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솔뫼, 신부님 생가 툇마루에서 / 남궁경숙

남궁경숙(안나) 동화작가
입력일 2021-05-03 수정일 2021-05-04 발행일 2021-05-09 제 324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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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 같았으면 소공동체에서도 몇 차례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실행했을 아름다운 계절이 속절없이 저문다. 며칠 전 그 허전함을 솔뫼성지에서, 합덕성당과 신리성지에서 풀었다. 몇 차례 다녀온 성지지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의 전대사 은총도 주어지는 올해는 특별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신부님의 생가 툇마루에 잠시 앉으니 철없이 뛰어놀던 어릴 적 신앙의 내 자리도 보인다. 피난으로 굴곡 많았던 어린 시절, 아카시아꽃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성당 마당은 내게 참 좋은 놀이터였다. 천주교라는 이름도 모르고 부모님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교우가 없었는데, 나는 성당 마당에서 놀며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사랑까지 받았다. 가을이면 잘 익은 감나무의 감을 우려 간식으로 나누어 주시던 수녀님들의 그 빳빳한 머리쓰개도 생각난다. 뚱뚱하신 프랑스 신부님은 열심히 묵주알을 돌리시다가도 주머니에서 사탕을 자주 꺼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는 사탕신자다’란 말을 우스갯소리로 한다. 가난했어도 풍성했던 어린 시절, 참 그때가 그립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철부지의 연속이었는데, 열다섯 어린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으로 유학을 떠나신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해 본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머나먼 낯선 땅으로 유학을 떠나실 때 신부님도 두려움이 왜 없었을까. 풍랑이 심했을 바닷길과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속에서 오직 하느님 사랑을 믿으시며 불쌍한 교우들에서 신앙의 뿌리를 심어 주시고자 가시는 그 길이 가시밭길임을 왜 모르셨겠는가.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온갖 회유와 감언이설을 물리치고 순교의 칼을 받으셨던 그 용기로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실까.

복음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누가 큰사람인지 다투며 눈에 보이는 것만 좇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주님은 아이를 하나 세우시고 어린아이같이 순수함으로 살지 않고는 진정 하늘나라의 큰사람이 될 수 없다 하셨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하여 나를 내려놓는 삶을 살라 하시는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적당히 타협하려 들 때는 없었는지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네 눈의 티끌만 탓하려 들지는 않았는지. 입으로만 주님주님 주저리는 입술 신자는 아닌지. 이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열중하고 내 옮음만 고집하며 돌아볼 줄 모르는 고집과 이기심을 그만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무재칠시’라는 말씀이 있다. 나눔을 말할 때 손에 쥔 재물을 생각하지만 가진 것 없이 나눌 수 있는 일곱 가지 방법이다. 자비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보고 온화한 미소의 얼굴을 갖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말로 대화하고 내 몸의 노동으로 도울 수도 있고 너그럽고 후하고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내가 앉은 자리를 양보할 줄도 아는 아름다움과 잠자리나 음식을 나눌 수 있는 마음 갖고 실천을 살자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돌아가신 구상 선생님은 하나를 보태어 기도하여 주는 마음을 더한 ‘무재팔시’의 삶을 살자 하셨다. 내 삶이 철없이 행복했던 유년기도 청년기도 지나고 저물녘에 이르렀으니 ‘무재팔시’의 삶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믿음 안에서 통공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는 우리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배움보다는 체험이라고 한다. 아침의 눈뜸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오늘도 감사드린다. 발길을 이곳 성지로 끌어주셔서 김대건 신부님 생가 툇마루에서 꼬리를 물고 시작된 기적으로, 잊고 있던 어릴 적 내 신앙의 시작과 지금의 신앙을 묵상하게 하신 주님께 그리고 순교 성인들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툇마루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일어나 가던 길 가자. 봄빛 속의 순례가 또 하나의 추억으로 오래오래 내 안에서 기억되리라.

손끝의 가시라며 날고 뛰던 내 엄살을

조용히 눈감고 하나하나 지웁니다.

뒤돌아 핏빛 가시관 눌러 씌운 음모까지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궁경숙(안나)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