 신혼 무렵 아내가 뜻밖의 결핵 중기로 치료받으며 투병 중일 때, 남편인 내가 도울 방법은 고작 ‘기도’뿐이었다. 5년쯤 요양을 한 뒤 아내는 어느 정도 회복의 끈을 잡았고, 약은 계속 복용해야 했지만 정상생활로 돌아왔다.

그런데 30대 중반 직장 건강검진에서 왼쪽 외눈박이인 내게 오른쪽 눈마저 녹내장이 진행중이라는 청천벽력의 판정이 내려졌다. 곧 꾸준히 치료하지 않으면 실명 위험이 높다고 했다. 매주 한번은 통원 치료를 하면서 나는 자나깨나 시간과 공간만 생기면 묵주기도를 바쳤다. 특히 ‘성모송’의 끝자락에 힘을 실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보면서만 갈 수 있게’ 빌어 주소서. 아멘”으로 ‘보면서만 갈 수 있게’를 임의로 삽입해 간구했다.

그렇게 30여 년이 흘러 정년 시기인 60대 후반, 녹내장은 악화됐고 3~4년 동안 1·2차 수술을 거쳤지만 황반변성에 이어 망막마저 손상돼 시력은 칠흑의 터널로 들어섰다. 완전 장님이 된 것이다. 밤과 낮이 구별되지 않는 어둠속에서 잠을 깨면 침실 옆 욕실로 달팽이처럼 기어가 ‘고양이 세수’를 하고 식당까지는 ‘습관’을 이용해 이동했다.

하지만 식탁과 음식을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늘 옆자리의 아내가 시중을 들었다. 날마다 절망 속에서 차라리 극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계속 생각하며 또 한 해를 넘겼을 때, 담당 의사가 희소식을 통보했다. 아직은 시신경이 건강한 편이라 조건이 맞는 각막만 찾아 이식하면 시력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2014년 4월 꽃소식이 전해질 무렵 첫 수술은 안구은행을 통해 안구를 받아 이뤄졌는데, 이식 뒤 며칠이 지나도록 시력 회복은커녕 통증이 깊어 고통스러웠다. 퇴원하고 2주쯤 지나서 담당의사가 또다시 나직이 새 소식을 알렸다. 이번엔 어떤 천사 같은 분이 선종하면서 제공한 안구를 받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마침내 서로의 신상정보를 불문에 부친 채 천사의 선물을 맏아 재수술을 받게 됐다. 두 번째 고통스런 수술을 마치고 입원실로 옮겨 하룻밤을 자고 깬 다음 날이었다. 새벽 5시경이었을까, 회진하던 의사가 내가 누운 침대 앞쪽으로 다가와 “눈 좀 떠볼까요?” 했다. 안대를 밀고 눈을 떠봤다. 통증은 있지만 희미하게 주변이 보였다. 내 눈에 띈, 의사가 세운 손가락은 두 개. “손가락 두 개!” 이렇게 대답하자 의사는 다시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내가 “세 개!”라고 소리치자 의사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축하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가족들은 눈물을 하염없이 닦아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묵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춘호(프란치스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