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복록의 삶 / 남상숙

남상숙(소화데레사) 수필가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1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자연히 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젊어서 읽었던 느낌과 다른 것은 살아온 연륜 덕분이겠지요.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접하다가 알게 된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학연, 학유 두 아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보낸 편지는 구구절절 애틋합니다.

이 책의 반은 아들에게, 나머지는 형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약전은 어부가 잡아오는 물고기를 해부하고 주요 부위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집필합니다. 약용은 독서를 하거나 저서에 몰두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형을 선생으로 호칭하며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하고, 유배지에서의 시름과 어려움을 견뎌냅니다. 약전은 동생의 저서를 정성스럽게 읽으며 고마워하고 대견해하지요. 약용은 형을 인생의 스승으로, 동반자로 생각하기에 세상에 대한 견해가 타인과 다를 때에도 편지를 씁니다. 죽음에 대한 약용의 생각이 의외로 긍정적이고 분명해서 도인의 품격을 느꼈습니다.

‘윤외심(尹猥心)을 재작년 해남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지 않고 서로 만났으니 이상도 하네”했더니, “사람이 죽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인가” 윤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기가 가장 쉬운 일이네”했더니, “죄악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 거네” 윤이 말했습니다. “복록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 거네” 하다가 서로 웃고서 그만 두었습니다. 윤이 말한 “죄악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대체로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만, 이것은 바로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말로 도(道)를 아는 사람의 말은 아닙니다.’

윤외심은 교리(校理)를 지낸 분으로 약전, 약용형제의 친구입니다. 약용은 도를 아는 친구의 말이 뜻밖이어서 형에게 편지를 보내며 죽음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자, 언젠가 했던 그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원래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대의 삶은 결핍의 세월이었지요. 사회적으로 번듯하지도,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도 않은 현실을 살아내며 지난 시간들을 원망할 듯싶은데, 늘 밝은 표정으로 인생에 대하여 기쁘게 성심을 다하는 자세가 고마웠습니다.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태도, 인생에 대한 관대한 포용도 이 글의 맥락과 닿아 있어 각별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긍정과 온유의 정신이 주위 사람들을 밝고 훈훈하게 하여 그대를 만나고 싶어 하겠지요. 정치적인 이유로 감금당한 유배의 세월이 약전, 약용에게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현실을 비관하지 않고 하늘이 부여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았기에 누구나 두 분을 존경하는 것이겠지요. 그들의 빛나는 생애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듯 인생이 기쁠 수밖에 없는 그대의 나날도 축제마당이겠습니다.

‘복록이 다한 연후에 죽는다’는 말은 인간이 복록을 타고났으니, 그것을 누리며 살다가 종언을 고한다는 것이겠지요. 그건 인생에 대한 이해이며 감사이기에 깨달았다는 것이야말로 은혜로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친구란 언제나 사랑해주는 사람이고 형제란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사람이다.’(잠언 17,17) 고난의 삶 속에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두 지성은 친구였고,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난 형제였습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라 했던가요.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하려 노력할 때, 그것조차 순응하며 기꺼워할 때 삶은 충만함으로 넘쳐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연유입니다. 복록이 다하는 날 세상을 하직한다는 약용의 말이나 날마다 즐겁게 산다는 그대의 말이, 사태 지듯 피어난 봄꽃처럼 가슴 출렁이게 합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상숙(소화데레사) 수필가